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국정원장 서훈의 칼끝 .. '좌우 적폐' 모두 청산해야이영종 입력 2017.08.30. 01:01 수정 2017.08.30. 06:35
'보수 때리기'에 집중된 분위기
대북 뒷돈 거래와 눈치보기도
국가 정보기관의 참담한 민낯
정권 입맛 따른 편향된 개혁은
또 다른 적폐 만들 패착될 수도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가 술렁이고 있다. 북한 핵이나 미사일 때문이 아니다. 이른바 ‘적폐 청산’ 칼날을 빼든 서훈(63) 원장의 개혁 드라이브가 그 진앙이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시절 문제점을 집중 파헤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볼멘소리도 만만치 않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국가 정보기관도 제 역할을 못한 건 마찬가지란 얘기다. ‘좌(左) 적폐’도 손보자는 주장이다. 첫단추 꿰기부터 편향 논란에 휩싸인 국정원 적폐 청산의 문제점을 들여다보고 성공 조건을 따져본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은 설립 56년 역사에 가장 굴욕적인 대북공작 실패를 경험한다. 핵심 정보 당국자들 사이에 아직도 악몽으로 기억되는 북한 공작원 서울 납치소동이다. 새 정부 출범 5개월이 지난 1998년 7월 국정원은 중국 선양(瀋陽)에서 대남 정보 요원 최인수(당시 43세)를 납치한다. 대선 과정에서의 북풍(北風) 사건을 조사한다는 생각에서다. 안가에서 철야 신문을 당하던 최씨는 감시 소홀을 틈타 맨발로 탈출했다. 이 사건으로 담당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고, 해외공작 전담 6국은 아예 해체됐다. 최씨를 보호하던 기관으로부터 신병을 넘겨받은 국정원은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최씨는 북한 당국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처형된 것으로 파악된다.
대한민국 국가 정보기관으로서의 국정원 위상을 바닥까지 실추시킨 건 대북 비밀송금 파문이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첫 남북 정상회담 개최 과정에서 북한 측에 4억5000만 달러(약 5067억원)의 천문학적인 돈을 몰래 보냈는데, 국정원이 핵심 역할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자금의 불법 환전소 역할을 했고, 정보요원 개인의 계좌까지 동원했다. 대북송금 특검에서 국정원 고위 간부는 “북측이 군사비로 전용할 우려가 있다는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증언을 해 국민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국민을 기만하거나 언론에 책임을 돌렸다.
수집된 대북정보를 바탕으로 국가안보의 알람 역할을 해야 할 국정원의 파행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내내 줄을 이었다. 북한이 현대 측에 각종 차량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뒤 대남공작원 훈련에 쓴 사실을 포착하고도 쉬쉬했다. 대북 반출 금지 품목인 컴퓨터와 LCD 모니터를 북한이 요청하자 “중국에서 사서 쓰라”며 40만 달러를 우리 당국자가 갖다 준 적도 있다.
남측이 지원한 식량을 군사용으로 전용하기 위해 북한이 군용트럭으로 실어 부대로 반입하는 장면을 포착하고도 눈을 감았다.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부터 노무현 정부 말인 2007년까지 북한에 보낸 식량은 쌀 240만t을 포함해 7억2000만 달러어치였다. 모두 국민 혈세로 마련됐다.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통일부의 고위 당국자들은 “차관 형태로 공여하는 것이니 북한이 반드시 갚을 것”이라 호언했다. 그렇지만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청구서 수령조차 거부하며 핵과 미사일로 ‘서울 불바다’를 위협하고 있다. 당시 국정원장이나 통일부 장관 등 어느 누구도 자신의 책임이라며 고개 숙이거나 김정은에게 “김정일 집권 시기의 차관을 당신이 갚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분명한 건 서훈 국정원장이 누구보다 이런 상황을 잘 안다는 점이다. 국정원에서 28년간 잔뼈가 굵은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핵심 북한 정보를 다뤘고, 크고 작은 대북접촉에 빠지지 않았다. 현재로선 서 원장이 이런 문제보다 보수정부 시절 국정원 관련 이슈에 코드를 맞추는 분위기다. 국정원 ‘적폐청산 TF(태스크포스)’가 확정한 13개 대상은 ▶남북 정상회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 ▶국정원 댓글 ▶문화계 블랙리스트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 ▶보수단체 지원 등에 집중됐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수뢰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을 당시 “(고가의 시계를) 밖에 버렸다”고 진술한 내용이 ‘논두렁에 버렸다’로 드라마틱하게 각색된 대목에 국정원이 개입했는지 들여다본다고 한다.
국가 정보기관의 비행을 들춰 바로잡자는 데 제동을 걸기는 어렵다. 비공개·익명 활동이 가능한 특권을 활용해 음습한 정치공작과 조작·비리를 저질렀다면 응당 처벌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특정 정부의 입맛에 따라 ‘적폐’ 여부가 규정되고, 편향된 조사와 공정하지 못한 책임 따지기가 벌어진다면 국민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상명하복의 미덕이 여전한 국정원 요원들에게 정권교체 때마다 ‘좌향좌, 우향우’를 강요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적폐 청산이 정작 또 다른 적폐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도 우려된다. 이번에 국정원 1급 간부(실·국장과 주요 지부장) 30여 명이 모두 물갈이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발탁된 이른바 ‘적폐 관련 인사’들은 철저히 배제됐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초기 김대중·노무현 정부 세력으로 몰려 하루아침에 강원도 동해안의 사무소로 황망하게 짐을 싸야 했던 어느 국정원 간부의 모습이 떠오른다. 적폐 청산의 도돌이표만 또 하나 찍고 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밀어붙이기식 개혁은 곤란하다. 국정원 출신 한 실세 여당 의원은 “개혁에 저항하면 참혹한 결과를 맞을 것”이라며 “방해 세력은 선배든 후배든 좌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서슬 퍼런 권력이 머리를 쭈뼛하게 만든다.
서훈 원장은 지난 6월 1일 취임사에서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며 국정원 개혁을 향한 결기를 내비쳤다. 꼭 하나 조언을 한다면 부디 진영논리에 따른 적폐청산은 피했으면 한다. 물론 자신이 관여했던 사안을 ‘적폐’로 꼽아 척결 리스트에 올리는 건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보수정부도 손대지 못한 청산작업을 서훈 체제의 국정원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한다면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서 원장이 이제부터 두 눈을 부릅떠야 하는 이유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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