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부터 1박 2일간 남북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연대 및 상봉대회에 참석한 박도 시민기자가 생생한 참가기를 보내왔습니다. 남과 북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민화협 상봉대회는 어떤 일정으로 진행됐는지 전해드립니다. [편집자말] |
▲ 김홍걸 민화협 공동상임의장이 3일 남북 민화협 연대 및 상봉모임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 |
ⓒ 박도 |
[첫째날] 그 아버지에 그 아들
2018년 11월 3일 오후 3시. 금강산호텔 2층 연회장에서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리행)을 위한 남북(북남)
민화협 연대(련대)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을 위해 남측에서 260여 명의 민화협 관계자와 국회의원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에 갔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길이 막힌 지 10년 4개월 만이다.
또한 북측에서도 민화협 관계자를 비롯해 수백 명의 인사들이 평양 등 각지에서 달려왔다.
모임 시작 전부터 대회장에는 노래 <반갑습니다>가 울려 퍼졌다.
먼저 북측 민화협 김영대 회장의 연설이 있었다.
이어 남측 민화협 김홍걸 대표상임의장의 연설이 시작됐다.
"남과 북은 결코 따로 헤어져서 살 수 없는 한 핏줄이며 한 형제입니다."
김홍걸 상임의장이 이 말을 하는 순간, 대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거센 소나기 박수를 보냈다.
나는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눌렀다. 카메라 앵글 속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1969년 7월 19일. 나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3선 개헌 반대 규탄대회에서 당시 신민당 김대중 의원의 연설을 들었던 게 불쑥 떠올랐다.
"이 사람은 온갖 정성과, 온갖 결심으로써 박정희 씨에게 충고하고 호소합니다.
박정희 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천의(조그마한)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 할 자격이 있으면,
당신에게 4.19와 6.25 때 죽은 영령들 주검의 값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은 하지 마십시오."
그때 효창운동장을 가득 메운 10만 청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그때도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꼭 50년 만에 느끼는 울림이었다.
▲ 지난 3일 열린 남북 민화협 상봉 및 연대모임. | |
ⓒ 박도 |
어떤 인연
지난 10월 중순, 내 손전화가 울렸다. 받고 보니까 김홍걸 대표상임의장이었다.
"선생님, 11월 3, 4일 시간 좀 내주십시오."
"무슨 일인가?"
"금강산에서 '남북민화협 연대모임'이 있는데 모시고자 합니다."
"내가 가도 될 자리인가?"
"선생님은 작가요, 시민기자이기에 자격이 충분합니다."
"알았네."
그는 늘 말이 없었다. 어쩌다 용건이 있어도 문자로 10자 이내의 단문이 일쑤였다.
그래도 요 근래에는 말수가 조금 늘었다. 1979년 3월에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그때 이대부고 신입생이었고, 나는 그를 가르치는 국어교사였다. 그는 1-2반이었고,
나는 1-3반 담임을 맡았다. 하지만 나는 단위 수가 많은 국어교사였기에 그를 교실에서 자주 만났다.
그 이듬해 그는 2-1반이었고, 나는 2-2반 담임을 맡았다. 학년 초 그의 담임이 내게 상의했다. '
당신 반에는 당시 재야 정치인 김대중씨 아들과 이름만 김대중인 학생이 있는데, 한 반에 두기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내 반의 한 학생과 개학 전에 바꾸자고 해 그렇게 했다.
그해 그의 아버지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엮이어 신군부로부터 체포 구금되다가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됐다.
교실에 들어가면 그는 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눈길이 마주쳤는데, 그때 나는 그와 눈빛으로 대화했다.
김홍걸 의장의 금강산 초청 전화를 끊고 난 뒤 한동안 나는 무척 망설였다. 아내는 늘 내게 충고했다.
나이가 들수록 낄 자리 끼지 않을 자리를 가리라고. 게다가 출판사로부터 내년에 나올 신간 원고 독촉을 받고 있었다.
더욱이 감기 몸살 기운이 가을과 함께 찾아와 동거하고 있었다. 몇 차례 불참을 통보하려다
'얼마나 고심한 뒤 초대했겠나'라는 생각에 동행하기로 뜻을 굳혔다.
▲ 지난 3일 남북 민화협 상봉 및 연대모임 대회장을 가득 메운 관계자들. | |
ⓒ 박도 |
▲ 지난 3일 남북 민화협 상봉 및 연대모임에서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한 북측 통일음악단. | |
ⓒ 박도 |
11월 3일이 밝았다. 오전 5시 40분 경복궁 동문주차장에서 만나기로 돼 있었다.
차질없이 참석하기 위해 전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동생 집에서 잤다.
그 전에 '통일원 방북 사이버 교육'도 충실히 이수했다.
전날 잠들기 전에 만일을 대비해 알람을 맞춰놨지만 새벽 3시 50분에 잠에서 깼다.
마냥 늑장을 부리며 세수와 행장을 마쳤다. 오전 4시 40분에 콜택시를 부르자 5분도 안 돼 도착했다.
오전 5시 10분.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금강산으로 가는 전세버스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민화협 직원들이 출석을 확인한 뒤 승차시켰다. 앞에서 두 번째 자리였다.
곧 김홍걸 의장이 도착해 많은 동행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 도착 인사를 건넸다.
버스에 오르는데 갑자기 '이것이 인생이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1980년 여름방학 끄트머리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 학생 김홍걸의 출석을 체크했는데,
세월이 지나 이젠 그가 내 출석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출발시각이 되자 김홍걸 의장이 내가 탄 버스에 올라 내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 금강산 만물상 기암괴석들(2007년 촬영분). | |
ⓒ 박상현 |
10년 만에 다시 잡은 마이크
버스가 출발하자 안내를 맡은 현대아산 직원이 상기된 얼굴로 마이크를 잡고 소감을 밝혔다.
"꼭 10년 만에 여러 선생님들을 모시고 갑니다.
저는 현대아산 직원 김민수입니다. 여러 해 동안 금강산행 안내원을 한 바 있습니다."
차창 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했다. 이로 미뤄 보아 날씨는 쾌청할 듯했다.
오전 8시 40분께, 양양에 이르자 그곳서부터는 동해를 끼고 북쪽으로 달렸다.
그새 안개는 걷혔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쾌청한 하늘이 펼쳐졌다.
나는 김홍걸 의장에게 황순원의 단편소설 <학>에 나오는 '타작하기 좋은 날'이라는 구절을 상기시켰다.
오른쪽으로 동해가 비단처럼 끝없이 출렁였다. 내가 감탄을 연발하자 건너편에 있던 김 의장이 물었다.
"몇 년 만에 다시 가십니까?"
"2006년 10월에 다녀왔으니까 꼭 12년만일세. 막힌 것은 뚫어야 하고,
끊긴 것은 이어야 하네. 자네가 이 일에 앞장서 주게나."
그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그와 나의 차내 정담이 시작됐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았던 김정호 보좌관이 슬그머니 뒷자리로 피해줬다.
"정치는 최고의 예술이라네." "평화(平和)라는 한자를 파자해 보면 입(口)에 쌀(禾)을 골고루(平) 나누어 먹은 것일세.
" 이런 정담을 나누는 사이 버스는 동해남북출입사무소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지나고 있었다.
안내원은 다소 흥분해 군사분계선 마지막 팻말이 걸려 있었던 말뚝을 설명했다.
"1292번째 말뚝으로 이제 표지는 오랜 세월로 낡아 사라져 버리고 시멘트 말뚝만 서 있습니다."
내가 미국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사진에는 그때의 표지판이 있었다.
곧이어 금강산 1만2000봉의 마지막 봉우리 구선봉이 반겨 맞았고,
바로 아래 감호에는 백조들이 분단의 비극은 모른채 유유히 노닐고 있었다.
이날 오후 3시에 시작된 '남북(북남)민화협 연대(련대)모임'은 1시간 남짓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대회장 벽에는 "하나 되는 남과 북, 평화와 번영의 통일조국을 세우자"
"삼천리강토 우에(위에) 자주적이고 번영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자(기운차게 썩 일어나게 하자)"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 금강산 만물상(2007년 촬영분). | |
ⓒ 박상현 |
사제동행 금강산 려행
식순에 따라 김영대, 김홍걸, 김영숙(북측 여맹부위원장), 김주영(남측 한국노총 대표) 등 남북 관계 지도자들이
번갈아 연설을 할 때마다 열렬한 박수가 이어졌다.
이 날 가장 많이 쏟아진 말들은 "6.15시대" "민족적 화해" "조선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누가 뭐래도 위풍당당하게 전진해 나갑시다"
"민족의 존엄과 위상을 세계만방에 떨치자" "주인의 입장" "우리민족끼리" 등이었다.
이날 채택된 남북 민화협 공동합의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남북 민화협 사회문화교류 공동위원회구성
2.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남북 공동위원회 구성
3. 남북 민화협 상시, 연례행사 공동사업 합의 등
행사에 이어 북측 통일음악단의 축하공연이 진행됐다.
새벽부터 달려온 남측 참가자들의 마음을 환하게 다독여줬다. 여독이 한방에 가셨다.
축하공연 뒤 1층 로비 의자에 앉자 두 북측 인사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6.15편집사의 정혁진 부사장과 리종 부원이었다.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기에 카메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습니까?"
"나도 기자입니다."
"네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입니다."
▲ 외금강 계곡(2007년 촬영분). | |
ⓒ 박상현 |
나는 그들이 기자라기에 재미동포 기자 '진천규'를 아느냐고 묻자 깜짝 놀랐다.
"선생께서 어드러케 잘 아십니까?"
"제가 진 기자를 오산중학교 1학년 때 가르쳤지요."
"아, 네. 교원이셨구먼요. 우리 공화국 여기저기를 취재한 뒤 남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강연을 하고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자인지라 진 기자의 활동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내친김에 남측 민화협 김홍걸 상임의장도 고교시절 가르친 바 있다고 하자 그들은 더욱 놀랐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금강산 려행이십니다."
"인생을 좀 더 산 사람으로 두 기자 선생에게 부탁드립니다. 하나의 신념으로 한 길로 죽 사십시오."
"저희에게 등댓불과 같은 말씀입니다."
(* 다음 기사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금강산 안내원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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