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조봉암

참도 2020. 11. 30. 10:56

한국 현대사에서 해방 정국과 1960년대는 상당히 역동적인 시기다.

해방정국에서는 민족의 향후 진로를 놓고 격렬한 충돌이 있었고,

1960년대에는 4·19 혁명, 한일회담 반대투쟁, 3선 개헌 반대 투쟁 등이 있었다.

그 두 시기에는 진보 세력의 활약도 대단했다.

이들은 해방 정국에서는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위해 싸웠고,

1960년대에는 민주주의와 반일과 반(反)박정희를 위해 싸웠다.

 

두 시기가 역동적 이미지를 띠는 데는 진보 세력의 역할도 적지 않다.
그런데 1950년대의 이미지는 그렇지 않다.

한국전쟁이 있었던 이 10년간은 다소 우울한 잿빛 같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해방 정국의 역동적 이미지가 1950년대에 끊겼다가

1960년에 갑자기 부활한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인류 역사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은 인과관계의 지배를 받는다.

1960년 이후의 일들도 다르지 않다.

해방 정국 이후로 뚝 끊어진 일이 1960년에 다시 나타난 게 아니라

 

해방 정국의 흐름이 1950년대로도 이어지고 이것이 1960년대로 계승됐다고 인식하는 게 합리적이다.

1950년대로부터 역동적인 흐름을 포착하게 되면, 한국 현대사 전체가 끊김 없이 연속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런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근거가 있다. 바로, 죽산 조봉암이다.

그로 대표되는 1950년대의 진보적 흐름이 있었기에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가 연속성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찬물 끼얹은 민주당

조봉암은 1950년대의 그 어떤 정치가가 해낸 것보다도 더 큰 일을 해냈다.

직선제 개헌 이후인 1952년 제2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 연속 2위를 기록했다.

그는 '민주당 조봉암'이 아니었다. '무소속 조봉암'이었다.

 

그래서 그의 2위 낙선은 대단한 것이었다.
제2대 때는 자유당 이승만이 74.61%,

무소속 조봉암이 11.35%였다.

 

제3대 때는 이승만이 69.98%,

조봉암이 30.01%였다.

야당인 민주당으로 갈 표가 조봉암 쪽으로 쏠렸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제3대 대선의 경우 민주당 표가 조봉암으로 갔다면,

그의 득표율은 두 배 이상 높아졌을 수도 있다.

▲ 제3대 조봉암 대통령 후보 벽보와 이범석 부통령 후보의 벽보. ⓒ 국가기록원


제3대 대선 열흘 전인 1956년 5월 5일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호남행 열차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유행가 '비 내리는 호남선'을 국민 애창가로 만든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경무대의 이승만 쪽으로 의혹의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이승만에 대한 분노가 커졌지만,

민주당은 이승만을 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우리는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라며 투표용지에

 

여전히 이름이 적혀 있는 신익희를 찍도록 유도했다.

조봉암 쪽으로 갈 수도 있었던 표들이 이로 인해 무효표가 됨에 따라

조봉암이 받은 216만 3808표에 근접하는 185만 6818표가 무효표가 됐다.

 

민주당이 이승만 견제가 아닌 조봉암 견제에 나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은 그 이전의 한국민주당 때는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라는 국민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열망을 부분적으로 계승한 조봉암을 돕지 않은 민주당의 태도는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다.

그런 인물이 70% 이상을 득표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개표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1957년 5월호 <신태양> 별책에 기고한 '나의 정치백서'에서

조봉암은 "항용 말하는 것처럼 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는 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지연 경남대 교수의 <한국 정당 정치사>는 박기출 전 신민당 국회의원의

<한국 정치사>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조봉암 측 관계자의 개표장 입회를 막는 방법으로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의 표를 크게 줄이는 한편,

 

이승만의 표는 불려놓는 상투적인 수법을 동원해 이승만의 당선을 날조했다고

(박기출이) 주장했다"라면서 "만일 공정한 투개표가 이루어졌다면 조봉암의 표는

6백만 표를 넘고 이승만의 표는 1백만 표 전후가 됐을 것"이라는 박기출의 추정을 소개했다.

개표가 공정했다면 조봉암이 제3대 대통령이 됐을 수도 있다.

그런 영향력을 가진 조봉암이 1950년대 두 차례 대선에서 이승만과 경쟁했다.

진보파인 그가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해방 정국과 1960년대뿐 아니라

 

1950년대에도 진보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상당했음을 반영한다.

그런 조봉암이 풍미한 시대라는 점에서 1950년대는 우울한 잿빛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역동적인 도전의 이미지로 기억될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제3의 노선

조봉암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듬해인 1898년 9월 25일 강화군 선원면에서 출생했다.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군청 사환, 면서기, 대서사 보조원 등을 거친 그는

1919년 3월 18일 만세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1920년에 서울로 간 그는 YMCA 중학부에 다니던 동안에도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2주간 구속됐다.

23세 때인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고학생의 삶을 살았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의 '죽산 조봉암' 코너는 "엿장수를 하며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하고 주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라고 말한다.

그 뒤 그는 무정부주의 독립투사를 거쳐 공산주의 독립투사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려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논리적 토대에 입각한 선택이었다.

1922년부터 그는 중국과 러시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직과 외교활동에서 특히 두각을 보였다.

그러던 중 34세 때인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돼 한국으로 압송된 뒤 지독한 고문을 받았고,

 

"고문으로 상한 손가락 7개를 동상으로 잃어야 했다"고 '죽산 조봉암' 코너는 말한다.
1939년(41세) 7월 석방됐다가 1945년(47세) 1월 구금된 조봉암은 그해 8월 15일 석방된 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다.

 

그 뒤 그는 사상적 변모를 보인다.

1946년 7월부터 노동계급의 독재도 반대하고

자본계급의 전제(專制)도 반대하는 제3의 노선을 천명한 것이다.

'나의 정치백서'에서 그는 "나는 <삼천만 동포에게 격함>이라는 작은 책자를 내어서

공산당과 극우파들의 반민족적인 정치 행동을 규탄하고 민족자주의 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독립운동이 계속되어야 할 것을 강경히 주장"했다고 말했다.

▲ 강화군 강화읍에서 찍은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비 ⓒ 김종성


남한 단독선거를 거부한 일반적인 진보 진영과 달리 그는

1948년 5·30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고 헌법 기초위원이 됐다.

또 무소속 의원들을 규합해 무소속 구락부(클럽의 일본식 음역어)를 결성하고 이들의 리더로 떠올랐다.

1948년 6월 12일 자 <조선일보> 기사 '삼일·무소속 양 구락부'는

무소속구락부가 "민주주의·민족자결 국가의 건설과 남북통일·자주독립을 평화적 방법과 정치적 수단으로

전취(戰取)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규약·강령을 통과"시켰다고 보도했다.

1948년 8월부터 약 6개월간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불완전하나마 농지개혁 토대를 마련한 뒤

1950년 제2대 총선 때 재선되고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이승만이 직선제 대통령의 길로 나선

1952년부터 그 대항마로 떠오르며 1950년대 정치를 풍미하게 됐다.

죽은 조봉암이 산 이승만을 이기다

국민적 지지는 물론이고 의회 기반도 취약했던 이승만은 국회 간선제로는 재선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선제 개헌을 향해 길을 나섰다.

한국전쟁 중에 군대를 동원해 이른바 발췌개헌이라는 불법 개헌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그렇게 직선제로 도주했지만, 그 도주로에는 조봉암이 버티고 있었다.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외친 진보 세력이 해방정국에서 크게 와해했는데도,

조봉암은 두 차례 대선에서 진보적 유권자들을 결집해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 때문에 진보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도 그런 성과를 거둔 것이다.
두 차례 다 2위에 그치기는 했지만 조봉암은 이승만의 승리를 석연치 않은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더 나아가 4·19 혁명에 필요한 정치적 조건을 예비하는 데도 기여했다.

이승만이 직선제로 방향을 바꾸자마자 조봉암이 등장해 대항마로 떠올랐다.

이는 이승만의 직선제 앞날이 평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특히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이 석연치 않게 승리한 것은 그에게 민주적 정통성이 없다는 점을

 

대중에게 각인하기에 충분했다.

이는 이승만이 선거 부정도 불사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킴으로써 다가오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맞서 온 국민이 궐기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다.

이승만의 앞길을 험로로 바꿔버리는 마술을 선보인 조봉암은 이승만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됐다.

이승만은 조봉암이 제3대 대선 뒤인 1956년 11월 10일 창당한 진보당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보당은 재벌 자본이 아닌 민족자본을,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외쳤다.

 

이승만은 조봉암과 진보당을 공산주의 빨갱이로 몰아 조봉암은 사형시키고 진보당은 해산시켰다.

▲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봉암. ⓒ wiki commons


1959년 7월 27일 대법원에서 조봉암 사형이라는 선고가 떨어졌다.

재심이 청구됐지만 3일 뒤 기각됐다.

그런 뒤 7월 31일 오전 사형이 집행됐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서둘러 죽였지만,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조봉암이 깔아놓은 위와 같은 밑바탕이 원동력이 돼

4·19 혁명의 불길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하와이로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죽은 조봉암이 산 이승만에게 역전승을 거뒀다고 해석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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