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blog.naver.com/indizio/30190311807
밤 11시
어버이날. 오래간만에 반포에 가서 아버지가 사주시는 돈까스를 먹었다.
귀가길 지하철을 타고 밤 열한 시 쯤 경복궁역에 내렸는데 여기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지하철 입구 나오는데서부터 경찰들이 인도를 완전히 막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인상을 보고
경찰 벽 사이로 슥슥 통과시켜주지만 나는 수염을 기르고 잠바를 입었다는 죄로 검문에 걸렸다.
"어디 가십니까?"
"집이요"
"집이 어디신데요?"
"옥인동이요"
내가 사는 곳은 청와대 근처라 원래 경찰과 사복경찰,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이 개미처럼 많은 동네다.
어제는 너무 많았다. 정작 시위를 하는 사람은 몇 되지도 않았는데 경찰버스는 저녁 내내 자하문로를 틀어막고
방패를 든 전경들은 인도를 막았다. 조금 가다 보니 버스 정류장에서는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남자가 버스에 타려고 했더니 경찰(전경)들이 우르르 몰려와 버스에 오르지 못하도록 남자를 감쌌다.
남자는 "대체 무슨 권리로 시민이 버스에도 못 타게 하느냐"고 외쳤다. 경찰들은 조금 후 남자를 놓아줬다.
------------------------------------------
신교동 사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왼쪽 골목으로 올라가면 우리 집이고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대통령네 집이다. 처음으로 시위대가 눈에 띄었다. 시위대라고 하기도 뭐 한게, 구호가 적힌
마분지 한 장을 든 아줌마 한 명과 맨손으로 고함만 지르는 아저씨 한 명, 그리고 마스크를 쓴 두 명이 전부였다.
이들은 1인 시위로 인정받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서로 모르는 사람들인지 조금씩 떨어져서
따로 따로 구호를 외쳤다. 내용은 간단했다. '세월호 구조 실패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과 KBS, MBC는 사과하라!'
폭력을 쓰거나 차도를 점거한 것도 아니었다. 인도에서 소리만 쳤다.
이명박 정부의 시위 진압 전략이 컨테이너를 이용한 명박산성이었다면, 박근혜 정부의 전략은 쌈싸먹기인 것 같다.
경찰들이 이들 한 명 한 명을 각각 만두 만들듯이 감싸서 옴싹달짝 못하게 만들었다.
한 겹이 아니라 두 겹 세 겹으로 둘러치고, 맨 뒤에는 사다리와 비디오카메라를 동원해 계속 촬영했다.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이 장면을 휴대폰에 담았다. 사진에 보이는 분들이다. 난 편의점 앞 계단에서 지켜봤다.
내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1인 시위는 합법 아닌가요? 놓아주세요"라고 경찰들에게 말했다.
행색으로 보아 정말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그래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빈손인 남자(사진 위에 흰색 모자)는 곧 풀려났다.
그러나 피켓을 든 여자는 여전히 감금되어 있었다.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면서 꿀홍삼도 한 병 샀다.
멘붕이 온 모습으로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흰색 모자 남자에게 건냈다. 그는 고맙다고 하면서도
'저 말고 저기 저 분에게 드리세요'라고 아직도 경찰에 포위된 여자 쪽을 가르켰다.
난 차마 아직 경찰이 만든 사람 장벽 안에 감금된 분에게까지 음료수를 전달할 용기는 없었다.
'둘러쌓여 계셔서 힘들 것 같아요...'라고 변명하고 그냥 아저씨에게 음료수를 쥐어줬다.
마스크 쓴 두 명이 구호를 외치는 곳에는 방패를 든 전경 수십명이 사방으로 벽을 만들었다.
영화 '300'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누가 보면 페르시아 100만 대군이 쳐들어오는 줄 알았으리라.
상대는 빈 손으로 구호를 외치는 아줌마 아저씨 둘이다. 화염병, 각목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누가 봐도 오버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경찰은 난리를 칠까?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알아서 기는 모습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대체 방패가 저기 왜 필요하지? 옆에선 주민들이 이런 장면을 다 지켜보고 있다.
아까 사진에 찍힌 외국인은 마침 로이터통신 기자라 한다.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 관광을 시켜드리던 참이었던 것 같다.
어버이날 아니던가. 트위터를 통해 농담을 건냈더니 위와 같은 답이 왔다.
----------------------------------------
밤 1시
집에 들어갔다가 자기 전에 다이어트 달리기를 하러 나왔다. 밤이 늦었으니 이젠 시위하시던 분들도
경찰들도 다 해산했겠지 생각했다. 인왕스카이웨이를 뛰고 홍지문쪽으로 나와서 청와대 앞길로
내려왔는데, 아까보다 경찰과 전경버스 수가 더 늘어났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양복입은 고위직들도 눈에 띄었다.
집에 들어와 '팩트TV' 생중계와 시사IN 페이스북의 현장 생중계를 봤더니, 여의도 KBS에게
문전박대당한 유족들이 청와대로 오기로 결정했단다.
신교동 사거리의 경찰 병력 증원은 그에 대한 대비인 것 같다.
씻고 자려는데 도무지 잠이 안왔다.
팩트TV에서는 유가족들이 광화문 세종대왕상 옆에서 버스를 내려 천천히 걸어 신교동 사거리까지
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계속 외친다.
"우리는 시위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님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KBS에 사과를 받으러 갔는데 사과를 해주지 않아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우리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애들이 죽은 것 밖엔 없습니다."
네시가 넘었다.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을 못본 채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도 못할 짓이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사거리로 걸어 내려갔다. 나 말고도 밤잠을 이루지 못해 나온 동네 주민들 몇몇이 보인다.
사거리에서 전경 버스에 막힌 유족들은 버스가 남겨둔 작은 틈을 통해 청와대쪽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지키고 서있는 경찰들은 비켜주지 않는다. 가장 앞에서 벽을 만들고 있는 경찰의 모자를 유족 중 한 명이 벗기자
그 경찰이 발끈한다. 유족은 '내가 당신 모자를 벗겨서 기분이 나쁘다면, 당신은 왜 나의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는 겁니까. 내 기분은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경찰의 상사로 보이는 목소리가 부하에게 명령한다. '아무 대꾸도 하지 마! 가만히 있어!'
진입을 포기한 유족들은 외친다. '대통령님 10초만 저희 얘기를 들어주세요'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서 박힌다.
난 생각한다. 이들은 한 달 전까지 그냥 고등학생 학부모였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통진당원도 아니고
종북좌빨도 민주화투사도 아니다. 그냥 경기도 안산에 사는 엄마 아빠들이다.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고로 애들이 몰사했다는 것 뿐. 그런데 어쩌다가 이 사람들이 한밤중에 모포를 뒤집어 쓰고
경찰들의 적 취급을 받으며 길거리에 들어앉는 상황이 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경찰과 공무원들의 잘못이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한국이지만 이렇게 유족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저 피해자 중 한 명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나 같으면 답답한 마음에 큰 사고를 쳤을 것이다.
새벽 4시 30분
유족들은 버스 앞에 작은 스크린과 빔프로젝터를 설치하더니 동영상을 틀었다.
배가 침몰하고 나서 한참 후인 오후 6시 이후에 찍힌 동영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동영상에 나온 배 안은 빛이 환했다. 그걸로 보아 아마 진짜 침몰 후에 찍은 동영상은 아닌 듯 했다.
한 동영상에서는 소녀가 친구들을 보여주면서 말한다.
'지금 여기는 90도가 넘게 기울었습니다. 90도가 넘으면 롤러코스터보다도 더 심하게 기울었다는 얘기지요 (...)
3층에도 친구들이 많은데 모두 다 구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른 동영상에서는 소녀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로 벽에 기대어 있다.
얼굴을 클로즈업하기도 하고, 아직은 밝은 목소리들이다.
방송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대기해라'라는 말이 나오자 한 소녀가 말한다.
"야, 근데 영화같은데 보면 '가만히 있어라'라고 해서 가만히 있다가 다 죽지 않냐?"
"맞어 맞어!"
영상 속에서 들려오는 소녀들의 목소리엔 약간의 불안감이 묻어있다.
영상을 본 부모들은 흐느낀다. 부모가 아닌 다른 관찰자들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린다.
어제의 그 로이터통신 기자는 부모님을 호텔에 모셔다 드리고 다시 신교동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실시간으로 트위터에 올린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까지 사진과 트윗은 계속 됐다.
그는 어제 가장 열심히 또 효율적이고 객관적으로 일한 기자였다. 그리고 외국인이다.
아침 9시 30분
아침이 됐다. 여전히 유족들은 길바닥에 앉아있다. 트위터에서는 서촌 주민들이
음식과 음료수와 종이 모자 등을 유족들에게 전달해주고, 또 쉴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경찰과 청와대 측의 대응은 정말 화가 난다.
저 유족들이 어디가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폭력 시위대 취급을 하는가?
일반 시민들을 불법 시위대로 만들어버린 건 경찰과 청와대다.
넓은 청와대 경내에 불러들여서 실내에서 재우기라도 했더라면.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하다못해 자하문로 대로가 아니라 청와대 앞길이나 청와대 앞 광장, 청와대 사랑방에서라도
기다리라 했더라면.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Photo James Pearson, https://twitter.com/pearswick)
교통체증도 문제다. 자하문로는 광화문과 서울 북부를 잇는 도로고, 신교동 사거리는 그 목젖 같은 곳이다.
노선 버스들도 모두 이 길을 지나간다. 양쪽에 인왕산과 북악산으로 막혀 여기 밖엔 길이 없다.
그런데 경찰은 딱 거기에 시위대를 가둬뒀다.
그래서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서촌은 물론 자하문 터널을 지나가야 하는 평창동 일대는 교통 마비다.
아래 지도를 보면 경찰들이 왜 교통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유족들을 자하문로에서 막았는지 짐작이 된다.
자하문로를 막아서 서울 북부 시민들의 교통이야 어려워지든 말든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이 드나드는
효자로(경복궁 옆길)는 보호한 것이다. 그리고 유족들을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눈에 띄지 않게 격리한 것이다.
혹시라도 이 유족들 "때문에" 교통체증이 일어났다고 보도하는 언론이 있다면, 아래의 지도를 한 번 보기 바란다.
과연 그게 유족들의 책임인지, 아니면 굳이 그 위치로 몰아넣은 경찰의 책임인지.
효자로 안쪽으로 50m만 들어가게 해줬어도 오늘과 같은 교통체증과 시민들의 불편은 없었다.
슬픈 일이다. 대체 저 가족들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어젯밤 지켜본 바로는 이 분들은
흥분하지 않고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나름대로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유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지나친 도움이나 참견도 거절했다. 길을 막아버리게 된 것도 경찰이
거기로 유도해서이지 이 분들의 뜻이 아니다.
안그래도 불쌍한 사람들 더 불쌍하게 만든 정부와 경찰, 청와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세월호 윤일병' 카테고리의 다른 글
kbs mbc 기자들 제작거부 사장 물러나라.. (0) | 2014.05.13 |
---|---|
뉴욕 타임지 세월호 광고 (0) | 2014.05.12 |
언딘과 해경 마찰 잠수사 사망 이광욱 참여경위 (0) | 2014.05.10 |
해경 구조할동 (0) | 2014.05.09 |
기자의특권 포기해서 죄송합니다 (0) | 2014.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