ㆍ“고1때 혁명하겠다고 자퇴… 그런 놈을 노 대통령이 건져줬죠” ‘좌희정, 우광재.’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당시 대중들은 두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하여 이들은 노 전 대통령과 더불어 부침을 겪다가 나란히 충남과 강원의 수장에 당선됐다. 안희정과 이광재, 언론에서는 ‘노(盧)의 남자들 부활’이라고 칭했다. ‘부활’한 안희정 충남도지사와의 만남에 앞서 노 전 대통령을 보내드리던 그날이 떠올랐다. 서울시청앞 노란 물결 속에서 울면서 노제를 진행했던 짧고도 길었던 순간, 나는 그곳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직접 체험했다. 노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좌희정은 조직에 강하고, 우광재는 기획에 능했다”고 평했다. 나에게 안희정 지사는 투사적인 강인함과 단단함, 날카로움으로 각인돼 있다. ‘야생마’가 이른바 ‘꼰대’가 됐다니 쉽게 상상이 안갔다.
- 왠지 공무원 티가 물씬 나십니다. 눈빛도 부드러워지신 것 같네요. “선거하면서 많이 웃으라기에 의식적으로 노력했는데 주변에서 표정이 좋다고 그러더군요. 웃으려면 마음이 즐거워야잖아요. 근데 얼굴 근육을 ‘웃는 근육’으로 만들면 마음상태도 자연히 즐거워진대요. <감정심리학>이라는 책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니 당혹스럽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 거예요? “초짜 도지사가 돼 놔서 정신없어요. 현안 파악하고 충남도 내 시·군 다니면서 도민들 만나고…. 무엇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게 가장 달라진 점이죠.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하다보니 오늘도 5번이나 했네요. 나라를 사랑하겠다고 자주 맹세하면 일종의 자기최면 효과도 있어요.” - 젊은 시절 내내 ‘투사’였다가 지금은 ‘제도권’으로 오셨는데 소회가 궁금해요. “제가 투사시절엔 반국가투쟁이 아니라 특권과 반칙에 대해 싸웠죠. 헌법을 무시하고 총칼로 권력을 잡은 뒤 특권을 누리는 것에 반대한 겁니다. 전 도민들 만나서도 그래요. ‘제가 힘 있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권세도 없다. 모두 여러분들이 결정하는 거다.’ 모든 일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자의 역할, 그것이 도정의 근본 원칙입니다.” - 최근 4대강 사업에 대한 입장이 바뀌지 않았느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도 그런 입장과 연관이 되는 건가요? “전 기본적으로 그 사업을 왜 하는지 모르겠고, 막대한 예산을 그렇게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일단 4대강 사업은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수질 개선이나 홍수 예방과는 상관없어요. 그러려면 오염원을 없애고 지천을 정비하는 데 예산이 집중돼야 하는데 현장은 그렇지 않고, 그 부분에 대한 예산도 없어요. 핵심은 토목전략에 기반한 지역개발 사업이죠. 강의 폭을 넓히고 친수공간을 만들어 그 주변지역을 개발하고, 퍼낸 흙으로 저지대 땅을 높여 가치를 올리자는 것. 즉 친수공간 확보를 통한 부동산 개발전략, 부자 만들기 전략이라는 겁니다. 정부가 좀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엉뚱한 말을 빙빙 돌려 갖다붙이지 말고요. 인정하고 나서 이에 대한 찬반 토론이 이뤄져야 미래를 위한 생산성 있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업의 본질에 대해 도민들이 토론하고 입장을 정해보자고 특위를 구성한 겁니다.”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은 ‘특권’을 행사해온 정치권에 환멸을 갖고 있다. 멀쩡하던 사람이 왜 ‘완장’만 차면 변할까. 그렇다면 안 지사는 그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지, 또 부여받은 권리를 어떻게 사용할 계획인지가 궁금해졌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특수한 권력과 지위가 많이 허물어졌죠. 특권을 없애자는 1단계 민주화의 싸움은 끝났어요. 이젠 2단계 민주화 운동이 필요해요.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어떻게 소통하느냐가 전 단계의 민주주의였다면, 양자가 한 몸이 돼 한 곳을 바라보고 가는 민주주의가 이뤄져야죠.” - 없어졌다는 특권이 요즘 되살아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오랜만에 권력을 잡은 예전 분들이 세상 변한 걸 모르고 옛 방식대로 해보려고 하면서 불거진 현상이라고 봐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죠. 이 말들이 지난 우리 역사를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였어요. 대중들의 이런 믿음과 의식이 독재를 성립시켰고, 말도 안 되는 많은 일들을 만들어냈어요. 가령 관급공사 입찰에서 떨어진 분은 ‘내가 빽을 덜 써서 그래. 더 쎈 걸 찾았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합니다. 전 이런 생각과 믿음이 없어져야 한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모든 과정이 다 공개되고 투명해져야 합니다. 지난 정권에서 대통령 ‘빽’으로도 안 되는 게 많다는 것을 보여줬어요. 그걸 보여주니까 낡은 정치문화에 있던 사람들이 아마추어네 하면서 업신여기며 만만히 봤죠. 지금 다시 옛날 방식으로 집권하지만 이제 국민들이 다 알아요. 어떤 대통령이 좋았는지…. 법과 규칙은 국민이 정한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 그게 촛불집회죠. 600년 전 <경국대전> 서문에도 나와 있듯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어요.” 부자 만들기 전략… 정부 좀 솔직해져야” ▲ “참여정부 시절 투사 같은 이미지로 각인됐던 그가 왠지 공무원 티가 물씬 난다. 눈빛도 부드러워진 것 같고…” - 김제동 안 지사의 출마와 당선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무관치 않다. ‘바보 노무현’을 대통령까지 만들고도 그는 감옥에 갔고,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다. 조심스레 평생 모셔온 그분의 죽음에 대해 묻자 잠시 대답이 겉돈다. 아직도 감정정리가 힘든 듯 슬픈 표정을 내비친다. “아니,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진정으로 애정을 갖고 좋아했던 분이죠. 고1때 혁명하겠다고 자퇴한, 그런 놈을 노 대통령이 건져준 거죠. 1990년대 초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혁명의 시대가 끝나면서, 내가 옳다고 믿었던 혁명의 역사가 쇠락하고…. 아무것도 아닌 현실로 돌아가버린 상태에서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었을 거예요. 여담이지만 그 당시 혁명적 이념을 갖고 결혼했던 많은 부부가 이혼했어요. 혁명의 시대에 남편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는데, 그 시대가 끝나고 나니 어느새 남편이 한심한 백수가 돼 있었던 거죠.” - 자신의 이야기인가요? “다행히 저는 교편생활을 하던 집사람이 결혼 후 14년 동안 저를 열심히 거둬주고 은혜를 베풀어줬어요(웃음).” - 말이 14년이지, 옥바라지도 여러 차례 하셨잖아요. 군대 뒷바라지도 힘들어 고무신 거꾸로 신는 여성들이 많은데…. “그래서 제가 집사람이 큰소리치면 아직도 맞서질 못해요.” - 노 전 대통령뿐 아니라 부인께서도 안 지사님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건져주신 거네요. “그렇죠. 전 집사람의 ‘심리적 상태’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아요.” - 우하하. 심리적 상태요? ‘난 집사람 눈치 엄청 본다’는 말이잖아요. 제가 살다살다 그런 표현 쓰시는 분은 처음 봐요. 완전 웃긴데요. “여하튼 전 집사람뿐 아니라 타인의 심리적 상태에도 민감해요. 대체로 충청도 사람들이 그래요. 그게 충청도 역사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황산벌(논산)이 제 고향인데,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죽음이 있었던 곳이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겪으면서 그 지역 사람들은 자신을 ‘커밍아웃’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일인 시대를 살아왔어요. 그런 역사의 누적이 심리적인 특성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둔하고, 또 그것을 드러내는 데도 익숙치 않아요.” - 맞아요. 저도 ‘토크콘서트’ 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지역별 기질의 특성이 다른 것이 굉장히 재미있더라고요. 경상도 사람들은 감정표현이 즉각적이고, 충청도는 ‘냅둬유, 개나 주게’ 한다잖아요. “충청도 스타일의 전형이죠. 언뜻 웃긴 것처럼 들리는데 속뜻은 진짜 무서운 거예요.” 자신을 드러내는 ‘커밍아웃’ 익숙지 않아” ▲ “나도 ‘토크 콘서트’하며 많이 느낀다. 경상도 사람들은 즉각적, 충청도는 “냅둬유, 개나 주게”한다. 감정표현도 제각각이다.” - 김제동 - 아이들한텐 어떤 아빠세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아이들이랑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고 지금은 고2, 중2가 됐어요. 아이들 보면서 우리 시대랑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 우리라뇨? 전 지사님보다 10살이나 어려요. ‘X세대’라고요. “어휴, 젊어 좋겠수. 여하튼 제 시대엔 타인과의 관계, 남들이 정한 틀에 나를 짜맞춰야 했어요. 사회에서 촉망받는 사람, 모범생이 된다는 건 나를 버리고 주변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였죠. 모든 교육과 사회화 과정은 ‘야생마를 거세시키는 작업’이었다고 할까요? 그런 과정을 겪었던 우리가 이제 어른이 된 거죠. 예전에 우릴 칭찬해주시던 어른은 없고,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공백은 뭘로 메워야 할지…. 요즘 많은 고민을 해요.” - 지금은 아이들이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믿지만 그 시절엔 정반대였죠. 타인이 규정한 틀에 나를 맞추며 살다가 이제 와서 나 자신을 채우려고 하니 힘든 거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제동씨랑 나랑 같은 세대 맞는데 뭘 굳이 ‘X세대’ 운운하며 부정하려 해요?” 듣고 보니 감정표현에 서툰 건 안 지사와 내가 비슷하다. 예전에 정신과적인 분석을 받아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내가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거의 초능력 수준이란다. 그래서 스스로 굉장히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줄 아는 자유분방한 아이들을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요즘 특히 더 그렇다. -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어요. 고1때 혁명을 하겠다고 자퇴를 하셨다는데 그 나이에 그게 가능한 건가요? “한 번은 퇴학당하고, 또 한 번은 자퇴했어요. 제가 초등학교때 계몽사에서 나온 <한국사이야기> 12권짜리를 읽으면서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더라고요. 폭정에 시달리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정권을 잡으면 똑같이 변해버리는 것. 혼란스러웠죠.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좀 조숙했던 것 같아요. 정의니 약자에 대한 의무니 이런 생각들 말이에요.” - 정의가 뭘까요? “강한 사람을 바르게 하기 위해, 약한 사람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필요한 거죠.” - 그럼, 우리가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거죠? “겨울이죠. 그렇지만 겨울이야말로 생명이 싹트는 계절이에요. 어릴 때 어머니가 밀가루를 치대서 칼국수를 만드는데 그만하고 끓이면 좋겠다싶은데도 자꾸 비벼 치대기를 반복해요. 그럴수록 칼국수의 면발이 쫄깃해져요. 전 그 칼국수의 면발이 역사가 전진하는 방법 같아요. 지금은 치대고 있지만 이 자체로 전진이죠. 태양만이 역사를 전진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뭘 물어도 정리돼서 진지하게 돌아오는 답변. 안 지사와의 인터뷰는 대학 교양강의 여러개를 한꺼번에 들은 느낌이었다. 심리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강의하듯 풀어냈고, 일반사람들이 평소에 쓰지 않는 문어체 표현도 많았다. 어려운 단어와 표현을 풀어내려니 머리가 아팠다. 나만 머리 아플 수 있나. 오늘 저녁 ‘편한 동생들’ 불러서 ‘한국사회 진보의 미래’에 대해 토론해 봐야겠다. <정리 |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
[김제동의 똑똑똑](15) 안희정 충남도지사
경향신문 원문 기사전송 2010-09-02 22:30 최종수정 2010-09-0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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