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서겠다' 선언한 백 명의 '손석희'들을 위하여
호모아줌마데스 입력 2017.09.01. 15:25
[오마이뉴스호모아줌마데스 기자]
▲ 김민식 MBC 프로듀서 |
ⓒ 참여사회 |
"김- 장- 겸- 은- 물- 러- 나- 라!"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엄청난 목소리와 커다란 입 하나. 사안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터졌다. '공정보도'와 '사장 퇴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를 웃긴 것, 이 또한 그의 재능이다. 유쾌한, 그러나 길고 긴 싸움을 시작한 김민식 PD를 지난 8월 7일 만났다.
경계선 위에서
'김장겸은 물러나라!' 이 여덟 글자를 자신의 직장에서 너무도 시원하게 외치는 바람에, 그를 찾는 이들이 급증했다. 각종 매체에 불려 다니며 인터뷰를 했고 너무도 당연하게 회사의 높으신 분들께도 불려갔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해직 언론인의 활동과 그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그. '해직'이란 단어 앞에서 나는 마구 불안해진다.
"절대 잘리지 않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있구요, 하하하. '최선을 희망하고 최악을 각오한다'라는 글귀를 좋아해요. 항상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최악을 각오하죠. 노조와 상의 없이 혼자 이번 일을 벌이면서 최악이 뭘까 생각해봤어요. 최악은 물론 해고죠. 작년까진 해고가 너무 쉬웠거든요. 근데 촛불 이후, 상황이 바뀐 지금은 회사도 해고가 부담스러울 거예요."
- 그럼 이 모든 행보가 그러한 상황 판단과 치밀한 전략 위에서 이루어진 건가요?
"그렇지는 않구요. 저는 일의 결과를 잘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책을 쓸 때 사람들에게 "영어를 잘해서 그걸로 뭘 할지에 대해 너무 생각하지 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다"라고 얘길 했어요.
MBC 사장 퇴진과 관련해서도 무작정 물러가라고 외칠 게 아니라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거죠. 영어 공부도 미련하게 그냥 될 때까지 했어요. 그럼 결국 되거든요."
이 시점에서 청탁 하나가 들어왔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재수 없어 할 수도 있어요. 제가 늘 호감과 비호감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거든요. 그러니 잘 정리해주셔야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호감과 비호감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 했지만, 한 시간가량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잘(?) 정리해본 결과, 그가 서 있는 경계는 '마침표와 쉼표 그 사이'에 있다. 앞과 뒤를 재지 않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서 마침표 하나가 분명하게 찍힐 때까지 모든 걸 쏟아붓는 사람. 그러고도 그 마침표 뒤에 쉼표 하나를 찍고 다시 자신의 서사를 이어가는 사람. 내가 정리한 그는 그래서 세미콜론(;)을 닮은 사람이다.
세미콜론 하나 - 다시 싸움을 시작하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본 동영상 중에 그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하나 있다. 2012년 있었던 MBC 파업 관련 항소심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나와 기자회견을 하는 현장. 한참을 씩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그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다. 카메라는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울며 서 있는, 다 큰 남자 어른을 계속 비추고 있었다.
"2012년 파업 이후 제 인생에서 가장 바닥으로 떨어졌던 게 2년 전에 비제작 부서로 발령 났을 때에요. 아, 이 회사는 나에게 절대로 PD로서의 일을 안 주려고 하는구나. 제가 발령 난 데를 가봤더니 한학수, 이근행 이런 사람들이 몰려있는 유배지였죠."
명백한 보복이었다. 주조정실로 배치되어 하루 종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보지 않을 MBC 뉴스를 새벽 5시 뉴스부터 시작해 심야 마감 뉴스까지 봐야 했다. 보복이 아니라 '징벌'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보복과 징벌의 빌미가 된, 그가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서 이끌었던 지난 170일간의 파업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파업을 하면 월급이 안 나와요. 전국적으로 2천 명의 조합원이 있는데 다 40~50대 가장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6개월 동안 집에 월급을 못 가져간다는 걸 상상해 보세요. 빚내고 대출받고 카드깡 받아가면서 싸웠어요."
임금과 근로조건이 아닌 오로지 '공정방송'이라는 대의만을 걸고 싸웠던, 그래서 사측으로부터 순수하지(?) 못한 파업이라는 정신 나간 비난을 받았던, 언론계 사상 가장 길었던 그 파업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흐지부지'라는 표현에 그가 발끈하며 대꾸한다.
"파업이 6개월 정도 이어지면, 생계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가는 사람들이 나와요. 그렇다고 6개월 동안 같이 싸운 사람들을 배신자로 몰아붙일 수는 없잖아요. 파업이 장기화되면 조합이 와해되는 시점이 오고 내부적으로 퇴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거죠. 당시가 대선 정국이었고 사실은 박근혜 쪽에서 파업 풀고 올라가려는 노력을 보여주면 해직자 복직도 시켜주고 김재철 사장도 퇴진시키겠다는 언질이 있었어요. 그 협상안을 받고 올라갔다가 뒤통수를 맞은 거죠."
사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파업 참가자들의 숨통을 움켜쥐었다. 770여 명 중 그를 포함한 150여 명이 자신이 일하던 부서로 복귀하지 못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굴욕의 시간과 자신의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 그리고 견디다 못해 제 발로 떠나간 사람들…. 이 눈물 나는 길 위에 그가 다시 섰다. 5년 전 마침표가 찍힌 일에 다시 '김장겸은 물러나라'라는 쉼표 하나를 커다랗게 찍으며, 그가 다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파업을 접을 때 격론이 있었고, 개인적으론 계속 싸우고 싶었지만 예능·드라마 부문의 입장을 대변해서 복귀하자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파업을 접은 후 지난 5년간 보도·시사교양이 망가져 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죠. 그때 내가 내린 선택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웠고, 지금이라도 빚진 마음을 갚고 싶어요."
길가에 서서 주먹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던 남자. 그가 다시 이 눈물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유, 그 안에는 다시 타인의 '눈물' 이야기가 있었다.
▲ 김민식 PD는 지난 8월 9일 열린 영화 <공범자들> 언론시사회에서 투병 중인 이용마 기자를 언급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
ⓒ 참여사회 |
대표작 <내조의 여왕>, <논스톱3>, <여왕의 꽃>, 파업 때는 뮤직비디오 <MBC 프리덤> 등 각종 '파업 홍보 프로그램'을 연출하기도 한 그는, 자칭 딴따라·코미디·예능 PD이다. 그래서인지 PD가 된 과정 또한 어째 시트콤스럽다.
"첫 직장에서 영업을 했는데 적성에 안 맞더라구요. 그래서 프리랜서를 해야겠다 싶어 통번역대학원에 들어갔어요. 통번역 자격증을 따면 사실 생계는 해결돼요. 경제적 부담이 해결되니까 마지막으로, 아 그때 제 나이가 입사 연령에 딱 걸리는 서른이었거든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뭐라도 해보자. 회사들 가운데서 가장 재미난 일을 할 거 같은 가장 좋은 회사, 그게 MBC였어요."
그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통번역 자격증만 있으면 5일만 일해도 200만 원을 벌 수 있었다. 그런 엄청난 걸 손에 쥐고도 그는 쉽게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그 뒤로 그가 새롭게 찍은 쉼표는 '인생이 재밌어지는 것', 장르로는 코미디다.
"제 삶의 모든 게 정신승리예요, 진짜로. 고등학교 때 심한 왕따였어요. 자살 시도도 몇 번 했을 만큼 스무 살 이전의 삶은 진짜 불행했죠. 그러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난 20년이 죽을 만큼 불행했으니 지금부터는 죽을 만큼 행복해야 삶의 균형이 맞는 게 아닐까. 그 이후로 사람들이 보기엔 조증에 가까울 만큼 즐거운 삶을 살았죠."
앞서 그가 내게 했던 유일한 부탁, '잘 정리하기'. 하여 두 가지 버전을 준비했다.
먼저 예능 버전.
연출 일에서 쫓겨났을 때도 그는 제일 먼저 '그럼, 놀러 가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남미로 여행을 떠났고 스카이다이빙 등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기며 무척 행복했다. 영어 때문에 세계인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그 즐거움을 공유하기 위해 영어공부법을 블로그에 적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영어책 한권 외워봤니?>라는 책으로 나와 대박을 터트렸다
이번엔 같은 시기를 다룬 다큐 버전.
남미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곳이 대한민국과 물리적으로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MBC 정상화'를 외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세월호가 가라앉았고 위안부 협상이 발표되었으며 교과서 국정화, 사드 배치 등 문제가 끝없이 터졌다. 연출 일에서까지 쫓겨난 그는 패닉에 빠졌다. 한마디로 인생이 바닥이었다.
인생은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장르가 바뀐다. 왕따, 자살, 불행, 파업, 퇴진 같은 단어를 '죽을 만큼 행복하기'로 바꾸는 일. '싸움이란 어떤 형태로든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는 생각을 '코미디 PD답게 유쾌하게 싸우고 싶다'로 전복시키는 일. 이 과정을 그는 '정신승리'라 말하고 나는 '눈물 나는 노력'이라 듣는다.
"1년에 200권 이상의 책을 읽어요. 특히 자기계발서에 관심이 많죠. 왜냐면 내 삶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활용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거든요. 외부의 영향과 상관없이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이란 게 반드시 있다고, 전 믿습니다."
100명의 손석희
이 글을 마무리할 때쯤, MBC 기자들이 제작 거부를 전 부문으로 확대했다. 기존 보도국 인력 81명에 이어 65명이 추가로 제작을 거부하며 총 206명의 기자들이 업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자리에서 발표된 'MBC기자협회 결의문'을 읽다가 문장 하나가 목에 걸렸다. '이번 싸움은 우리 손에서 가속되어야 한다. 추악한 범죄의 목격자이자 그 범죄의 현장에 남겨진 증거물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추악한 범죄의 증거이자 목격자'란 정체성은 그의 입에서 단숨에 전복돼버린다.
"손석희 저널리즘의 출발은 신 군부 시절 부역 언론인이었다는 부끄러움에서부터였습니다. 지금 MBC에는 그런 손석희가 100명쯤 있습니다. 지난 5년간 온갖 굴욕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노조만 탈퇴하면 승진도 되고 모두 다 잘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MBC 노조의 조합원 자리를 지키고 있는 100명의 언론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포기 않고 이들에게 기회를 주면 10년 후, 20년 후, 이들은 100명의 손석희가 될 수 있습니다."
6개월, 170일을 파업하는 동안 어느 매체도 MBC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있을 때, 참여연대에서 '참쇼'라는 이름의 토크쇼가 열렸다. 거기에 참석해 언론파업에 대해 얘길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처럼 싸우는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공간으로써 참여연대가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고 했다.
이제 그 고마움을 그에게 돌려보낸다. 싸움을 응원했다가, 결과에 실망했다가, 결국엔 포기하려 했던, 그리하여 철저히 무관심했고 때론 조롱과 멸시도 서슴지 않았던 나를 깨뜨려주고 설득해 준 그에게. 그리고 이 순간에도 부역자라는 손가락질과 부끄러움을 딛고 '다시 일어서겠다' 선언하는 수많은 손석희들에게….
MBC에는 아직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호모아줌마데스는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입니다.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습니다. 특기는 합기도 빨간띠입니다. 사진은 이선희 미디어홍보팀 팀장이 촬영했습니다. 이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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