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전 K스포츠재단 과장, 정현식 전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
고영태 전 더블루케이 상무는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과 관련해 중요한 제보를 했다.
한때 최순실씨 측근으로 불린 이들, 결국 시대의 요구에 응답한 내부고발자를 만났다.
K스포츠재단에서 근무했던 박헌영씨, 정현식씨, 노승일씨, 더블루케이 상무였던 고영태씨다(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던 고씨는
재판부가 보석 신청을 받아들여 10월27일 석방되었다. 고씨를 직접 만나지 못했고, 변호인을 접촉하고 사건 기록을 검토했다).
검찰청 조사실,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 헌법재판소 재판정에서 이들의 증언이 없었다면 촛불 1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조금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수집하고 제출한 각종 문건과 자료는 국정 농단 재판에서 주요 증거로 사용되고 있다.
정작 이들은 ‘내부고발자’나 ‘공익제보자’라는 호칭도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 박헌영 전 K스포츠재단 과장
박헌영씨(39)를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10월24일이었다. 지난해 10월24일 JTBC는 최순실 태블릿 PC 보도를 내보냈다.
당시 박씨는 그 사실을 몰랐다. 같은 시각 서울중앙지검에서 첫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는 최순실씨와 고영태씨를 모른다며 진술을 거부했다.
밤새 조사를 받고 다음 날 새벽 2시에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숨기려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다음 날 예정된 조사가 없었지만 검찰청을 찾았다. “검사님 지금부터 얘기를 해드릴 건데 저는 솔직히 무섭고 두렵습니다.”
12시간 동안 K스포츠재단과 더블루케이의 관계, SK와 롯데 추가 출연 등에 대해 설명했다.
최순실과 K스포츠재단, 출연 대기업 사이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검찰은 박씨의 진술을 밑그림 삼아 수사를 이어 나갔다. 이후로도 그는 20여 차례 검찰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수사에 협조했다.
두 번째 조사를 마치고 박씨는 한동안 진술조서 날인을 주저했다. 당시 청와대에는 아직 우병우 민정수석이 버티고 있었다.
그가 한 진술이 대검과 법무부를 통해 청와대에 보고될까 두려웠다. 실제로 검찰은 국정 농단 수사에 미온적이었다.
검찰은 권력형 비리 수사를 전담하는 특수부 대신 일반 형사사건을 맡는 형사8부에 국정 농단 사건을 배당했다.
수사 의지가 의심스럽다는 말이 돌았다. 검찰은 10월27일에야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했다.
우병우 수석,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은 10월30일 사퇴했다.
박헌영씨는 최순실씨의 힘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2016년 K스포츠재단에 입사한 이후 9개월 동안 겪은 최씨는 “대통령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사업 아이디어를 내라며 문화체육관광부 예산 내역 같은 내부 문건을 수시로 건넸다.
K스포츠재단에서 사람을 구할 때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거치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개인정보가 내려왔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씨는 올해 8월까지도 호신용으로 작은 칼을 품고 다녔다.
지난 3월10일 대통령 박근혜가 파면됐다. 눈물이 났다. 누구보다도 바랐던 일이다. 촛불집회에는 가보지 못했다.
“내부고발자라고 하지만 한때는 최순실이 시키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민망하고 죄송스럽다.”
대신 친구들에게 촛불집회에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광장에 가서 나 대신 박근혜 대통령에게 내려오라고 얘기해달라고 했다.”
박헌영씨는 올해 두 번 고소를 당했다.
K스포츠재단 직원들이 정동춘씨의 이사장직 사퇴를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정씨가 박씨와 직원들을 업무방해 등으로 고소했다.
지난 10월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나머지 하나는 진행 중이다.
고영태씨에게 ‘김무성 사위와 이명박 아들이 같이 마약하는 걸 봤다’는 얘기를 듣고 트위터에 올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아들 이시형씨가 박씨와 고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박씨는 올해 1월 발족한 비영리단체 ‘내부제보실천운동’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군 부재자 부정투표를 폭로한 이지문 전 중위를 비롯해 공익제보자들이 모였다.
촛불 1년의 소회와 앞으로 계획을 묻자 그는 말했다. “사고나 안 좋은 일을 당하지 않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할 텐데 이전에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이 부분은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 정현식 전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
정현식씨(64)는 박근혜 게이트 당시 재단 관계자 중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한 주인공이다.
지난해 10월23일과 26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가 10월29일 보도됐다.
회장이라 불린 최순실씨가 K스포츠재단의 주인이며 안종범 수석이 재단 일을 챙긴다는 내용이었다.
정현식씨 인터뷰는 K스포츠재단 관계자 누구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는 살아 있는 정권을 정조준하는 일이기도 했다.
JTBC 태블릿 PC 보도에 더해 정씨의 인터뷰가 공개되자 최순실 게이트는 정권 차원에서 컨트롤하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인터뷰는 갑자기 진행된 게 아니었다.
정씨의 아들 김의겸씨(38)는 최순실 게이트 초기부터 <한겨레> 특별취재팀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김의겸씨는
정 사무총장이 재혼하며 얻은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휴대전화 데이터를 복구해 최순실·안종범과 주고받은 문자를 찾아내고 K스포츠재단, 더블루케이,
문체부 자료 등을 정리해 <한겨레>에 건넸다. 의겸씨는 <시사IN> 취재에도 적극 응해주었다.
당시 기사에 의겸씨는 ‘K스포츠재단 업무에 밝은 한 관계자’로 등장한 바 있다
(<시사IN> 제479호 ‘최순실의 꼼꼼한 수금’ 기사 참조)
.
정현식씨는 은행을 퇴직하고 인생 2막을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K스포츠재단 재무이사 자리를 맡았다.
공익재단이니 뜻이 좋다고 여겼다. K스포츠재단이 청와대와 관계돼 있다는 건 재단에 들어와서 알았다.
최순실씨가 업무 지시를 하면 며칠 뒤 안종범 수석에게서 확인 전화가 왔다.
최씨가 정윤회씨의 전 부인이며 박근혜 대통령과 40년 지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보다도 한참 뒤였다.
아버지에게 재단 돌아가는 얘기를 들은 의겸씨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딸 정유라씨의 승마 대회를 보러 온 최씨 사진을 찾아냈다.
매사에 원칙을 챙기는 정씨는 곧 최순실씨의 눈 밖에 났다. 2016년 6월 재단을 사직했다.
최씨는 정 사무총장에게 업무용으로 사용하며 본인과 연락을 주고받던 휴대전화를 반납하라고 했다.
휴대전화를 돌려주기 직전 정씨의 아내 이정숙씨가 최씨의 연락처를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했다.
언젠가 필요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의겸씨는 “어머니가 ‘최순실 네가 짱이다,
짱!’ 하면서 ‘짱’이라는 이름으로 최순실 연락처를 저장했다”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이 연락처가 진실을 여는 열쇠였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정현식씨는 최씨 연락처를 제출했고 검찰은 이를 단서로 통화기록을 추적했다.
최순실-청와대-K스포츠재단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드러났다.
정현식 사무총장과 최순실씨가 통화를 마치면 곧이어 최씨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통화가 끝나면 박 대통령은 안종범 수석에게 연락을 하고, 그 뒤 안 수석은 정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최씨와 안 수석의 주장은 통화기록 앞에서 무색해졌다.
몇 해 전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친 정씨는 박근혜 게이트를 거치며 건강을 크게 해쳤다.
불안감에 1~2시간마다 잠에서 깼고 식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지금은 체력을 많이 회복한 상태다.
지난 5월 대선 때 정씨는 사전 투표를 했다. 5월4일 새벽 6시 동네 투표소에서 1등으로 투표를 했다.
정씨는 “대선 날 다른 일정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너무나 하고 싶었던 투표여서 그랬다.
이번에 뽑히는 대통령은 박수 받으며 떠나길 바라며 투표를 했다”라고 말했다.
■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
“너무 파장이 클 것 같아서···.” 지난해 12월22일 국정 농단 5차 청문회에서 노승일씨(41)는 답변을 머뭇거렸다.
차은택씨와 최순실씨를 모른다는 우병우 증인에게 호통을 치던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참고인으로 출석한 노승일씨에게
“뭐라도 아는 게 없느냐”라고 물었다. 노씨는 “차은택의 법조 조력자가 김기동 검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병우 수석이 (김 검사를) 소개했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바로 앞에 앉은 우 전 수석의 증언과 배치되는 발언이었다.
그는 “삼성 자료가 있다” “박근혜, 최순실 그리고 삼성이랑도 싸워야 한다”라며 청문회장에서 폭로를 이어갔다.
이날 손혜원 의원의 질문은 예정된 게 아니었다. 노씨는 “손 의원이 갑자기 내게 질문을 했다.
‘파장이 클 것 같아서’라고 답변하는 장면을 잘 보면 내가 피식 웃는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와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훨씬 전부터 내부 고발을 준비했다. 시작은 독일에서였다.
2015년 8월 노승일씨는 최씨가 설립한 회사인 코어스포츠 직원으로 독일에 갔다.
삼성전자와 코어스포츠가 정유라씨 전지훈련 지원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계약이 성사되자 토사구팽을 당했다(<시사IN> 제488호 ‘간장에 밥을 비벼 먹으며 폭로 준비했다’ 기사 참조).
최순실씨는 약속한 임금을 반 이상 깎더니 결국 노씨를 해고했다.
그는 내부 문건, 이메일, 카카오톡 대화 등 ‘최순실과 삼성의 검은 커넥션’에 관련된 모든 증거를 모았다.
최씨에게 들킬까 봐 자료를 모아놓은 SD카드를 신발 밑창에 숨겼다.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자 그동안 준비했던 증거를 검찰에 제출했다.
청문회가 끝난 뒤 노승일씨는 이완영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SNS를 통해 변호사비 모금에 나섰다. 검찰은 지난 8월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노씨는 최근 ‘대한청소년체육회’라는 비영리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재능이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체육을 포기하는 청소년 유망주를 지원하는 게 목표다.
박근혜 게이트 이후 노씨는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그는 지금이 더 낫다고 말한다.
“나는 최순실 밑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잘못을 얘기하고 용서를 구해 마음이 편하다.”
■ 고영태 전 더블루케이 상무
건장한 남성이 입고 있던 흰 와이셔츠에 휴대전화 액정을 닦은 뒤 최순실씨에게 내민다.
통화를 마친 최씨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휴대전화를 돌려주자 남성은 공손히 받는다.
이 남성은 이영선 당시 청와대 행정관이다. TV조선이 지난해 10월25일 공개한 이른바 ‘박근혜 의상실’ CCTV 영상이다.
최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의상을 조달해왔다는 보도에 더해 청와대 행정관까지 부하처럼 부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영상에 담겨 방영되었다
. ‘최순실 파워’의 실체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바로 이 영상을 고영태씨(41)가 TV조선에 제공했다는 건 이제 이 영상만큼 유명한 얘기이다.
박근혜 게이트 초기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폭로는 대부분 그에게서 나왔다.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고, 태블릿 PC를 사용해 수정했다는 정보를 JTBC에 제보한 이도 고씨였다.
올해 1월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 증인으로 채택된 고씨에게 보낸 출석요구서가 반송되자 경찰에 소재 파악을 요청하면서
신변 위험설이 돌기도 했다. 고씨는 지난 2월 <시사IN> 인터뷰에서 “내가 나올 때마다 가족들이 힘들어한다.
국민들이 응원해주셔서 더 창피하다”라고 불출석 이유를 밝혔다(<시사IN> 제492호 ‘최순실 위해 일했다.
고개를 못 들고 산다’ 기사 참조).
2월6일 고씨는 최순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지난해 10월 박근혜 게이트가 본격화된 이후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한 자리였다.
최씨는 발언 기회를 얻어 직접 고씨에게 묻기도 했다.
최씨는 신용불량, 마약 전과 등 재판 내용과 관계없는 사생활을 언급하며 고씨를 몰아붙였다.
고씨는 담담하게 “그런 사실이 없다”라고 답했다.
4월11일 고씨는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검찰에 체포됐다.
인천세관장 인사 청탁을 성사시키며 2200만원을 받았다는 혐의다.
해당 사건 재판이 8월부터 진행되고 있다. 고씨는 200만원을 받은 건 맞지만 최순실씨에게 전달하는 역할만 했고
2000만원은 수수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한다.
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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