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건강

자폐증 아이 치료

참도 2019. 12. 17. 17:58

한겨레21] 매주 김해~안양 오가는 ‘치료 기러기’ 가족… 발달장애 치료·재활기관 수도권 편중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들을 둔 박민수(가명)씨가 12월9일 한 역에 앉아 있다. 서보미 기자


그날따라 가족의 미니밴은 조용했다. 아빠는 앞만 보고 운전했다.

 엄마는 쉴 새 없이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리고 이따금 전화를 걸어 물었다.

“오늘 집 볼 수 있어요?” 뒷좌석에 앉은 두 아이는 잠깐 칭얼대고 오래 잤다.


가족이 동요를 흥얼거리고 간식을 나눠먹던 나들이와는 달랐다. 말없이 미니밴은 374㎞를 달렸다.

둘둘 말린 소음방지 매트, 아이들 옷을 말리는 빨래 건조대, 장난감이 담긴 큰 상자들도 5시간을 달렸다.

경남 김해를 떠난 미니밴은 경기도 안양의 한 오피스텔 앞에 멈췄다.


공인중개사가 원룸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아빠는 말했다.

 아내도 끄덕였다. 부부는 ‘보증금 500만원, 월세 50만원’짜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자폐 아들 장애 받아들이기


네 식구가 원룸에 들어갔지만 아빠 혼자 나왔다. 일주일 만이었다.

 “아빠, 안녕.” 이제 아빠와 같이 살지 않는다는 걸 아이들이 먼저 느꼈다.

 아이들을 꼭 안아주고 문을 닫았다.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다시 문을 열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빠는 펑펑 울며 다시 374㎞를 달렸다.

2019년 2월, 박민수(36살·가명)씨는 ‘기러기’가 됐다.

주말이면 안양에서 아이들과 “미치도록 놀아주고” 일요일 저녁, 다시 김해의 아파트로 되돌아간다.


가족이 따로 살기 두 달 전, 민수씨 아들 다섯 살 승원(가명)이는 양산부산대학병원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았다.

“자폐 스펙트럼 점수가 35이다. (자폐 증상이) 아주 심한 애하고 아주 가벼운 애가 있다면

(승원이는) 그 중간에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설명을 듣는 내내 아빠는 담담했다.


2018년 여름부터 아빠는 아들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왔다.

 동네 소아과 의사가 다섯 번째 영유아 건강검진(42~48개월) 발달선별검사 결과를 보더니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처음엔 ‘아이가 많이 느리다고 대학병원까지 가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아내가 보여주는 동영상을 보고선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자폐아의 행동에서 승원이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승원이는 “고집이 무척 센” 아이였다.


돌이 지나 걷기 시작하면서는 아빠·엄마가 안고 길을 걸으면 난리가 났다.

 반드시 다시 길을 되돌아가 제 스스로 걸어야 했다.

엘리베이터는 정해진 순서대로 타고 내려야 했으며, 어린이집 차량에선 같은 자리에 앉아야 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특성의 하나인 ‘동일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수차례 반복하는 ‘상동행동’도 나타났다.

그래도 아빠는 “아들이 똑똑하고 집중력이 좋다”고 생각했다.


세 살 때 몇 시간씩 가만히 앉아서 조각 100개짜리 그림퍼즐을 다 맞췄다.

 네 살 때는 글을 읽었다. 그때는 “그저 신기”했지만, 선호하는 행동에 몰두하고

 시각 정보를 유독 잘 기억하는 아들의 특성이 자폐 증상이라는 것을 아빠는 이제 안다.


사실 아빠 마음은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대학병원 진단을 받고 돌아온 날, 아빠는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사고가 날 것”만 같았다.

‘승원이는 계속 커갈 텐데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걱정과 불안에 눈앞이 캄캄했다.


병원에서는 자폐 원인을 모른다고 했지만 ‘내가 잘못 낳아서’ ‘잘못 키워서’

 ‘내가 평소 강박적인 습관이 있어서’라는 죄책감도 짓눌렀다.

 “강한 줄 알았던 멘털(정신)”은 무너져갔다. ‘언제 죽지?’ ‘결국 나는 자살할 거야.’

 불안이 심할 땐 우울증 약도 먹었다.


병원은 주 4.5시간 치료만 제공

아들에게 꼭 맞는 치료 기관을 찾는 일은 더욱 막막했다.

어떤 사설 기관에선 “자폐 완치는 안 되지만 그래도 아이는 성장해간다.

거기에 위안을 삼으라”고 조언했지만 언론 기사를 보면 자폐를 딛고 명문대에 가고,

 유학을 가고, 교수가 되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게는 안 되더라도 “아들이 일반 초등학교에 가고 부모 없이 혼자 살 수 있을 정도”만 되기를 아빠는 바랐다.

다행히 진단받은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 ‘발달장애 행동발달증진센터’가 있었다.

2016년 보건복지부로부터 최초 지정받은 ‘발달장애인 거점병원’이었다.


 병원에서도 만 0~3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진 응용행동분석(ABA)에 대해

“부산·대구·경상도 등 남부를 통틀어 여기밖에 없다”고 자신했다.

그곳에서 승원이는 ABA, 언어치료, 감각통합치료를 받았다.


 일주일에 세 번 가서 치료 세 가지를 30분씩(회당 3만5600원) 받는 식이었다.

다소 늦게 치료를 시작한 승원이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 아빠는 크게 실망했다.

치료받으려는 아이가 많아 시간을 더 늘릴 수도 없었다. 한 달 만에 승원이는 병원 치료를 중단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일하는 아빠를 대신해 엄마가 “밤에 1시간만 자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를 뒤져 치료 시설을 알아보고, 낮에는 그곳들에 전화를 돌리며” 두 달을 보냈다.

어린이집처럼 승원이를 하루에 길게 돌봐줄 곳, 승원이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훈련’하는 게 아니라


 승원이 스스로 욕구를 느끼고 행동하게끔 ‘교육’하는 곳을 찾았다.

그러나 부산·경남의 사설 기관에서 상담을 받아봐도 그런 곳은 없었다.

 유명한 병원이나 사설 기관은 수도권에 몰려 있었다.


비수도권 지역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지적장애 등 발달장애 아동을 키우는 부모들도 민수씨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아동이 치료받을 병원 자체가 적지만, 그나마도 지역 편차가 크다.

승원이가 사는 경남 지역에 있는 소아재활치료기관은 14곳. 대학병원·병원·요양병원·의원을 모두 합친 수다.


 전국 223곳의 6%다.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96곳(43%)은 수도권에 있다.

2017년 보건복지부 의뢰로 가톨릭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조사한 결과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아인 지후(가명)와 엄마가 간식을 먹으며 놀고 있다. 박승화 기자


사설 기관 비용 월 280만원

병원 치료 대신 병원 밖에서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설 기관 역시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발달재활서비스’(만 18살 미만 장애인이 있는 가구 중 전국 가구 평균소득 150% 이하 가구에

월 14만~22만원 바우처 지급) 제공 기관으로 지정받은 기관은 김해에 32곳,


 경남으로 넓혀도 153곳에 그친다. 전체 2248곳의 44%가 수도권에 있다.

실제 지역 불균형은 이보다 더 심할 수도 있다.

 인력과 시설 기준을 갖추고 발달재활서비스 제공 기관으로 지정받는 사설 기관은 일부다.


 일단 사설 기관은 학원처럼 사업자등록만 하면 운영할 수 있는 터라,

현재 전국적으로 어떤 기관이 어떤 지역에 있는지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엄마는 아이 둘을 데리고 떠났다.


 부부가 승원이를 위해 선택한 사설 기관은 안양에 있었다.

그곳에서 승원이는 매주 4일 6시간씩 비슷한 증상이 있는 또래 아이 두세 명과 함께

 놀이·음악·미술·작업·행동·운동·언어 수업을 받는다.


아빠는 “잘한 선택”이라고 믿는다.

 “눈 오면 썰매 타고 같이 불 피워 군고구마도 먹더라고요.

 강아지·돼지·말·닭 냄새도 맡고 만져도 보고요.


놀이기구 타기, 승마도 하고요.

” 9개월 만에 승원의 문제 행동은 줄고 언어·인지·신체 기능은 좋아졌다.

상동행동을 거의 하지 않고, 아빠와 대화도 곧잘 한다.


 이젠 선생님들이 “(사설 기관을) 졸업할 수 있는 일순위”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들이 커갈수록 아빠의 짐은 무거워진다.

사설 기관에 들어가는 비용은 한 달 280만원.

그래도 처음보단 40만원 줄었다.


안양의 원룸 월세 50만원, 두 집 생활비 200만원이 더해진다.

교통비로 한 달 50만원이 들어갈 때도 있다.

자영업을 하며 외벌이로 한 달 300만원 남짓 버는 아빠에겐 버거운 액수다.


지난 8월, 원래 있던 2천만원의 아파트 주택담보대출에 3천만원의 대출을 더 냈다.

그나마 아버지로부터 한 달 100만원씩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버틴다.

정부나 민간보험에서 받는 지원은 전혀 없다.


막대한 치료비·재활비는 발달장애 아동을 둔 모든 가족의 부담이지만,

가족과 헤어져 살며 이중의 주거비·생활비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치료 기러기’ 아빠가 느끼는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빠는 미안하기만 하다. “사교육 시장하고 진짜 비슷해요.

 엄마의 정보력, 할어버지의 재력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한 달 300만원을 쓰지만 승원이 친구들은 500만~600만원씩 써요.


 주말에 다른 치료센터에 가고, (자폐에 좋다는) 한의원도 가고 마사지숍도 가죠.”

정부도 권역별 공공어린이재활병원을 추진하고 있다.

 2022년까지 충남·경남·전남권 3곳에 공공어린이재활병원을 지어 비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발달장애 아동 에게 안정적으로 치료 지원을 하겠다는 취지다.

경남권의 경우 12월 두 차례 사업자 공모 끝에 경상남도가 응모했으나 갈 길이 멀다.

충남권에서도 지난해 대전시가 사업계획서 심사를 거쳐 사업자로 선정됐지만 이후 병상 규모와 건립비 조달을 두고 진통이 컸다.


결국 총 447억원 중 국비 지원은 78억원에 그쳐 사업 지연이 예상된다.

전남권은 두 차례 사업자 공모에도 아직 응모한 지자체가 없다.

다만 국비 36억원이 들어가는 외래 중심 공공어린이재활센터를 2022년까지 6곳 짓겠다는 약속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혜연 전국장애영유아학부모회 대표는 “지방에서 올라온 장애 영유아 가족이

병원 주변 원룸에서 난민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며

“우선 공공어린이재활병원 설립이 가속화해야 하지,


병원이 소도시까지 설립되기는 어려우니 보건소 옆에 재활의료원을 설치해

전국에서 세밀한 의료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보건소 옆 재활의료원 설치를


아직도, 아빠는 운다. 손도 덜덜 떨린다.

“애들을 못 보는 것도 불안하고, 애들과 엄마만 원룸에 있는 것도 불안하고,

 아이가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지도 불안해요.” 아빠의 불안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다.


 “내년 봄엔 승원이가 오후에는 지금의 사설 기관을 다녀도 오전에는 일반어린이집을 다니도록 할 생각이에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익숙해지면 가을에는 (아내와 두 아이를) 김해로 데려오려고요.” 가족은 언제쯤 함께 살 수 있을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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