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풍수 강의

풍수 장용득

참도 2018. 2. 7. 16:22

하남 장용득 선생의 풍수입문과 활동


|풍수칼럼 

        

지종학 | | 조회 181 |추천 1 | 2015.10.10. 21:41
         

            


1. 풍수입문


경북안동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하남선생은 17살 때 그의 부친이 37세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된다.


(하남선생의 부친묘소 비문에 의하면 1938년 10월 22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남선생 13세가 된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부친 사망 이후 갑자기 집에 불이 나 전소하고, 6명의 가족이 연이어서 죽으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게 된다. 계속되는 우환에 그의 모친께서는 집에 있으면 변을 당할 것 같으니,

 하남선생에게 집을 피해 나가 있으라고 말을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래도 자네 선친 묘를 잘못 써서 그런 것 같으니, 용한 지관에게 조언을 받아 보게나.”

하고 권유하였다.


당시 신학문을 접한 하남선생은 동네사람들의 말을 쉽게 신뢰할 수 없었다.

“어떻게 죽은 조상이 살아있는 후손의 길흉을 좌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집안의 거듭되는 우환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반신반의 하다가

결국 당시 안동에서 활동하던 지관을 청해 부친의 묘를 감정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지관은 부친의 묘가 아주 좋은 곳이니 아무 걱정 말라고 한다.


자신의 가족이 6명이 죽고 집안이 크게 몰락했는데도 묘소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지관을 신뢰할 수 없어 이번에는 다른 지관을 모셔와 감정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우 좋지 못한 자리이니까 빨리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에 나이 어린 하남선생은 “그러면 어째서 무엇이 나쁜지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묻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얼버무릴 뿐이다.


그리고도 몇 분의 지관을 모셔와 부친 묘소에 대해 감정을 받지만, 좋다고 말하는 사람과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양분되는 상태였다.

 좋고 나쁨에 대한 설명 또한 하나같이 뚜렷한 기준과 원칙이 없었다.

 더군다나 자식의 효심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는 듯한 지관들의 행태에 실망을 느낀 하남선생은

 자신이 직접 풍수를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즉 집안의 거듭되는 우환에 대한 의문과

부친 묘소에 대한 의구심이 더해져 풍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후 하남선생은 풍수서적을 탐독하면서 기본적 지식을 익히고, 인근 마을을 다니며 묘를

쓰는 것을 직접 보면서 감각을 익히게 된다. 좀 더 외연을 넓혀서는 전국각지를 다니며

 흥한 가문과 패한 가문의 선대 묘를 둘러보며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지를 추적하게 된다.


그러기를 10여 년 하남선생은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정립하기에 이르고,

결국 자신의 부친 묘를 이장하면서 집안도 안정을 찾게 된다.

(초장지는 알 수 없으나 1970년 무렵은 망우리에 묘가 있었고,

1980년에는 남양주 와부읍 울석리로 옮겼으며, 다시 고향 인근으로 옮겨간다.)


그 당시 전국의 많은 풍수인들과 교류하면서 인맥을 넓히게 되는데,

하남선생의 독특한 풍수이론에 매력을 느낀 지인에 의해 1970년대 초 서울로 상경하여

자택인 전농동에서 본격적인 풍수를 강의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김종철, 박시익, 심재열 등이 그의 제자로 입문하게 된다.(강의는 일주일에 3회 했으며,

 답산은 月 2회 다녔다. 약 4개월이 한 코스였으나, 대부분 몇 년씩 수강하였다.)


하남선생은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고 싶고 남보다 잘 살고도 싶다. 더구나 아들·딸들이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주었으면 오죽 좋을까. 불안한 대신에 욕심은 그만큼 많아지고 강렬해지기 마련이다.

신앙은 그래서 존재하게 된다. 사람은 늘 약하다.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 있다면 의지하고 싶어진다.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다 神을 발견한다. 만일 내가 갑자기 죽는다 해도

인간은 오늘밤까지 행복하여지기를 저울질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것을 우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부른다.
·····
정보를 얻기 위하여 古人들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占卜이라는 것이 있었다. 擇地法이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앞날을 미리 알아보려는 노력에서 啓導된 학문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줄기차게 탐구되어온 학문이라면 거기엔 어떠한 合理的 이유와

 價値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겠다.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그 학문의 탐구를 시작했다. 탐구의 길을 地理學으로 택하게 되었다.”


 


2. 하남의 풍수 활동


1) 이병철 회장과의 인연


하남선생이 풍수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67년 삼성 이병철 회장의 모친 묘소를 경남 의령에서

수원 이목동으로 이장을 해주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라 할 수 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에 연루되어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사건이 크게 사회 문제가 되자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해야만 했다.


그러자 이병철 회장은 그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풍수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듬해인 1967년 하남선생의 권유로 고향에 있던 모친 묘소를 현재의 수원 이목동으로 옮기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하남선생은 삼성그룹의 풍수 고문 역할을 하면서 신라호텔, 에버랜드 등의

 입지를 정해주게 된다.



 


한편 이병철 회장에게는 증조모가 두 분이다. 한 분은 진양강씨이고, 다른 한 분은 광산김씨이다.

 현재 풍수계에 널리 알려진 의령 유곡면 산에는 증조부와 증조모 광산김씨 묘가 있다.


그리고 진양강씨 묘는 남양주시 별내동(별내동 산208-1)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비문에는 그의 가족사항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1977년 이곳으로 이장한 것으로 적혀있다.

이곳 또한 하남선생께서 점혈해 준 곳이다.


필자의 지나친 가설일지 모르지만,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남선생의 작은 날개 짓에서 시작된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진양강씨 묘소>


2) 박시익의 명당실험과 이후락 선영


이렇듯 차츰 풍수계에서 명성을 쌓아가자 정재계의 거물들이 하남선생에게 줄을 대어

자문을 받기에 이른다. 이때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과도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모친 묘를

 남양주 진건면의 야산에 이장을 해 주기도 하였다.

여기서 잠깐 그 터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 보겠다.


하남선생의 제자로 풍수에 입문한 박시익은 파격적인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죽은 사람이 명당에 들어가서 그 후손이 발복을 받는다면,

산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도 좋은 영향을 받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1979년 하남선생으로부터 남양주시 진건면의 한 야산을 사기에 이른다.

 당시에 집을 팔아서 1,000평의 임야를 샀으니 일반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결정이었다.


그 후 그 터에 1.5m 깊이의 토굴을 파서 낮에는 건축사무소로 출근을 하고 밤에는 토굴로 들어가

잠을 자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해야 명당의 실험이 가능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침이면 넥타이를 매고 산에서 내려오고, 밤이면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는 생활이

한 달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마을 주민이 경찰서에 간첩신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땅 속 토굴에서 잠을 자던 박시익은 커다란 확성기소리에 놀라 일어나게 된다.

“너는 포위되었으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놀란 박시익이 토굴에서 나오자 수많은 군경이 에워싸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즉시 간첩으로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기에 이른다.

경찰서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그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자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권상하 비서관에게 연락을 취하여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권상하 비서관은 당시 박시익과 함께 하남선생으로부터 풍수를 공부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그 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 땅을 사겠다고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을 받고 땅을 팔고 그 터의 위쪽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모친 묘소를 이장하게 된다. 그 작업을 하남선생께서 하였다.

이 사례는 풍수계에 전설처럼 회자되는 말이지만, 박시익교수의 풍수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일 뿐 아니라 후학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자세와 노력이라 할 수 있다.



     
3) 박정희 대통령 누이 박재희 여사 묘소


위 장소와 바로 이웃한 곳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누이인 박재희 여사와 그의 남편 한정봉의

 묘가 상하로 있다. 이곳 또한 하남선생의 유작으로 당시 고위층과 많은 교분이 있던 하남선생의

활발한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 산13)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하남선생께서는 명혈은 매우 드물고 귀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검증이 어려운 生地보다는 黃骨이 나온 파구 터를 선호하였다.

황골은 아무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땅은 명당으로서 더욱 가치가

 있다는 나름대로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는 정암 김종철 선생으로 전해지면서 그의 후학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병철회장 증조모 진양강씨 묘와 박재희 여사의 묘소도 파구 터를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4) 청와대 이전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총독부 관저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으나

곧이어 6.25라는 동족상잔의 참극을 맞게 되며, 자신도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는 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 대통령까지 모두가 순탄치 못했다.


이러한 청와대에 대해 풍수적으로 불길하다고 여겨 개조를 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최초였다.

1980년 12월 이전까지 청와대는 서향이었으나, 서향의 현관은 기가 빠져나가 좋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청와대의 현관을 남향으로 변경한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백담사로 가게 되자, 이를 지켜본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의 불길함은 현관을 바꾸는

소프트웨어적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아 아예 터를 옮기게 된다.


이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은 구청와대가 손님을 맞기 협소하다는 표면적 이유로 약 200m 서쪽으로

 이동한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청와대를 건립하게 된다. 1989년 노태우대통령 재임 시 24명의

각계 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청와대를 이전하기로 한다.

공사 총책임은 임재길 총무수석 비서관이 맡았고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자문위원장을 맡았으며,

 건축·설비·조경·방송·미술 등 5개 분야에서 주로 대학교수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이 프로젝트에 하남선생께서 전문풍수인의 자격으로 참여하고, 제자인 심재열 現요산지리학회 회장이 동행하였다. 당시 하남선생은 청와대 건물을 지붕이 둥근 돔 형태로 지을 것을 권유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선영


김재규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재임할 때 그의 선친이 작고하자 하남선생에게 구미에 있는 선영을

 점검해줄 것을 의뢰하였다. 김장관은 이미 다른 풍수로부터 그곳이 “군왕이 나는 자리”라는 것을

 들은바 있어 재차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장관의 동생과 동행하여 구미 선영을 내려가게 된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광중을 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남선생이 보기에 묘를 조성하는 곳이

 매우 좋지 못했다. 그래서 김장관의 동생에게

“이 터는 자손이 3∼4년 내에 역적으로 몰려 以金致死하고 큰 화를 당할 수 있는

 매우 불리한 곳입니다. 제가 서울 근교에 좋은 곳을 찾아드릴 터이니 이곳은 쓰지 마십시오”

하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장관의 동생은 깜짝 놀라 서울의 장례식장에 있는 김재규 장관에게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김장관은 동생에게 말하기를 이미 대통령에게 장례일정에 대해 보고가 되어서 일정을

바꿀 수 없으니 그대로 작업을 진행을 하라고 지시한다. 당시 김재규 장관은

 “군왕이 나는 자리”라고 말한 某 풍수인의 말을 더욱 신뢰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하남선생은 혼자서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때가 1975년 무렵이다.

그러나 하남선생의 말과는 달리 김재규 장관은 1년 후인 1976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권력의 중앙정보부장으로 영전하게 된다.


하남선생은 그때 심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후일 제자 박시익에게 토로하는데,

“내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선영에 대해 심한 말을 했는데,

그 양반이 내게 얼마나 악감정이 있겠어! 나를 잡으러 오는 건 아닌지 정말 두려웠다네”
하지만 중앙정보부장으로 영전한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자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마는데, 하남선생의 예측이 정확하게 맞은 셈이다.


한편 10.26 사건의 배후와 동기를 수사하던 보안사는 하남선생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당신이 김재규 부친 묘소를 군왕이 나는 곳이라고 부추겨서 김재규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냐?”

고 심문하였으나 전후사정을 해명함으로서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이상 하남선생께서 주관한 몇몇 작업과 에피소드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당시 정재계의 실력자들이 하남선생의 자택에 줄을 이었다고 한다.


6) 하남선생 묘소
하남선생 묘소는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산216-1)에 있었다.

당시 그곳에는 하남선생의 부모님 묘소가 있던 곳이지만, 어느 시점 부모님 묘를 고향으로 이장을 하고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 후 하남선생께서 1995년 작고하게 되자 그 터에 하남선생의 유택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비석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어 상당기간 동안 하남선생의 묘소는 그의 부친 이름으로 남아

있어 많은 의문을 자아내게 하였다.  

 


전언에 의하면 하남선생께서 운명할 때 그의 장남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 묘를 율석리에 만들어라. 그러나 어느 시기가 오면 다시 고향으로 이장을 해라.”

 그리고 18년이 지난 2013년 하남선생의 장남과 박시익교수에 의해 하남선생의 유해는

영양 일월산 아래로 이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새롭게 이장한 곳은 가족들의 비공개로 현재는 알 수 없다. 한편 이곳도 파구 터로서 황골이 나온 곳이었다고 한다. 하남선생의 부모님 묘는 당시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1980년 무렵 이곳으로 이장을 한 것이다. 하남선생의 파구 터에 대한 믿음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이곳의 장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기로 한다.


7) 일반화의 오류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하남선생은 황골은 아무 곳에서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명혈을 이룬 곳에서만 황골이 이루어진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필자가 보기에 부분을 갖고 전체를 판단하는 일반화의 오류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4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석회 동굴과 2,600년 전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등에서는

인골이 고스란히 출토된 바 있으며, 신석기시대 패총(조개무지) 속에서도 동물의 뼈가 발견되고는 한다.  

 


위 사진 :  1982년 충북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 석회암동굴에서는 무려 4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 5살가량 어린아이의 유골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최초 발견자 김흥수씨 이름을 따서 유골에 ‘흥수아이’라고 명명하였다.

주검은 편편한 석회암 위에 반듯한 형태였으며, 주변에는 고운 흙과 국화꽃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위 사진 :제천 남한강 상류에서 발견되었다.

연대 측정을 해 본 결과 기원전 6세기(2360±370)경이다. 이곳의 토질 역시 석회암 성분이었다.

  




위 사진 : 조선시대 묘소 중 회곽으로 작업한 곳 역시 유골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됨을 볼 수 있다.

필자는 몇 해 전 300년 된 우의정(청풍김씨 김석주) 묘소를 이장하게 되었는데,

묘지 속 내광은 견고한 회곽으로 이루어져 대형장비를 이용해 겨우 접근할 수 있었다.


묘지 속에는 많은 비단이 들어있었고, 소나무 횡대는 원형을 유지해서 송진향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당연히 유골도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곳은 앞의 전망은 좋지만, 후룡이 밋밋한 곳이었다.


이상의 사례를 보면 토양이 석회암 성분으로 알카리성을 띠거나 또는 작업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곳에서 자주 황골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지점은 풍수 명당의 논리와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황골은 곧 명당이라는 것은 대표적인 일반화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인문학 풍수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남 장용득 풍수 이론  (0) 2018.02.13
박시익 풍수 강의  (0) 2018.02.12
풍수 단체 그릅  (0) 2018.02.01
박민찬 쾌도난마   (0) 2018.02.01
도원 무술년 새해 천부경 강의  (0) 2018.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