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연예

이은하 빛 20억 청산

참도 2011. 8. 28. 14:37

가수 이은하 는 올해 만 50세다. 그녀가 펑키 디스코 '밤차'를 부르며 사방으로 손가락을 찌르던 게 34년 전인 1977년 일이니, 의외로 나이가 적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만 12세에 음반을 내고 데뷔했으며 그때 나이를 세 살 부풀렸었다. 다시 말해 '밤차'를 불렀을 때 그녀는 고작 16세였다. 그녀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발육 상태도 좋지 않아 가슴에 뭔가 잔뜩 넣고 노래를 불렀다"며 "한참 춤을 추며 노래하다 보면 가슴이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온갖 행사를 마다하지 않고 노래하는 이은하는 “처음엔 아무 무대에나 서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었지만 대중가수는 어디라도 무대가 있으면 노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존심을 팔지는 않는다”고 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 [조선일보]나이를 세 살 부풀려가며 12세에 데뷔했던 이은하는 10대 때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20대 말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모든 인생에는 굴곡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녀가 새롭게 재즈에 도전한다. 서울 성북동 스튜디오‘소닉엣지’에서 이은하가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그녀가 지금 생애 처음 재즈 음반을 녹음하고 있다. 햇수로 따지면 2007년 내놓았던 음반 '컴백' 이후 4년 만이지만, 그 음반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버렸다. 그 직전 음반은 1992년 내놓은 '탈출'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약 15년간, 그녀는 한국 대중음악의 스타였다. 어머니가 "하나의 스타가 아니라 별무리가 돼라"며 본명(이효순) 대신 지어준 이름 '은하(銀河)'처럼, 그녀는 수많은 히트곡을 냈다. 그리고 어느 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빠르게 잊어버렸다.

다시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한 그녀를 지난 15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만났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노래만 하던 전성기와 그 이후 닥친 최악의 10년, 그리고 다시 자신을 추슬러 온 10년에 대해 들려주었다.

―어떻게 재즈 음반을 내게 됐습니까.

"3년 전쯤인가.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씨 쇼케이스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분위기가 무척 좋기에 '나도 한 곡 불러보고 싶다'고 부탁해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재즈에 맞춰 불렀어요. 그리고 나서 잊어버렸는데,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프로듀서가 석 달 전쯤 음반을 내자고 연락해왔어요."

이 음반의 프로듀서는 재즈 평론가이면서 음악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를 연출한 남무성(43)씨다. 이 음반에는 그녀의 히트곡 '밤차'와 '봄비',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등 6곡이 재즈로 편곡돼 실리고, '마이 퍼니 발렌타인', '스모크 겟츠 인 유어 아이스' 같은 재즈 스탠더드 곡들까지 총 14곡이 실릴 예정이다. 9월 중엔 발매한다는 계획이다. 한국 재즈의 톱 클래스 연주자인 이정식(색소폰)과 모그(베이스), 양준호(피아노) 등이 참여하고 있다.

―재즈에 관심이 있었나요.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재즈에 두려움이 많았어요. 재즈를 잘 모를뿐더러, 재즈 보컬은 노래를 즉석에서 변형시켜야 하는데 제 창법은 늘 스트레이트한 것이었죠. 그래서 이번 음반에도 제 노래는 창법을 크게 바꾸지 않았어요. 가요는 늘 오리지널과 똑같이 부르는 게 원칙이기도 하고, 제 팬들은 제 노래의 옛날 분위기를 좋아하세요. 그렇지만 외국곡은 최대한 재즈 편곡에 맞게 부를 생각이에요."

―직전 음반은 시쳇말로 망했었죠.

"맞아요. 그 음반 제작에 돈을 5억원이나 들였어요.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안 좋았어요. 돈도 여러 군데로 샜지요. 어쨌든 실패했어요.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죠."

―그러면 새로 음반을 내기 꺼려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재즈였기 때문에 무척 반가웠고… 언젠가 재즈를 해보고 싶었는데 프로듀서가 제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했어요."

이날 이은하는 '미소를 띄우며…'를 매우 단순하게 편곡한 피아노 트리오 반주에 맞춰 녹음했다. 1986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그간 수많은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작곡가 고(故) 장덕의 명곡이다. 이은하는 "얼마 전에도 한 인디 밴드가 '아리송해'를 리메이크하겠다고 해서 더 묻지도 않고 허락해줬다"며 "내 노래를 지금 기억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만 12세에 데뷔했었죠.

"초등학교 5학년 때 '오아시스 레코드'에 찾아갔고 6학년이던 1973년 '님 마중'이 실린 첫 음반을 냈어요. 그리고 그해 가을에 TBC 가요대상 신인가수 후보에 올랐죠."

―나이는 왜 부풀렸나요.

"그때 신인가수 후보에 오르면 주민등록등본을 떼서 내야 했어요. 만 17세 미만은 가수를 할 수 없었나, 그런 게 있었어요. 아마도 야간업소 출입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시 만 16세였던 사촌언니 등본을 일단 내고 그다음 해인가, 겁이 나서 정식으로 호적상 나이를 1958년생으로 바꿨어요. 그때 '58년 무술(戊戌)생 개띠' 하고 외우고 다녔죠. 저는 사실 1961년생이지만 말이죠."

이은하는 2007년 다시 법원에서 생년월일 정정 허락을 받아 본래 나이를 되찾았다. 이때 이름도 본명 '이효순' 대신 '이은하'로 바꿨다. 가수 데뷔하느라고 속였던 나이는 되찾았지만, 스타가 되기 위해 택했던 예명은 지켰다. 데뷔 34년 만에 비로소 공식적인 '이은하'가 된 것이다.

―어떻게 어린 나이에 데뷔하게 됐습니까.

"아버지가 아코디언 연주자셨어요. '새나라쇼'라고, 악극단이라고 해야 되나.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는 팀에 계셨죠. 이미자 선생님 반주도 할 만큼 실력 있는 분이었어요. 아버지가 지방 공연을 데리고 다니면서 '베이비 쇼'라고, 꼬맹이에게 노래시키는 걸 하셨어요. 하춘화 선배님도 '베이비 쇼' 출신이에요. 그래서 얼마 전에 '데뷔 50주년'을 한 거죠. 제가 어렸을 때 곧잘 노래를 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이은하는 서울 홍릉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베이비 쇼'를 그만두게 된다. 어머니가 "애까지 딴따라 시킬 셈이냐"며 아버지를 말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은하의 아버지는 '베이비 쇼'를 그만두지 않았다.

"우리 집이 청량리 133번지 한길가였어요. 학교 갔다 오면 아버지가 길가에 저를 세워놓고 통기타 반주에 맞춰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를 부르게 했어요. 꼬맹이가 얼마나 지겹겠어요. 노래 부르다가 꾸벅꾸벅 졸면 기타로 냅다 머리통을 갈겼죠. 그러다가 기타가 부서지면 또 사오고…. 그걸 보다 못한 동네 어른이 '애 그만 괴롭히고 가능성 있으면 시키고 아니면 때려치우라'고 해서 오아시스레코드를 찾아간 거예요. 아버지는 저를 이미자 선생님처럼 키우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그때 음반을 내준 작곡가 김준규 선생님이 그랬어요. '얘는 이미자가 아니라 제2의 김추자'라고요. 그때부터 김추자 선배님 노래를 부르면서 연습을 했어요."

―열두 살 때 부른 '님 마중'을 들어보면 전혀 초등학생 같지 않습니다.

"변성기가 일찍 왔나 봐요. 그렇지만 '허스키하다'는 얘기를 들은 건 1976년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부터예요. 그때 작곡가(원희명) 선생님이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 노래를 시켰어요. 이 노래가 '하이 C(가온다에서 두 옥타브 위의 '도')'까지 올라가는 노래예요. 나중에는 목이 너무 쓰라려서 침도 못 삼킬 정도가 됐어요. 제가 '저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하니까 선생님이 '한 번만 더 불러보자'고 했죠. 그때 부른 게 음반에 실린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에요. '꺼이꺼이' 할 정도로 목이 쉬어 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제가 열 다섯 살이어서 감정을 못 잡으니까 그 선생님이 머리를 쓴 거예요.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목을 혹사시킨 거죠."

―초등 6학년 때 데뷔했으면 학교는 어떻게 다녔나요.

"그때(1974년) 선화예중이 개교했어요. 그 학교 실기시험에서 가곡 '보리밭'을 불러 합격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대중가수가 되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사실 학교를 다닐 수 없었어요. 지금도 선화예중을 보면 한(恨)이 남아있죠."

―이력을 보면 '경남여고 졸'이라고 돼 있던데요.

"(목소리를 낮추며) 그게 사실은 답십리에 있던 전수학교예요. 사람들은 제가 부산에 있는 경남여고를 나온 걸로 아는데, 서울의 '경남여상'이라는 학교였어요. 무늬만 그 학교 나온 걸로 해놓고, 영어·수학만 집에서 과외로 배웠어요."

―중·고교를 다닌 적이 없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따지면… 그렇죠. 학비는 다 냈어요. 지난번에 나이 되찾을 때 졸업증명서 떼려고 알아보니 학교가 없어졌더라고요. 그리고 나이를 세 살 높였기 때문에 중학교 과정이 날아가 버리기도 했어요."

―부모님은 건강하신가요.

"예. 신당동에 사세요. 어머니가 77세, 아버지가 74세. 우리 집엔 여태껏 경사가 딱 두 번 있었어요. 엄마 칠순잔치, 아빠 칠순잔치. 자식이 저하고 남동생(45) 둘뿐인데 둘 다 결혼도 안 하고 애도 낳은 적 없으니 잔치를 치를 일이 없었죠."

―결혼을 안 한 건….

"하고 싶은데 없어요. 남자가."

―괜한 말씀인 것 같은데요.

"진짜예요. 너무 어려서 가수가 돼서 사회생활을 잘 못했어요. 그리고 남자들이 저를 좀 '센 여자'로 봐요. 뒤에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그래서 저한테 결혼하자고 한 남자가 없었어요."

그러나 이은하에게 청혼했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기타리스트다. 이은하가 스물네 살이던 1985년, 그는 이은하의 아버지를 찾아가 "은하와 결혼하겠습니다"라고 대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톱스타의 아버지는 이 청년의 순정에 재떨이를 휘둘러 내쫓았다. 이은하는 "내 운명이기도 하고, 그 사람과는 인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77년 '밤차'를 발표해서 대히트를 쳤는데, 그 안무는 누가 봐줬습니까.

"그때 누가 안무를 해줘요. 화장도 제가 하고 옷도 제가 사 입고…. 그 춤도 제가 생각해 낸 거예요. 잘 보면 손가락이 아니라 '승리의 V'자를 여기저기 찌르는 거예요. 그 노래가 '멀리/ 기적이 우네' 하고 한참 뜸을 들이잖아요. 그게 어색해서 여기저기 찌른 거죠. 그런데 그해 가을에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밤의 열기'가 국내 개봉했어요. 그 포스터 기억하세요? 존 트라볼타가 손가락을 하늘로 찌르고 있죠. 저도 덩달아 '디스코의 여왕'이 됐어요."

―그리고 얼마 안 돼 혜은이의 '제3한강교'가 나왔죠.

"혜은이 언니하고는 라이벌 관계가 유난했죠. 우리가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언니는 예쁜 가수, 저는 씩씩한 가수. 언니는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죠. 그래서 여자들한테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었어요. 제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었어요."

―두 사람이 라이벌이 되면서 마음고생도 했겠죠.

"저는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TV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안 해주는 거예요. 만날 풀샷(멀리서 찍는 것)이죠. 혜은이 언니는 나왔다 하면 클로즈업해서 얼굴을 보여주는데. 그런데 76년인가 내가 MBC에서 1등 하니까 비로소 얼굴을 가까이 비춰줬어요. 그때 눈물을 펑펑 쏟아서 화장 범벅이 되고…. 그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두 사람은 외모뿐 아니라 음색과 창법도 다른데요.

"분장실에 둘이 같이 있으면 PD들이 와서 혜은이 언니한테 그래요. '우리 혜은이, 밥은 먹었니?' 그리고 저한테는 '이 자식, 또 먹냐?' 간신히 김밥 한 줄 먹고 있는데 말이죠. PD들이 저한테는 만날 이 자식, 저 자식 했어요. 그런데 80년대 들어서 컬러 TV가 생기니까 제 얼굴을 제가 못 봐주겠더라고요. 그래서 17㎏ 다이어트를 했죠."

당시 혜은이에 대한 매스컴의 편애는 신문 스크랩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79년 7월 28일자 동아일보 는 '연예수첩'에서 "이은하가 갖가지 괴상망측한 의상을 입고 나와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고 쓴 반면, 혜은이에 대해서는 "영화 로케이션 촬영지의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디스코 실력을 여지없이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그 뒤에 나온 게 김창완 씨가 프로듀싱한 음반인가요.

"그렇죠.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이 실린 앨범이죠. '가지마오'를 비롯해서 산울림 노래도 여러 곡 불렀고요. 그 음반 어렵게 나왔어요. 제가 음악적으로 욕심이 있어서 김창완씨한테 부탁을 했는데 8개월 만에 곡이 나왔어요. '이은하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곡이 잘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1984년 발매된 이 음반은 재킷 사진부터 이은하의 기존 이미지를 바꾼 작품으로 평가된다. 김창완은 당시 서라벌레코드 문예부장으로 일하면서 '산울림'으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이 음반을 내고 이은하는 그 해 '못다 핀 꽃 한송이'를 부른 김수철 과 함께 남녀 가수왕 자리에 올랐다.

이은하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TBC가 없어질 때, 마지막 쇼에서 너무 울어 한동안 TV 출연을 못하기도 했다. "그때 제가 첫 무대에 나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불렀는데, 객석을 보니까 강부자 선생님과 장미희씨가 울고 있어요. 저도 괜히 눈물이 나서 노래하는 동안 계속 울었죠. 그리고 다음 날 KBS 와 TBC 통폐합 기념쇼에 출연하러 갔더니 담당 PD가 '야, 너는 그렇게 사태파악이 안되냐?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로부터 몇 달간 '그날 운 사람들'은 KBS에 못 나갔어요."

이은하는 1986년 '미소를 띄우며…'를 다시 히트시키지만 그해 가을 정수라의 '난 너에게'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10대 가수에도 끼지 못하는 수모를 겪는다. 1989년 전영록과 함께 '돌이키지 마'가 담긴 음반을 냈으나 이미 이은하의 인기 그래프는 정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89년이면 스물여덟 살이니까 한참 활동해야 할 때인데 내리막길로 들어섰군요.

"그렇죠. 그리고 92년에 우리 아버지가 아주 확 말아 드셨잖아요. 집까지 전부 싹 날리셨어요. 사기꾼들이 아버지를 건설 관련 회사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다 빼먹고 튄 거예요. 그때 저희가 살던 정릉 단독주택이 8억원 정도 했어요. 나무도 많고 연못도 있던 집이죠. 그걸 빚쟁이들이 5억에도 안 쳐주는 거예요. 경매에 넘어가면 사려고. 결국 경매에서 6억7000만원에 낙찰됐어요. 그때 그걸 5억만 쳐줬어도 어떻게든 빚을 막을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밟을 때는 철저하게 밟더라고요. 그때 집에 좋은 나무가 무척 많았는데 저희 엄마가 새 주인한테 '나무값으로 500만원만 쳐달라'고 하니까 '나무 뽑아가세요' 하더래요."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된 겁니까.

"딱 10년 고생했죠. 2002년 12월 31일 모든 은행빚을 청산했으니까요. 이자까지 쳐서 한 20억 넘게 아버지 빚을 제가 갚았죠."

―뭐로 빚을 갚았나요.

"노래해서 갚았지 다른 게 뭐 있겠어요. 밤 업소 나가는 거죠. 그때 제가 서른살인데, 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역삼동 월세방에 살면서 저녁 7시쯤 의정부나 동두천에서 밤무대 일을 시작해요. 그러면 남양주, 청량리 들러서 신림동, 영등포, 인천까지, 하루에 7, 8군데 뛰면 새벽 2~3시쯤 끝나요. 이 생활을 10년 가까이 했어요. 사흘마다 부도수표와 어음이 돌아오는데 정말 정신없더라고요. 새벽에 집에 돌아와 전화 음성녹음기를 틀면 온갖 욕설과 협박이 녹음돼 있고…. 아버지는 창피하니까 두문불출하시고 나는 노래만 불러왔으니까 아는 게 없고…. 정말 약 먹고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많이 했죠."

―열두 살에 데뷔하고 열여섯 살에 최고 스타가 됐으니 절망도 빨리 온 셈이군요.

"너무 어려서 스타가 돼서, 추락하던 그때 기분은 뭐라고 말할 수 없고 정말 감당할 수 없었어요. 제 인생의 시계는 거꾸로 돌았기 때문에 너무 혼란스러웠죠. 시간 낭비도 많이 했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이 산(山)이에요.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큰 산 올라가면 계곡도 깊고, 동산 올라가면 내려갈 때도 완만하고…. 이제서야 그걸 알았죠. 남들처럼 학교생활도 하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요즘도 TV에는 어린아이들투성이잖습니까.

"지금 아이들은 저보다 현명하죠. 그래도 제가 부모라면 어릴 때 연예인 안 시켜요.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정상적으로 나오고 그 다음에 뭘 해야 무슨 어려움이 닥치면 극복할 힘이 있어요. 너무 어려서 가수하고 인기 얻고 그러면 바보가 돼요. 제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안타깝죠."

이은하가 음악 외에 애정을 쏟는 것은 골프다. 구력 30년에 가까운 그녀는 현재 KLPGA 연예인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친 건 10년가량밖에 되지 않는다"며 "승부욕이 없어서 그리 잘 치지는 못하고 보기 플레이 정도 한다"고 말했다.

―지나고 나니 '인기'라는 건 무엇입니까.

"물거품이죠. 신기루예요. 살아보니까 누구나 언젠가는 굴곡을 겪게 돼 있더라고요. 그런데 굴곡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죠. '부모'라는 노래를 보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고 하잖아요. 부모가 돼야 비로소 부모 마음을 아는 거죠. 후배 연예인들 중에 너무 뻣뻣한 애들을 많이 봐요. 그래도 저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지금 말해봐야 못 알아들어요. 연예인들이 어디 가서 대접만 받지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앞으로 10년 뒤를 못 보기 때문에 그래요."

―연예인 인생에 후회가 있습니까.

"아니에요. 어차피 제가 갈 길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저를 보니 '가수 이은하'로 살아온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훨씬 많더라고요. 그리고 지금도 희망이 있잖아요. 노래라는 희망. 한국에서 여자가 이 나이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녹음실에 와 있을 때가 가장 즐거워요. 뭔가 제 역할을 하는 것 같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저도 좀 더 신중하게 돼요. 이 나이에 또 실패하면 안 되니까요."

그녀는 두 번째 인터뷰 날인 22일 2개월 된 닥스훈트 한 마리를 안고 나타나서 "오늘 우리 아들 입양했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강아지 이름을 묻자 "우즈예요. 타이거 우즈"라고 말했다. 은하(銀河)의 강아지로는 '우주(宇宙)'가 더 어울려 보였다.가수 이은하 인터뷰.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취미 > 연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주부들 애인만들기 백태현장  (0) 2011.09.16
SM 이수만 미국 저택  (0) 2011.09.06
한에슬...  (0) 2011.08.17
한예슬 억울해  (0) 2011.08.17
한예슬 사태  (0) 201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