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조사보고서는 사고 장소를 ‘수색로’ 아닌 ‘수색로 부근’으로 적시
동료를 구하려다 지뢰를 밟았다는 일화의 주인공 이종명 의원(육사 39기·60)이 ‘영웅조작설’ 논란에 휩싸였다.
자유한국당 이종명 의원이 2000년 6월 27일 전방수색부대 대대장 당시 M3로 추정되는 대인지뢰를 밟은 후임 대대장을
구하려다가 자신도 지뢰를 밟는 사고를 당했을 때 육군 발표가 의문 투성이라는 것이다.
사고 이후 상이군인으로는 첫 대령 진급자가 된 이종명 대대장은 2002년 제1회 ‘올해의 육사인상’을 받았다.
2015년에는 육군참모총장이 주관한 성대한 전역식을 끝으로 군복을 벗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이어 2016년 초에는 당시 새누리당 비례대표 2번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보국훈장 삼일장도 수상했고, 군은 그의 영웅담을 군가로 만든데 이어 뮤지컬 ‘마인’까지 제작했다.
육군 1사단 주둔지인 경기 파주시에는 이 중령의 희생정신을 기리겠다는 ‘살신성인탑’도 세웠다.
그러나 사고 초기부터 군 내부에서는 ‘이종명 중령은 영웅이 아니라 징계대상’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핵심은 이종명 대대장이 후임 대대장 등을 데리고 수색로를 이탈해 지뢰밭으로 들어가 규정을 어기면서 위험을 자초했느냐 여부다.
■①사고자→관계자
2000년 6월 27일 오전 9시쯤, 판문점 동쪽으로 5㎞ 지점 비무장지대. 육군 1사단 수색대대원 20명이 최전방지역 정찰에 나섰다
이날 정찰엔 수색대대장 이종명 중령과 후임 대대장 설모 중령도 참가했다
군사분계선 근처에 다다른 오전 10시 40분쯤, 폭음과 함께 앞서 가던 설 중령이 1950년대 매설된 대인지뢰를 밟고 쓰러졌다
이종명 중령은 병사들의 접근을 막은 뒤, 지형을 잘 아는 자신이 구조하겠다며 쓰러진 설 중령에게 혼자 다가갔으나
잠시 뒤에 이 중령 역시 지뢰를 밟고 쓰러졌다
이 중령은 두 다리를 잃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위험하니 오지 말라’며 자신에게 접근하려던 병사들을 제지했다
그런 뒤, 철모와 소총을 끌어안은 채 혼자 힘으로 기어서 사고현장을 빠져나왔다는 게 군의 설명이었다.
당시 국방부 합동조사단이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에게 28일 보고한 중간 사건보고서에는 이 중령과 설 중령 등 전·후임 대대장 2명은 ‘사고자’로, 중대장 박모 대위는 ‘피해자’로 분류됐다. 1사단 헌병대 보고서 역시 6월 28일부터 7월 31일까지 일관되게 전·후임 대대장 2명을 ‘사고자’로 규정했다. 이 중령과 설 중령이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들이란 의미다.
그러나 당시 언론에서 이 중령을 ‘살신성인’의 표상으로 보도한 이후부터 육군참모총장과 육군 헌병감에게 올라간 ‘중요 사건 보고’에는 이 중령과 설 중령, 그리고 박 대위 3명을 모두 ‘관계자’로 기재됐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사고자는 ‘사고를 낸 사람’, 관계자는 ‘어떤 사건과 현상 따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육군 헌병은 왜 보고서를 2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는지는 재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②수색로 VS 미개척지
이 중령 일행이 수색로를 벗어난 정황은 논란의 핵심 의문이다.
국방부 합동조사단이 사고 다음날인 28일 국방장관에게 보고한 문건에는 사고 장소를 ‘미개척된 3m 지점’으로 특정하고 있다. 사고장소는 ‘99. 3. 23 수색대대에서 새로 개척한 GP 작전도로 MDL(군사분계선) 끝부분에서 미개척된 약 3m 지점임’이라고 기술했다.
사고 당일 헌병감실이 작성해 육군참모총장 등 육군본부 고위간부들에게 배부한 보고서에도 지뢰 사고 장소를 ’MDL, 작전로 부근 앞“이라고 돼 있다. 작전로가 아닌 곳에서 지뢰를 밟았음을 시사한 것이다.
1사단 상급부대인 1군단이 사고 다음날 실시한 현장 조사 결과를 담은 5부(정보·인사·군수·감찰·헌병) 합동보고서에는 사고 현장에 대해 “수풀이 많아 식별 곤란(5m 후방에서 관찰)”으로 기술했다. 정확한 폭발 지점을 찾지 못했고 사고 현장에 제대로 접근도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사고가 수색로를 이탈한 지점에서 발생했다는 의미다. 5부 합동보고서가 사고원인을 ‘수색로 부근에서 M3 대인지뢰(추정)를 밟아 발생’으로 분명하게 적은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즉, 이 보고서는 사고 장소를 ‘수색로’가 아닌 ‘수색로 부근’으로 분명히 적시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최근 MBC 방송 인터뷰에서 ”(사고장소가) 수색로상이었고, 개척된 그 수색로를 5~6번 이상 정찰했던 장소“라고 반박했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박모 대령도 경향신문의 서면 질의에 ”(사고장소가) 개척된 수색로였다“고 답변했다.
만약 이 의원과 박 대령의 주장대로 사고현장이 개척된 수색로였다면 1군단 5부 합동조사단이 ”식별이 곤란해 5m 후방에서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성립하기 힘들다. 게다가 또 다른 군 보고서에는 지뢰 폭발 지점과 안전지대까지 거리를 20m 정도로 표기했다.
미개척지에 들어가서 지뢰를 밟아 사고가 일어났다면 당사자들은 징계 대상이라는 게 군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당시 사고는 수색대대장 전후임이 지뢰를 밟아서 둘 다 발목이 잘리고, 중대장까지 다쳐 최전방 대대 지휘부가 붕괴된 사건이었다. 이때문에 설사 정상적인 수색로라고 해도 이동중 지뢰가 두 번이나 터졌으면 제대로 지뢰를 제거하지 못해서 수색로를 제대로 개척하지 못한 책임을 지휘관에게 물어야 하는 게 상식이라는 것이다. 또 수색로를 이탈해서 사고가 난 것이라면, 지휘관이 규정 위반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소재를 명확히 가리기 위한 정밀 조사가 이뤄졌다면 훈장 대신 징계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또 연대장과 사단장까지 줄줄이 책임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대장(이 중령), 중대장(박 대위) 진술도 엇갈려···두사람 모두 ‘5부 합동조사보고서’ 내용은 부인
·이종명 의원 “안전지대 복귀중 사고” VS 군 조사보고서 “MDL 접근중 사고”
■③관측중 VS 복귀중
사고가 발생한 시기도 논란거리다. 육군 헌병과 5부 합동 조사단의 보고서는 일관되게 이 중령과 설 중령, 박 대위 등이 군사분계선 가까이 이동하다 사고가 발생했다고 적시했다. 그러면서 군사분계선 가까이 대대장 2명과 중대장 등 세 명만 따로 이동한 건 전방을 더 자세히 관측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사단 헌병 보고서에 따르면 중대장 박 대위는 “정보장교가 (1000㎜ 니콘카메라로) 사진촬영한 곳에서 지형을 관찰하던 이 중령과 설 중령이 공간이 협소해 군사분계선 방향 우측 수색로 약 15m 지점으로 이동했다”며 “이 중령이 좌우측 지형설명을 해주자 설 중령이 우측 지형을 상세히 보기 위해 약 5m 가량 맨 앞에서 접근하다 사고가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방송 인터뷰에서 사고 장소 등을 포함해 군의 공식 조사보고서에 담긴 사실관계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MDL 선상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나오면서 일어난 사고”라고 말했다. 즉 정찰 임무를 마치고 안전지대로 복귀하던 중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내가 제일 앞에 가고 그 다음에 중대장이 가고 설 중령이 맨 뒤에 따라갔고. 돌아나오는 게 설 중령이 맨 앞에 나오고 내가 맨 뒤에 나왔다”면서 “그 역순으로 나오는데 (맨 앞장 섰던) 설 중령이 지뢰를 밟았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중령이 자신의 앞에서 다리를 잃고 피를 흘리는 설 중령을 지나쳐 위험지역을 혼자 빠져나온 후 다시 설 중령을 구하러 들어갔다 지뢰를 밟은 것으로 된다. 설 중령이 지뢰를 밟은 직후, 이종명 중령이 후방의 소대원들에게 급히 돌아와 ‘위험하니 내가 가서 구출하겠다’고 말한 후 사고 현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당시 조사보고서는 돼 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적진을 관측하려다 사고가 일어났다고 진술했던 박 대위는 경향신문 질의에 “이 중령이 (군사분계선쪽으로) 진출할 때도, (안전지대로) 복귀할 때도 제일 선두에 있었다”고 답변했다. 이는 본인이 1사단 헌병 및 1군단 합동조사에서 진술했던 내용과도 상이한데다 ‘복귀할 때는 설 중령이 앞쪽에 있었다’고 한 이 의원의 발언과도 배치된다.
·후임 대대장인 설 중령을 구한 사람은 소대장···대검으로 땅을 찌르며 들어가 구조
·“국방부가 재조사해야” 여론···이종명 의원 스스로 재조사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④모순되는 정황들
1사단 헌병 보고서와 1군단 5부 합동보고서를 보면 사고 당시 이 중령은 “6월 27일 오전 10시 42분경 000GP 추진철책 작전로상을 약 5m 앞서가던 설 중령이 갑자기 ‘꽝’ 소리와 함께 구조하려 했으나 2차 폭발이 예상돼 정보장교에게 병력 접근 통제를 위해 ‘내가 지형을 아니까 너희들을 기다려라’라고 한 후 사고장소로 들어가다 지뢰가 폭발해 다리를 다쳐 혼자 기어서 나왔다”고 진술했다.
이같은 이 중령의 진술과 정보장교의 진술 등을 종합하면, 당시 맨 앞에는 설 중령과 중대장이 앞서가고, 5m 뒤에 이 중령, 이 중령의 5m 뒷편에 정보장교가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대장이 지휘하는 2개 수색조는 사고장소에서 약 30m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이 의원은 사고 이후 여러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1차 지뢰 폭발 당시 자신과 설 중령, 박 대위 등 3사람이 2m 범위 안에 있었고, 자신도 다리에 가벼운 파편상을 입었다고 했다. 이는 설 중령이 이 중령의 5m 전방에 있었다는 군 조사보고서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 박 대위도 이 의원의 주장이 맞다고 했다.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군 조사보고서가 틀렸다는 얘기다.
지뢰사고가 발생한 장소는 다른 지뢰 위험 때문에 무리하게 들어가선 안 됨에도 불구하고 결국 2차 사고로 이어진 것도 논란거리다. 이 중령이 후임 대대장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2차 사고를 일으켰고, 결국 설 중령을 구조한 사람은 사고지점 40m 뒤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소대장이었다. 소대장이 (지뢰 탐지를 위해) 대검으로 찌르면서 들어가서 설 중령을 끌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논란이 계속되자 육군은 지난 20일 국방부 정례 브리핑에서 “관련된 확인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며 “충분히 시간을 갖고 당시 수사기록 등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군내에서는 당시 부실한 조사로 논란을 자초한 육군이 재조사를 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국방부 감사관실과 전비태세검열실 등에서 정밀 재조사를 실시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육군본부의 ㄱ 대령은 ”이종명 의원 본인 주장이 사실이라면 스스로의 명예와 육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재조사를 먼저 요청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박성진 안보전문기자 longriv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