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ㄷ
헌법과 국회법에 따라 7월 6일 본회의를 열겠다. 그날 국회법 개정안 재의 건과 법률안을 처리하겠다."
물론 본회의 통과를 기다리는 법률안과 국회 상임위원장 인사 안건까지 처리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밝혔다.
'뜨거운 감자'를 손에 받아들었다.
정의장은 '친정'인 새누리당의 입장보다는 '입법부 수장의 직무'를 택했다.
정치인이기에 앞서 평생 수 천 건의 뇌수술을 집도한 신경외과 의사다.
환자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순간에 누구의 지시에 따르기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는 게 몸에 뱄다.
20년 가까운 정치여정도 계파색보다는 독자행보에 가까웠다.
이런 예상은 지금까지 거의 들어맞았다.
정 의장은 1948년 창원에서 중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학교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이 현재 지역구인 중구·동구다.
부산대 의대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 등을 거쳐 신경외과 전문의가 됐다.
장인이자 신경외과 의사인 김원묵 박사가 1974년 사고로 사망하자 김 박사의 신경외과 병원을 승계했다.
정 의장은 20대인 데다 레지던트 과정이어서 당장 수술을 맡거나 병원을 경영할 처지가 아니었다.
정 의장은 이때 동요하는 직원들과 아내를 안정시키려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3년 뒤 전문의가 돼 돌아오겠다"며 직원들의 역할과 직급에 따라 50%, 많게는 300%까지 급여를 파격 인상한 것도 그중 하나다.
의사이기 전에 병원 경영자로 먼저 능력을 발휘한 셈이다.
이후 그가 자리잡은 봉생병원은 수술 실력은 물론, 경영 면에서도 성장을 거듭했다.
병원 바깥에선 지역의 문화·복지사업에 나섰고 부산·광주 양 지역 인사들과 영호남민간인협의회를 만드는 등
NGO(비정부기구)를 통한 사회운동도 했다. 지금도 북한에 의료 지원을 펼치는 '한국의 슈바이처'가 되는 게 꿈이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대통령 뜻에 따라 새 인물을 찾던 박관용 대통령특보의 제안을 받고 수락, 정치에 도전했다.
정 의장은 대학 시절 허리디스크를 앓으면서도 의대 본과를 마치고 미국의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세브란스병원 인턴 시절 수술이 불가피할 정도로 디스크가 악화됐다. 이 때문에 병역이 면제됐다.
지금도 병역면제란 지적을 받으면 "옥석을 가려달라"고 강조한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열린 머니투데이 더300 주최
'제1회 대한민국 최우수 법률상' 시상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
정 의장은 15대 총선 후 부산(중구·동구)에서 19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
특별한 계파 소속으로 움직이지 않았다가 이명박정부때는 범 친이(친이명박)계로 분류됐다.
이 때문인지 친박(친박근혜) 주도의 19대 총선엔 공천을 따내는 것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건 3선인 17대 국회부터다.
야당 소속 재정경제위원장(현 기획재정위원장)을 맡았을 때 근로장려세제(EITC) 도입 등을 이끌었다.
2006년엔 남북의료협력재단을 설립, 대북 의료지원에 나섰다.
2008년 광주와 전남 여수 각각의 명예시민증을 받았는데 광주명예시민은 한나라당 의원으론 처음이었다.
2009년엔 2015년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위원장으로 뛰며 유치에 성공했다.
2010~2012년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이 기간 박희태 국회의장이 과거 전당대회 도중 '돈봉투'
사건으로 의장에서 물러나자 의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2011년 11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국회 본회의 표결 당시 박 의장을 대신해 회의를 주재했다.
이때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이 본회의장 의장석 앞에서 터뜨린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썼다.
2014년 2년 임기의 국회의장을 맡았다. 정치적 미래에 대한 심경은 부의장 시절 쓴 글에 잘 드러난다.
이제 제1, 2의 집도의로 수술방을 총지휘할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할까."('이름값정치', 2011)
(서울=뉴스1) 이광호 기자 = 한미FTA비준안을 기습 처리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한
2011년 11월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민노당 김선동 의원이 정의화 국회 부의장을 향해 최루탄을 터뜨리고 있다. 의장석에 정의화 국회의장. |
[키워드①]독자행보
"표? 나 국회의원 안 해도 좋고 당신 표 안 받아도 좋다."
정 의장은 재선의원이던 2001년 상호저축은행을 '저축은행'으로 명명하려는 정부의 법개정안에 강력 반대했다.
상호신용금고가 상호저축은행의 전신인데 '상호'를 떼면 소비자들은 일반 은행과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비리 등 리스크는 줄일 수 없다는 이유다.
정 의장은 법안소위원회 도중 이종구 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당신")을 강하게 몰아세우고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과도 대립했다. 법안은 '상호저축은행' 명칭을 유지한 채 통과됐다.
정 의장은 이밖에도 대세와 별 관계없이 움직였다. 1997년 이회창 후보 등 신한국당 9룡이 대권에 도전할 때 이수성 후보를,
2002년 이회창 대세론이 거셀 때에도 최병렬 후보를 밀었다. 동료의원들이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2008년 이명박 후보를 지원, "처음으로 내가 밀었던 후보가 경선을 이겼다"고 말했다.
18대 국회 국민통합포럼·함께내일로 등 대표적 친이계 공부모임에 합류했지만 2010년 이들 모임을 탈퇴했다.
한나라당 세종시 특위위원장을 맡았음에도 정부가 강력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신중론을 유지했다.
세종시 수정안 국회 본회의 표결엔 기권했다. 친이계란 수식어는 점차 '범 친이'로 달라졌다.
동서화합을 강조하면서도 김대중정부때 언론사 세무조사가 정치적이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이슬람채권법(수쿠크법) 도입에 기독교계가 반대하자 "세속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할 교계마저
다른 종교와 이해관계를 내세우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느냐"며 교계를 비판하기도 했다.
본인 소신에 따른 것이라지만 이처럼 탈계파·독자행보를 강조하다보니 정치적 성장은 더뎠다.
그러나 정 의장 자신은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란 점을 들며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야말로 포은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이라고 자평한다.
[키워드②]국회선진화법
2012년 18대 국회 말미, 정 의장이 국회의장 직무대행 시절 국회선진화법(국회법)이 통과된다.
그는 국회선진화법이 '식물국회'를 가져올 것이라며 법안에 공개반대했다.
그가 국회의장을 꿈꾼 만큼, 법안의 직권상정 등 의장 권한을 종전보다 약화시키는 국회선진화법에 반대한 것이란 평도 있다.
하지만 선진화법 시행 뒤 국회의장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는 더 강해졌다.
여당은 표결 강행, 야당은 몸싸움 등 물리적 방법이 불가능해지면서 '중재'를 위해 국회의장실로 달려간다.
법안을 본회의에 올리자면 좋든 싫든 여야가 타협해야 하는데 정 의장은 이 과정에서 균형추를 자임하고 있다.
후반기에 다시 도전해 당내 경선에서 황우여 의원(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을 101표 대 46표로 이겼다.
선진화법 실시 결과 여당이 예전처럼 법안통과에 추진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는 불만이 새누리당내에 고조됐고,
이런 상황을 처음부터 예상한 정 의장에 대한 지지표가 결집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잔디광장에서 펼쳐진 '열린국회 북 페스티벌,
꿈나무 독서캠프' 행사를 찾아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2015.5.17/뉴스1 |
평소 역사관과 인성교육을 강조해 왔다.
지난해엔 학교 등 사회적 차원에서 인성교육을 실시하도록 하는 인성교육진흥법을 대표발의했다
. 법안은 그해 국회를 최종 통과, 2015년 7월부터 시행됐다.
단 인성도 '사교육' 대상이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는 등 법 시행 효과는 지켜볼 일이다.
정 의장은 이런 논란에 "인성은 교육될 수 있지만 측정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국회 재경위원장 때 저소득층 근로장려세제(EITC)를 도입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전임 정부부터 논란이 돼 온 영리병원 도입은 의료 상업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한다.
[사람들]황우여 부총리와 '리턴매치'
인맥만 보면 '친이계'라는 분류도 무리가 아니다.
1996년 15대 총선 동기가 이재오 의원, 김문수 전 경기지사, 홍준표 경남지사 등이다.
(※김무성 대표, 이완구 전 총리도 15대 총선 동기다.)
박 총장, 권철현 전 의원과는 시민운동 시절부터 친분이 깊다.
친박계와는 불편한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09년 이명박정부 지식경제부(현 산업자원부) 장관 때 의료법 개정관련,
'히포크라테스 정신으로 의료사업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 돈 벌려고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정 의장은 이에 반발, "양심에 따라 의술을 베푸는 수많은 의료인을 폄하한 것이고 의료의 존재가치가 물질에 있는 게 아니다"며
"최 장관은 인식을 바꿔야 될 것"이라 지적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와는 2009년 원내대표 경선에 격돌했다.
정 의장 조는 1차투표 3위(39표)에 그쳤고 결선투표에서 친이계의 안상수 조가 당선, 친박계의 황우여 조는 2위를 했다.
정 의장이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던 2011년엔 황우여 원내대표와 권한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지도부 사퇴시 당권이 비대위원장과 원내대표 중 누구에게 가느냐를 두고 계파갈등 양상으로 흘렀다.
당대표는 원내대표가, 당무는 비대위원장이 맡아야 한다는 당내 유권해석으로 논란이 일단락됐다.
정의화·황우여 두 사람은 국회의장 자리를 두고도 경쟁했다.
2009년 5월, 정의화 당시 2015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위원장이 유치 결정소식에 기뻐하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 제공 |
[이 한장의 사진]광주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
정치입문 전부터 동서화합에 관심을 기울인 그는 2013년도 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에 한 차례 실패한 광주시가
2015년 대회를 재추진하며 유치위원장을 부탁하자 이를 수락했다.
대통령의 실사단 면담은 유치 결정에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유치한 U대회 개막일이 7월3일이다.
동서 화합뿐 아니라 남북의 균열 해소도 정 의장의 화두다. 의료 등 인도적 지원과 교류를 지금보다 더 확대해야 한다고 본다.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외교정책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정 의장은 한국의 외교현실을 "코끼리의 네 다리에 낀 상황"으로 표현한다.
이른바 주변 4강인 미·일·중·러에 대한 양자·다자외교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이]애창곡은 '마이웨이'
요즘은 '연설의 달인'이래도 손색 없을 만큼 노련하다. 돌발상황도 여유있게 대처한다.
하지만 정치 초년생 때엔 "대중 앞에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성격을 고치려고 거울 보며 연습했다"고 한다.
애창곡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 '아침이슬' '사랑으로' 등이다. '
건강사회'를 역설하는 그는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런 일이 청소년기에 담배를 배운 것
, 가장 잘한 일이 담배를 끊은 것이다.
자신이 밝힌 별명은 '한국축구'다. 강한 자에 강하고, 약한 자에 약하다는 뜻으로 지인들이 붙여줬다고.
한국 축구의 실력이 예전과 달라졌으니 이제는 새 별명이 필요해 보인다.
[요! 주의]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푸근하고 소탈한 인상이 장점이지만, 지금도 물건값을 직접 깎는 깐깐함을 보인다.
15대 총선땐 "(돈) 있는 사람이 심하다"고 할 정도로 경비 지출을 챙겼다고.
'거시'보다는 '미시'에 강할 수밖에 없단 것이다.
부산 중구와 동구의 선거구 통합 후 첫 국회의원인 정 의장이 어느덧 의전서열 2위 국회의장에 올랐지만
중·동구는 또 한 번 선거구 조정의 영향권에 들었다.
옆 동네인 영도구(김무성) 서구(유기준)는 각각 하한선에 미달한다.
인구변동과 선거구 조정이 정 의장만의 화두는 아니지만 한때 부산의 '심장'이던 이 지역의 활력이 예전만 못한 것은 사실이다
. 이런 곳에서 5선 의원이란 사실은 성과인 동시에 숙제다.
[프로필]
김남희씨와 사이에 3남. 재산 105억원으로 국회의원 중 7번째다.
△경남 창원(67) △부산고·부산대 의대 △15·16·17·18·19대 국회의원 △봉생병원 원장 △한나라당 원내총무 권한대행
△17대 국회 재정경제위원장 △국회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유치특별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인재영입위원장
△한나라당 세종시특별위원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18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 및 국회의장 직무대행 △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2015광주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위원장·조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