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원은 민주정부 장기집권… 100만 명이면 된다”
(양정철닷컴 / 양정철 / 2011-01-21)
문성근.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개성 강한 연기로 국민들을 울리고 웃긴 배우. 이지적 이미지의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이름을 날리다, 어느 날 노무현 선거에 뛰어들어 강렬한 포스를 남긴 한국의 대표적 현실참여 문화예술인. 자신이 밀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자 아무 덕도 안 보고, 뒤도 안 돌아본 채 은둔에 들어간 결벽증 환자 같은 사람. 이 때문에 방송-영화판에서 ‘신세 망친’ 것으로 알려진 비운의 주인공. 노 대통령 서거 후 자폐생활을 이어가다 1주기 행사 때 눈물의 추모연설로 전국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사람. 따라서 영화나 연극만큼이나 극적인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시민혁명을 주창하며. 무대가 아니라 시장골목을 누비며. 거리극의 제목은 ‘100만 민란 프로젝트,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궁금했습니다. 그만큼 ‘쓴맛’을 봤으면 됐지, 왜 또 사서 고생하는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무모해 보이는 고난의 길로 다시 나섰는지. 14일 안산의 한 시장골목 카페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안산시민들과의 민란행사를 세 시간 앞두고, 그 간의 굴곡 많은 인생과 현재 생각, 앞으로의 삶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2012, 총선서 승리하면 대선도 이긴다”
양정철(이하 양) : 괜찮으세요? 몇 달째 빡빡한 전국순회일정 소화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얼굴이 덜 상했어요.
문성근(이하 문) : 체질인가 봐. 아직 쌩쌩해. (웃음)
양 : 요샌 100만 민란 활동에 거의 올인하고 계시죠. 모르는 분들이 아직 많은 것 같은데 100만 민란 프로젝트가 뭐예요?
문 : 2012년 12월이 대선인데, 4월에 총선이 먼저 있어요. 그래서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대선에 이길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요. 어떻게든 총선을 이겨야 하는데, 지금 야당이 다섯 개, 사회당까지 치면 여섯 개로 분열돼 있는 구조거든요. 이걸 어떻게 극복할 거냐. “지난 6·2선거에서 연대를 했으니까 그 방법으로 가능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6·2선거 경우엔 후보의 층이 네 개란 말이에요. 기초의원, 광역의원, 기초단체장, 광역단체장. 후보는 수천 명. 주고받기가 얼마든지 가능했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에서의 연대는 깨졌어요. 각 지역별로 노력한 거였죠.
그런데 2012년 총선은 국회의원 240개 지구당에서 한 자리를 놓고 모든 정당이 경쟁을 하는 구도거든요. 그러니까 벌써부터 조직 만들고 돈 쓰기 시작하고, ‘왜 내가 되고 저 사람은 안 되는가’ 논리 개발하면서 서로 상처를 주기 시작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 임박해, 어떻게 후보를 조정해 낼 것이냐? 그 방법으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거죠.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은평을’이나 경기도지사같이 선거에 임박해서 후보단일화하는 건데, 방법은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겠죠. 그렇게 되면 최선의 후보가 안 뽑힐 가능성이 커요. 바로 은평을 같은 경우죠.
최선의 후보가 뽑혀도, 선거는 연애 같은 거거든요. 후보자와 유권자가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이에요. 이미 한번 마음을 줘버린 유권자 입장도 있고 당원들 입장도 있죠. 그러니까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탈락하면, 처음에 지지했던 후보만큼 단일화된 후보를 지지하지 않게 돼요. 그게 경기도지사 선거의 경우죠.
양 : 재미있는 메타포네요.
문 : 물론 ‘불리한 점이 있다’ ‘불리한 점을 가지고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어요. 민주당의 변화를 추동해볼 기회를 상실한다는 거예요. 민주당은 지금 반민주적 운영구조를 갖고 있고, 방치하면 그 정당구조의 한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전혀 남지 않아요. 총선을 이기려면 한나라당과 1:1로 맞붙는 최강의 후보를 민주진보진영에서 찾아내야 된다, 그 방법은 결국 같은 정당 안에서 상당한 기간을 두고 경선을 통해서 최강의 후보를 뽑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이 되는 겁니다.
그랬을 때 방법은 정당 지도부 간의 통합인데, 이거는 정당 내부 논리가 있고 기득권이 있어서 안 되는 거죠. 연대가 안 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남는 유일한 방법은 국민 다수가 모여서 국민의 힘으로, 여론의 힘으로, 야 5당을 압박해서, 그들이 국민의 뜻에 복종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야권 단일정당을 만들어서 후보를 단일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양 : ‘취지와 뜻은 좋은데, 현실적으로 그게 되겠느냐?’ 하는 걱정이 많은 게 사실 아닌가요?
문 : 처음에 걱정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첫 번째는 유력한 정치인이 없다, 두 번째는 2012년 선거 일정을 국민들이 잘 모르신다, 대선 전에 총선 있다는 점도 모르신다, (다들 대선 후보만 관심을 갖고 있는데, 전 전혀 없거든요.) 세 번째는 촛불이 붙었다든가 선거라든가 하면 모르는데, 평시체제에서 이런 운동을 어떻게 긴박하게 호소할 거냐, 이런 걱정인 거죠. 그것 때문에 모든 분들이 안 될 것이라는 생각 많이 했어요. 그래서 채택한 방법이 삼보일배입니다. 거리로 나가 바닥부터 불씨를 지피고 전국을 돌았어요. 반응이 오고 느낌이 왔어요. 서서히.
한 전환점이, 우금치 대회였던 것 같아요. 시민사회단체 지도급에 있는 분들도 참관을 많이 왔고 정당관계자도 많이 오셨어요. 일반 시민들도 1500명가량 모이면서 아주 열기를 가지고 진행이 됐지요. 그게 한번 넘어가는 단계였고 그때부터는 ‘이건 됐다’라고 자신했어요.
그는 이 대목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 자신이 만났던 많은 참여자들, 여러 자원 봉사자들의 아름다운 희생과 헌신과 고생을 한참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반응과 체온으로 느낀 민심을 진지하게 설명했습니다.
양 : 가장 첨예한 이해당사자인 현실정당 쪽 입장을 무시할 순 없을 텐데, 각 정당들 반응도 중요하지 않나요?
문 : 민주당의 경우에는 최고위원 세 분(이인영, 천정배, 박주선 최고위원)이 회원으로 들어왔습니다. 김영춘 최고도 같은 의견이라니까, 최고위원 가운데 반이 함께 하는 거죠. 그리고 정치적 비중이 있는 김근태 유인태 원혜영, 이런 원로들이 뜻을 같이해 주셨구요. 지자체장 중에서 김두관 안희정 이광재 지사도 뜻을 함께해 주셨고. 참여당에서 정찬용 고문, 이백만 최고위원, 창조한국당 김서진 전 대표 등도 함께해 주시기로 한 상태예요.
민노당 진보신당은 고민 중이시지요. 두 당도 현장에 계신 분들은 고민 많이 하고 있고, 당 결정을 기다리는 거죠.
양 : 민노당 진보신당은 고민이 더 클 텐데요. 흡수소멸 되는 거 아니냐는….
문 : 오해가 있습니다. 저희 제안대로 가면 당이 흡수 소멸되는 것 아니냐는 거죠.
“당대당 통합 아닌 연합정당, 제1당 가능하다”
양 : 대부분 그렇게 이해할 텐데요.
문 : 아닙니다. 결코 아니에요. 저희 제안을 잘 안 보신 겁니다. 연합정당으로 가자는 거예요. 당론을 강제하지 않는, 합의할 수 있는 만큼만 합의하고 합의 안 되는 거는 정파로서 경쟁하자는 거거든요. 당대당 통합하려는 게 아니에요. 당대당 통합하면 당연히 소멸되죠.
민주당, 민노-진보, 참여당까지 당원 수 차이가 각 당별 거의 10만입니다. 각 당의 대의구조, 논의구조의 한계를 압니다. 그 위험 부담을 안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국민이 모이겠다, 다수가. 다수가 모여서 우선 10만 이상 되면 동수가 된 거 아니냐, 원컨대 각 야당 다 합친 40만 보다 더 모이겠다, 우리는. 50만 100만이 모여서 여기에 들어와 같이 가자는데 왜 소멸되느냐는 겁니다. 저희 안에 대해 동의하는 시민들은 상대적으로 개혁 진보적인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절대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죠.
양 : 그 다음에는요?
문 : 연합정당이 되면 민주적 운영구조로서의 결선투표가 있잖아요? 그러면 결선투표에서 진보적인 분이 통과될 가능성이, 지금 독자존속 할 때보다 훨씬 높아져요. 그러면 당연히 당선 비율도 높아지죠. 이 연합정당 틀로 제1야당이 되자는 겁니다. 그렇게 2012년 4월 총선에서 제1당이 되자, 집권당이 되자, 그래서 진보진영의 복지와 노동을 맡는 정파가 되자, 그러면 지역구도가 완화된다는 얘기고 남북분단이 완화된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러면 발판이 약화되지 않느냐고 하는 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정치는 진보가 돼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진보진영이 결국은 집권당의 소수 정파가 아니라 집권당의 다수 정파까지 갈 수 있죠. 그게 방법 아니겠어요?
민노당이 2012년에 집권목표를 2022년으로 다시 옮겼어요. 지금 구조에서 그런 목표가 되냐 이거에요. 일단 연합정당 해서, 제1공약을 표의 등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 개편으로 걸자, 그렇게 해서 만약에 집권하자마자 선거법 개정에 성공하면 분립하자, 아예. 분립 꼭 해야 하면 하는 거고 안 해도 된다면 그냥 있는 건데, 선거제도 개편이 안 되면 길게 보고 진보가 확산 돼 가는 세월을 두고 한나라당이 3당 될 때 분립하자는 거거든요. 그게 맞는 방법 아니겠어요?
노동자와 빈민의 고통이, 진보정당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걸까요, 아니면 법을 못 고쳐서 고통스러운 걸까요? 법을 못 고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법 고칠 수 있는 다수당 되자는 거예요. 민노당 진보신당 경우도 당내 여론이 조금씩 확산돼 갈 것으로 봐요.
저는 민노당 진보신당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분들의 20년 노력이 보통 일인가요. 그걸 존중하면서 모두가 이기는 좀 더 나은 방법을 제시 드리는 것이에요.
양 : 민란 취지와 방법론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또 힘든 일을 자청하신 거예요?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돼서 묻는 겁니다.
문 : 이 안을 발상한 건 저예요. 처음에 논의한 사람이 이창동, 조기숙, 김창호, 최민희, 김두수 이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안을 대중적으로 알리려면 얼굴이 알려진 제가 하는 수밖에 없었던 거죠. 제 책임감도 있었고. 선거에 출마해본 사람만 아는 아픔일 텐데, 거리에 나갔을 때 시민의 냉대나 무관심이 말이죠. 이게 선거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거리에 나갔을 때 관심 못 끌면 얼마나 마음의 상처고 충격인지 잘 아는데,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민란 발상, 예술적 발상 전환에서 가능”
양 : 발상이 도발적이고 독특한데, 직접 짜 낸 제안이죠?
문 : 안 그래도 누가 물어보던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아, 내가 배우라서 이런 발상을 했구나.’ 싶더라구. 그러니까 배우나 감독은 모든 체제의 무게를 안 느껴요. 뒤집어 보는 거예요. 영화 <웰컴투 동막골> 식의 발상 전환, 영화감독이니까 하는 거지, 그런 상상을 어떻게 해? 체제에 대한 위압을 안 느껴요. 늘 뒤집어 보죠. 심지어 윤리 도덕도 뒤집어보잖아. 영화 <경마장>이나 <너에게 나를 보낸다>도 그랬고. (웃음)
양 : 문화 예술적 상상력에서 나왔단 얘기네요?
문 : 그런 거죠. ‘왜 안 돼? 왜 민주당은 개혁이 안 된다고 생각해. 문제가 뭔데? 25만 당원이 문제야? 그러면 그보다 많은 100만이 모여서 같이 하라고 요구하면 될 거 아니야?’ 그런 발상을 내가 아마 배우라서 그랬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양 : 처음 시작이 힘들었을 텐데요.
문 : 제가 완전히 수공업으로 제안서를 이메일로 뿌렸어요. 제가 거의 컴맹에 가깝기 때문에 이메일 주소를 파일로 받으면 즉시 옮길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걸 모르니까 하나씩 하나씩 입력을 했어요. 돋보기 쓰고 메일 보내는 데만 8시간 걸리고 그랬어요. 눈이 아파가지고. 그러면서 뿌리기 시작해서 한 50명 정도가 공동제안을 했지요. 그러면서 촛불도 집단적으로 만났고. 정치인 팬클럽 쪽 짱들한테도 뿌렸고.
양 : 앞으론 어떻게 해 나갈 생각이세요?
문 : 5만 명 넘어서면서 지금까지 지지한 분들 명단을 공개했어요. 그전에는 시민운동, 시민정치운동이고, 정치인들도 1/n이니까 특별히 우대하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아 덮어두고 있었는데, 공개를 했어요. 그런데 인터넷으로 가입한 분들이 많아서 아직 모르는 분들도 많아요. 1월 말쯤 되면 마이페이지 기능을 둬서, 정치인들께 방 하나씩 드리고, 다른 회원들과 대화도 할 수 있게 해서 확산시켜나가려 합니다.
그다음에, 이 일이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해서 시작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배우 한 사람이 그냥 지른 일’인 듯 생각하는 분들이 계세요. 상당히 정교하게 시작한 것이니만큼 5만 넘어가면서 ‘정책위원회’를 구성했어요. 조기숙 교수가 정책위원장을 맡아서, 정치사 쪽으로 이 운동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을 놓고 심포지엄도 하고요. 그다음부터 각 정당이 합의할 수 있는 최대 공약을 만들어 간다 할까요? 이미 정당들 정책공약 작업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시민생활 정치영역에서 제안할 수 있는 정책을 강화하는 그런 일을 할 계획이지요.
10만이 넘어가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할까 싶어요. 일단 정당들은 당론을 결정하기 어렵잖아요. 대신 각 당마다 동의하는 분들이 계시니까, 동의하는 분들과 시민사회에서 동의하는 분들, 일반 시민들, 이렇게 해서 원탁회의 같은 것을 제안 드릴까 싶어요.
안양교도소 옥중 부자의 기막힌 짧은 만남
양 : 전국을 돌면서 해야 되는 강행군인데 체력은 버틸 만하세요?
문 : 80일 했지요. 어제까지. 처음에는 주 6일을 거리에 나갔어요.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어느 순간 핑계를 노짱(그는 노 대통령을 항상 ‘노짱’이라 부릅니다.)한테 댄 거죠. ‘노짱이 주5일제 도입하지 않았냐. 우리도 주5일제로 민란 하자.’ 저는 몰랐어요.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한 번은 2시간 인터뷰 두 개를 내리 했어요.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샌드위치 먹으면서 강연장 갔어요. 얘기가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아, 인간의 한계가 있는 거구나.’ 느꼈죠.
아주 힘들 때, 마침 아버지(고 문익환 목사님) 묘에 인사드리러 갔었어요. 그때 드는 생각이, ‘왜 아버지는 우리가 면회 갔을 때마다 그렇게 늘 웃으셨나?’
양 : 문익환 목사님이 그러셨나요?
문 : 응. 아버지 얘기 잠깐 하면, 방북사건 공판장에서 내가 법정소란죄로 열흘을 감방에 들어갔었어요. 아버지 갇혀 있는 안양교도소. 그것도 아버지 옆 수감동에. 수감 돼 있는 분들한테 물어봤지. 문 목사 어디 계시냐고. 저기 계시대요. 3미터 높이 담벼락을 단박에 올라갔어요. 마당에 나와 운동하던 여러 수감자들이 도와줘서 그 사람들 등 타고 무단으로 넘어간 거지.
양 : 전설 같은 비화네요. 옥중야사.(웃음)
문 : 간수들이 잡으러 와서 끌려가기 전까지 아주 잠깐, 아버지 방 창문 쇠창살 사이로 얘기를 나눴는데, 찰라의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아. 아버지는 정말 칼같이 방을 정리해 놓고 계셨어요. 깨끗하게. 군대 신참들이 모포 접어 놓은 듯 방 구석구석을. 그리고 거기에 단정하게 누워 계시더라고. 그런데 방에서 우선 노인 냄새가 확 나는 거라. 돌아가신 듯 조용히 누워계신데. 저러다 진짜 가시면 어쩌나 그 걱정이 들었어요. “아버지!” 불렀더니, 못 알아들으셔서 더 크게 불렀어요. 그랬더니 “어” 하고 일어나서 오시는데 얼굴이 시체 같아. 아무 표정이 없어요. 지금도 안 잊혀져. 그런데도 우리가 면회를 가면 언제나 늘 웃으며 “아! 좋아. 염려 없어. 유쾌한 일 있었어.” 맨 날 그러셨거든. 교도소에서 직접 본 모습은 그게 아닌데. 가족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그러신 거였지.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하며 그의 눈에 잠시 눈물이 고였다.) 본인이 지쳤다고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갖고 계셨던 거예요.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나도 이 일 하면서 느껴요. 나 지친다고 얘기 못 하는 상황을….
거짓말이었군요. 처음 얘기는. 사람인 이상, 전국을 돌며, 밤마다 홀로 여관방에서 새우잠을 자며, 날마다 열 시간 이상을 떠들어대며, 사람들 만나 연설하고 설득하는 이 일이 체질인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이 무지막지한 일을. 화제를 돌리고 싶었습니다.
“1주기와 6·2선거 도우며 이대로 안 된다 결심”
양 : 좋은 일이긴 한데, 이제 먹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예요?
문 : 아, 나? 어떻게 먹고 살 거냐? 막걸리를 좋아하니까 대폿집을 만들어볼까 생각도 해봤고. 근데 안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이.(웃음) 생계로 뭔가를 해야 되는데, 일단은 지금은 잊고 가요.
노짱 취임하고 나서 일부러 산에만 다녔어요. 참여정부 5년에 대해서도 일부러 관심 안 갖고, 열린우리당 공중분해부터 막 흘러가는 과정도 솔직히 아무 관심 안 가졌어요. 역사가 이렇게 흘러가나, 참 참담하게 흘러가네, 이렇게만 느꼈지 과정은 전혀 모르고. 그런데 노짱 돌아가신 직후에 다시 공부를 했어요. 어떻게 보면 노짱이 부엉이 바위에 몸을 던짐으로 해서, 포위망이 해체되고 우리 나아갈 길이 뚫린 거잖아요. 어떻게 단결하고 다시 묶어내는가, 늘 그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그래서 서거 직후엔 참여정부 했던 분들 계시니까 그분들께 자꾸 건의만 했지요. “어떻게 뭉칠 거냐?” 건의해도 뭐가 잘 안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선수’들이 안 된다고 하시니 안 되나 보다. 잊어먹고 있었지.
그러다 1주기 행사 때 스피치를 하라는 거야. 그전에는 정치발언 일절 안 하고 살았거든. 서거 직후에도 언론에 아무 코멘트 안 했고. 거절할 수가 있나. 우리 노짱 제사인데. 원고가 왔는데 도저히 못 읽겠더라고. 내 생각이 아니야. 그래서 ‘에이 내가 직접 쓰자!’ 결심했죠. 그걸 쓰느라고 동영상부터 봤어요. 마지막 날(5월23일), 집 나가시는 동영상부터. 글이 써지나. 술 한 잔 마시고, 혼자 대성통곡하다가. 그러고 어쩌고 하면서, 정말 내 마음속 얘기를 담아 스피치하면서 전국을 돌았죠.
전국을 돌며 그 얘기 하면서 서울 할 때쯤 됐을 때, ‘6·2 선거에 뭐라도 해야 되겠구나. 2012년에 이기려면 6·2 지방선거를 이겨야 되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6·2 선거에 지원운동을 다니기로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6월2일 밤에, ‘이제 민란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그의 ‘생고생’이 안쓰러워 화제를 돌렸는데 다시 민란 얘기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이 일에 얼마나 목숨 걸었는지 확연히 보였습니다.
양 : 다시 민란 얘기네요.
문 : 그러네. (웃음) 처음 얘기할 때, 사람들이 생뚱맞다고 하고, 그다음엔 워낙 거대한 규모의 일이니까 잘 안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하고. 제가 “그럼 좋다. 나 혼자 한다. 나 혼자 여의도, 광화문, 민주당사 앞에 천막 치고서라도 한다. 당원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얘기 할란다.” 그렇게 시작을 한 거지요.
처음에는, 무조건 총선에서 이기는 것 중심으로 생각한 거에요. 첫 번째, 지역구도 넘어가야 된다, 부산과 경남에서 다섯 석씩만 먹자, 그러면 천지개벽이다. 두 번째, 20∼30대를 어떻게든 능동하자, 정치에 대단히 관심이 많으면서 정당원이 되지는 않으려고 하는 그들의 이중심리 구조를 어떻게 완화시킬 거냐? 통로를 넓게 해줘야 된다, 그래서 온오프 결합을 생각한 거에요.
여기서 온오프 결합은 세 가지 측면이죠. 하나는 열린우리당의 공중분해가 71년부터 김대중 후보를 돕기 위해서 입당한 분들, 40년 가까이 야당 활동해 온 분들이어서 존중해야 되는 거고, 2000년 이후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시민의 정치참여가 활성화됐는데 이 두 부분을 진성당원제로 무리하게 엮어서 충돌이 생긴 부분이 있다고 봐요. 그거를 어떻게 따로, 그러면서 같이 갈 수 있게 하느냐? 오래된 분들은 오프 정당으로, 새로운 분들은 온 정당으로 따로 또 같이 의사를 합의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면 되거든요. 바꿔 얘기하면 40∼50대 경우는 대세나 정책에 영향받는 사람들이에요.
그다음에 젊은 세대들, 이분들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맛을 충분히 본,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세대이기 때문에 소통의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기존야당같이 촌스럽고 폐쇄적인 구조가 아니라 자유롭고 즐거운 구조가 되지 않는 한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온오프로 하면 그들이 원해서 얼굴 가리고 이름 가리고 직업 가리고 닉네임으로 활동하게 하면 20∼30대도 된다, 온오프로 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의무공천을 하자, 이들의 정책적 요구가 달라졌으니까 그렇게 하면 20∼30대도 되지 않겠나 하는 판단이에요.
그다음으로 진보적 정당과 자유주의정당, 즉 민주당부터 진보신당까지 어떻게 같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걸 연합정당 내 정파로서 경쟁하자, 이런 식으로 하면 다 같이 갈 수 있지 않겠느냐, 이 세 가지가 엮어져야 선거에 승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제안서를 꾸리기 시작했어요.
양 : 민란의 출발지점은 노 대통령이시네요.
문 : 노짱이 당일 아침 집을 나가시는 마지막 동영상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봤어요. 그 독한 결심 한 양반이 전경한테 고개 숙여 인사하시고, 마지막 집 나가면서 집 앞에 잡초 뽑고, 참…. 그 풀 뽑는 모습이 나는 기가 막힌 거예요. 그리고 몸을 던지시고 거기에 묻히셨는데 내가 배우를 한다는 게 무슨 지랄이냐, 한마디로 지랄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아버지 얘기에 이어 또 한 번 눈물을 글썽였다.) 그 지랄이 알게 모르게 굉장히 저에게 강박이 돼 있었던 거에요. 노짱 돌아가시기 전까진, (나도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무대에) 복귀하려고 발버둥을 친 거죠. 예전 같으면 절대로 안 했을 영화들을 막 했어. 하자는 대로 다. 왜? 난 배우여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나를 엄청나게 발목을 잡아서 꼼짝 못하게 하는 족쇄라는 거를 깨달은 거죠. 그 순간에. 이 양반은 돌아가시고 묻혔다. 여기. 너는 뭔데? 배우가 뭔데? 그 생각이 든 거죠. 서거 직후엔 참여정부 하셨던 분들에게 제안을 드렸는데 그게 무산돼서 그냥 손을 놓았다가 1년 지나서 생각해 보니까 ‘제안할 사람이 마땅히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 정파가 있으니까. 만약 나도 입각을 했었거나 출마를 했었으면, 나도 어떤 정파에 들어가 있거나 또는 내가 정파를 만들었거나, 내 성격상 어떤 정파에 속했겠지요. 그러면 이 제안을 못 했겠죠. 결과적으로 참여정부 5년 동안 산만 다니고 있었던 게 무지하게 고마워진 거에요. (웃음)
양 : 화제를 돌려볼까요? 노 대통령하고 처음 인연은 어떻게 시작이 됐나요?
문 : 5공 청문회 때 ‘멋있다.’라고 느꼈었죠. 아버지 방북사건 직후에 변호인단이 구성됐는데, 다 평민당 분들이야. 모양새가 너무 안 좋은 거라. 그래서 통일민주당 쪽에서도 누가 있으면 좋겠는데, 노무현 의원이면 해 줄 것 같아. 그래서 갔죠. 그랬더니 굉장히 활달하고 에너지가 보통 넘치는 게 아니더라고. 조용히 말씀드렸어. 이리이리 돼서, 모양새도 안 좋고 그래서, 좀 변호인단을 맡아 주실 수 있을까 싶어서 왔습니다, 했죠. 그랬더니 단번에 “아! 합시다.” 그러시네.
두 번째는 92년 대선에 여의도 SBS 지하 커피숍으로 임채정, 이해찬, 노무현 이렇게 세분이 오셨던 것 같아. 나보고 대선 운동 같이하자고. 나는 안 한다고 그랬더니 노무현 의원이 뭐라고 하셨냐면 “나도 청문회 때 인기를 누려봤는데 그거 별거 아닙디다. 그리고 할 때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굉장히 거칠게, 거친 게 아니라 특유의 팍팍 지르는 말투로.
양 : 노 대통령 선거엔 어떻게 뛰어들게 됐나요?
문 : 노사모는 명계남이 먼저 시작했지. 나, 명계남, 이창동, 정지영 감독 넷 다 일산 살았거든요. 넷이 같은 차 타고 들어오며 얘기 나누는 일이 많았어요. 한 번은 넷이 차에서 얘기 나누다 자연히 “다음 대통령은 누구냐?” 했는데, 넷 다 동시에 “노무현!” 이리됐네. 하여튼 2002년 대선 전 총선에서 386들 격려한다고 처음으로 유세장 갔다가, 생각지도 않게 연단 가서 인사까지 하게 됐어요. 나중에 대선 앞두고 명계남이가 “이제 너도 같이할 때 됐다. 들어와야 된다.” 그래요. 그래서 “그러면 시작하자.” 된 거죠. 그런데 그때는 제가 연설을 하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죠. 근데 부산에 무슨 노 후보 행사에서 명계남이가 사회를 보면서 다짜고짜 그냥 불러올린 거야. 연단에. 깜짝 놀라 뛰어나가면서 생각을 한 거에요. ‘짧게 무슨 얘기를 하나.’ 내가 길게 얘기할 수 없는 거잖아요. 짧게 뭐를 얘기했는데 그게 괜찮더라고. 그다음부터 계속…. (웃음)
“노무현의 눈물은 우연한 상황들의 만남, 그였기에 가능”
양 : 2002년 대선 때 그 유명한 ‘노무현의 눈물’을 흘리게 한 명연설의 장본인인데, 피를 토하듯 절규했던 당시 심경은 어땠어요?
문 : 근데 나는 그 연설이 그렇게까지 될 줄은 정말 몰랐죠. 선거 때, 나한테 계속 연설을 시켜요. 계속 했지. 한 번은 젊은 참모들이 “386들을 울릴 수 있는 명연설을 준비해 주세요.” 그러네. 2주 동안 무지 열심히 원고 썼어요. 그 연설을 여기저기 다니며 오래 했죠. 관심이 된 연설은 우연적 상황이 많아. 심혈을 기울인 기존 연설에 몇 가지를 추가했어요. ‘농부가 밭을 탓하지 않는다’, 유시민 씨가 연세대에 가 강연하면서 썼던 ‘찢어진 깃발’ 이런 표현 넣고. 그러고 그날 행사장 갔는데 행사가 늦어진 거야. 원래 내가 먼저 해야 되는데 노 후보가 와 버렸어. 그리고 후보가 30,40분을 얘기를 해버리신 거예요. 그분 얘기하는 동안에 “에이 이거 하지 말까?” 했는데 참모들이 그냥 가재요. 그래서 “노무현 후보는 담담하다고 말하지만 그 뒤엔 피눈물이 흐르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 이런 표현 써서 하는데, 내 심경과 느낌에 최선을 다했지만, 사실 그냥 한 거에요. 원래, 전에 하기로 한 거고, 주요 내용은 거의 두 주 동안 계속 했던 내용이기 때문에 실제로 다 외운 거나 마찬가지고. 현장에서 들어갔던 말은 느낌이죠. 심경이었고. 그런데 노 후보는 당신의 정치생애를 주욱 반추하면서 그냥 눈물이 흘렀나 봐요.
눈물 흘리는 장면도 우연히 포착된 거야. 그때 한 친구가 늘 같이 다니며 영상을 찍었는데, 그 카메라도 내가 사줬어요. 캠프에 돈이 없으니 카메라를 안 사줘서 어떡해. 내 돈 거금 750만 원 들여서. 큰돈이지. 걔가 그거를 들고 다니며 찍었는데, 원래 나를 찍고 있다가 노짱 우시는 건 알지도 못했어. 그런데 나를 찍는데 뒤가 땡기더래. 지금 노 후보는 어떤 표정일까 하고 싹 돌려보니까 노짱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거야. 그래서 눈물 주르륵 흐르는 게 잡힌 거야. 마침 그때 <오마이뉴스>도 찍었거든. 그 장면을 잡았어요. 걔가 찍은 것과 <오마이뉴스>가 찍은 거를 같이 합하니 전체가 살아있는 거지. <오마이뉴스> 영상 없었으면, 그다음에 한나라당에서 ‘그 눈물 가짜다’ ‘CG다’ 그랬는데 다행이었죠. 이러는 바람에 그 연설 영상이 당시까지 인터넷 사상 최대 클릭을 기록하게 됐죠.
양 : 노 대통령 당선되시고 나서 아무 덕 본 것도 없이,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친노’ 딱지가 붙어서 부담은 커지고 힘든 길을 걷게 됐죠?
문 : 그렇게 됐지만 어쩌겠어요. <인물현대사>라는 프로를 KBS에서 하는데, 그때까지 내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서는 가장 평가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 진행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내부에 복잡한 문제가 있는지 몰랐어요. 갈등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게 말썽이 되는 걸 보면서 ‘아, 뭘 해도 말썽이구나. 활동을 하면 그거 자체가 조선일보의 씹히는 소재다. 명계남 연극한다고 노짱이 구경 간 것조차 씹고. 뭘 해도 씹히니까 부담이 되겠구나. 내가 언론에 안 비치는 게 낫겠다. 그게 노짱 돕는 거다.’ 그래서 그냥 산으로 가버렸어요. 5년 내내 산만 다녔어요. 지금 와서는 ‘아, 그건 잘못 됐구나’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어찌 됐든 부담이 안 되려고 빠졌던 거죠.
“노짱과는 부엉이 바위 등반이 마지막…. 아, 부엉이 바위”
▲ 2010년 5월 23일 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모공연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문성근 ⓒ오마이뉴스 |
양 : 대통령 마지막으로 뵌 게 밀양이었죠? 돌아가시기 전에. 밀양연극제였나요?
문 : 네. 퇴임 후 봉하에서 밀양으로 밀양연극제 공연 보러 가신다고, 나하고 이창동 같이 올 수 있냐고 해요. 그래서 갔죠. 같이 연극 보고 식사하고, 봉하 사저에 가서 맥주 한잔했어요. 그런데 뭔 놈의 집이, 편하게 둘러앉아 술 한잔할 공간이 없어. 그 양반 서재 겸 손님 맞는 탁자에서 마시는데, 이게 술 맛이 나나. 무슨 회의테이블 앉아서 맥주 마시려니까 되게 어색하데, 그거. 그래서 속으로 ‘이 **들아, 이걸 아방궁이라고 했냐?’ 냅다 욕을 했지요.
그때 내게 정치를 한 번 해보라고 하시대요. 그래서 “저는 못합니다.” 얘기를 드렸죠. 그러고 나서 그 주제는 넘어간 거고.
그 다음 날 아침에 산에 같이 올라가자고 하셔서 갔어요. 그리고 부엉이 바위에 같이 올랐어요. 부엉이 바위 올라갔을 때 나는 좀 좋은 등산화를 신었었는데 노짱은 등산화가 아주 부실하더라고. 싼 거. 나는 내 등산화 자랑한다고 바위 끝에 바짝 가서 아래쪽 내려다보니까 노짱이 “그거 불안하게 왜 자꾸 거기까지 갑니까?” 그러세요. 그래서 “아, 제 신발 좋은 거에요. 비싼 등산화라 괜찮아요. 안 미끄러집니다.” 했더니 “그래도 그렇지, 사람 불안하게.” 이러세요. 그분 돌아가시고 자꾸 그때가 떠올라서…. 무슨 결심을 그리 독하게 하셨는지….
양 : 노 대통령 돌아가시고 상당히 힘들었죠? 고통도 남다르고….
문 : 난 잘 잊어버려요. 배우라서 한번 작품 하고 나면 과거가 잊혀지는 거에요. 사실 23일은 경황 없이 내려갔지요. 봉하 갔더니 노사모 사람들하고 모인 사람들이 많이 격앙돼 있고, 왜곡보도 때문에 상태가 안 좋더라구요. 그래서 “안 된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 상황 정리하고 말리느라고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갔다가 다음날 내가 SBS <자명고> 녹화가 있어 밤에 출발했어요. 새벽에 도착해서 겨우 한두 시간 자고 아침에 촬영을 갔는데 촬영을 못하겠는 거야. 두 문장이 연결이 안 돼. 도저히….
힘들어했습니다. 다시 화제를 돌렸습니다.
양 : 아버지 고 문익환 목사님, 형님인 연출가 고 문호근 선생, 그리고 문성근. 집안의 세 사람 다 반독재 통일운동, 공연예술, 연극-영화 각 영역에서 일가를 이루신 분들이고, 셋 다 대한민국 진보운동의 상징적인 족적을 남기신 거 같아요. 집안에 어떤 저항적 DNA 같은 게 있다고 보나요?
문 : 아무래도 가정에서의 여러 것들이 영향을 미쳤지 싶어요. 할머니가 아버지 어렸을 때 베개에 직접 태극기를 수를 놓아 그걸 베고 자게 하셨대요. 목사가 되신 것도 독립운동 때문이고. 아버지 어렸을 때 민족운동가 이동희 선생이 오셔서 “독립운동을 하려면 목사가 제일 좋은 직업이다, 기독교라는 데 의탁할 수가 있고, 국민들을 1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얘기하면서 민족의식 고취할 수 있다”고. 그래서 목사를 하게 되셨답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늘 기도하시는 내용이 나라 걱정이었고. 아버지가 윤동주 시인과 함께 광명중학교 다녔는데, 어느 날 선배들이 와서 시국강연 한다고 다 모이라고 해서 갔더니 졸업생들이 와서 출세하려면 일본 군관학교를 가야 된다고 주장했대요. 그때 군관학교 간 선배 동료 후배들이 5·16의 한 축으로 나오는 거에요. 출세하려고 일본 군관학교 간 애들이 5·16 주체세력으로 나왔으니. 그전엔 아버지가 휴전협정 할 때 통역관을 했는데, 그때 남쪽 협상대표로 나간 사람이 한국말을 못 했다는 거라. 장성이 일본말만 했다는 거지. 그런 얘기를 어려서부터 계속들은 거지요. 그런 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아버지뿐 아니라 박형규 목사님, 김관석 목사님 이런 분들 보면 그 아들들이 다 감방에 갔어요.
나는 무서워서 못 가겠더라구. 인간 같지가 않아요. 아버지 하시는 게. 근데 나중에 안 거지. “윤동주 죽여, 장준하 죽여, 이젠 내가 죽을 차례야, 나도 죽여라” 그러시는데 그게 무슨 협박이 되겠어. 그런 사람한테. 그런 삶을 사셨어요. 나는 그 경지가 도저히 안 되는 경지였고, 못 했던 거고.
내가 왜 노 후보 도운 지 아세요. 그의 인간적인 매력, 그가 단 한 장의 필승카드였다는 것도 있지만 내 가족사도 있어요. 그 존경하는 아버지도 87년 대선에서 양김 분열을 극복 못했잖아요. 나는 그 책임을 느껴요. 물론 당시 민주화 운동 진영 안에서의 절차를 밟았지만, 어찌 됐든 과제를 남긴 거잖아요. 사실은 (아버지 대신) 속죄한다는 마음으로….
양 : 아버지로서의 문익환 목사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문 : ‘문익꽝’이잖아요, 별명이. 굉장히 원칙주의자였고, 팍팍했고, 굉장히 단호했고, 고집 세고. 그런 분인데, 딱 결정하는 순간부턴 목숨을 던지는 거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돼 버린 건데. 엄혹한 탄압국면에서 부단히 자기를 열고,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이었고, 굉장히 단호한데, 우리한테는 완벽한 자유를 보장해줬어요. 자식들한테는. 다 마음대로 살도록.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았고, ‘네가 네 인생 개척하라’고 그냥 맡겨 두셨어요.
양 :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보면, 본인은 지금 어떤 아버지인가요?
문 : 개판이지, 뭐.(웃음) 일종의 자기비판이 될 수 있는데, 가정을 잘 유지해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엑스와이프나 아이들에게 무지하게 미안해요. 그리고 헤어졌지만 엑스와이프나 아이들한테 아빠로 할 수 있는 거를 해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최선을 다했다 라고는 생각은 하는데, 헤어진, 헤어지게 된 것, 유지 못 한 것, 이것에 대해서 무지무지하게 미안하죠.
양 : 문익환 목사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있나요?
문 :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처음부터 자유를 줬고 엄마가 규율을 잡으려고 그랬다 할까? 그런 부분은 좀 있고.
양 : 배우의 길로 접어들게 된 건 어떤 배경인가요? 서강대 졸업하고 취직해서 직장 다니다가 배우의 길엔 늦게 접어들었죠?
문 : 처음에 시작한 건, 형들이 대학교 때 연극을 했기 때문에 ‘나도 대학가면 그냥 하나보다’ 생각 없이 시작했던 거고. 졸업할 때는 연기자로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한 직장생활 5년쯤 지나면서 인생의 끝이 보였어요. ‘큰 기계의 작은 부품으로 마모돼서 결국 버려질 것이다, 이러지 말고 망하더라도 내가 결정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다가, 망해도 내가 망하자.’ 이런 생각으로 거의 만용에 가까운 결정을 했어요. 배우들 들여다보면, 천부적인 배우가 있고 후천적으로 노력하는 배우가 있고 그래요. 노력하는 배우도 DNA 연기자 감정이 찍혀 있어야 되는 거지. 아예 없으면 안 되는 거고. 나는 DNA가 한 80점쯤 된다고 할까? 아버지가 예술적인 분이고, 삼촌도 그렇고, 집안에 그런 내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아예 타고난 연기자는 아니고 뭐랄까 집안의 배경이랄까.
양 : 그러면 본인의 타고난 일정한 재능 플러스 스스로의 노력?
문 : 나는 한 80점 되는 것에, 부단히 노력해서 좋은 연기자가 되려고 노력해온 사람이고, 그런 게 불행히도 전성기라고 그럴까, (작품을) 무지하게 많이 했던 90년대 중후반 때엔 깨치지 못한 부분이 있었어요. 그 후에 오더라고. 지금은 굉장히 편안하고 연기가 즐겁고 잘 할 수 있고 그렇죠.
“해야 될 일이어서 하지만 연기할 때가 행복”
양 : 지금은 배우의 길을 접은 겁니까? 아니면 한국 정치를 바꾸기 위한 일로 인해 잠시 접어두신 겁니까?
문 : ‘일단은 잠시 접는다’ 하고 접는 거에요. 이를테면 정치참여 이 부분은 바람직한 일이고 실제 현실정치를 해 주는 분들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해요. 사실 정치를 백안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잘못된 거라고 보고,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응원하고 그러죠. 그런데 이런 삶 자체가 행복해 보이진 않아요. 지금 내가 하는 일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연기하는 게 행복하고,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즐거운 게 아니기 때문에 즐겁게 정치를 할 수가 없는 거지. 대신 2002년에는 그런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직업을 안 바꾼다고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직업을 안 바꾸겠다고 미리 약속할 생각이 없는 거에요. 내 자유니까. 그냥 상황을 보자, 상황을 보고 열어두는 건데…. 행복하진 않아요. 행복한 건 여전히 연기죠.
양 : 배우로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이나 배역은 어떤 건가요?
문 : <경마장 가는 길>이 제일 기억에 남는데, 그런 류의 영화가 처음이었고. 아쉬운 거는, 지금 하면 기가 막히게 할 텐데 라는 아쉬움? (웃음) 참 재밌는 영화였는데 그때 내가 연기를 충분히 해내지 못한 게 제일 아쉽지요. 그 이후 영화는 지금 해도 비슷하게 할 것 같아요. 그다지 (연기가) 많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데. 특히<오! 수정> 이때부터는 껍질이 많이 벗겨졌기 때문에, 그때 이후 영화는 지금 해도 다 똑같이 할 것 같아.
양 :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 가운데, 저 역할이나 저 작품은 내가 했으면 참 잘 했을 것 같다는 게 있나요? 혹시 <시크릿가든>의 현빈 역? 크크.
문 : 요새 안 봐서.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고, 전혀 못 보고 있어서 몰라요. 영화도 요새 거의 못 봤어요. <부당거래> 본 이후에 못 봐서. 이제 뭐, 아예 잊고 살지요.
양 : 가려지지 않는 진실논쟁 하나가 있어요. 문성근과 명계남, 누가 더 연기를 잘한다고 봅니까? (웃음) 명계남 선배는 자기가 몇 수 위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시던데.
문 : 연기는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 평가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양 : 겸손인가요, 무시인가요?
문 : 74년에 걔를 처음 만났는데, 그때 걔는 연희극회의 기둥 배우였고 나도 서강극회에 기둥 배우였어요. 근데 걔 하는 거 보고 경탄을 했었어요. ‘어떻게 저렇게 힘이 있게 카리스마를 갖고 할 수 있을까’ 거기다가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늙었을까’ ‘애가 저렇게 험상궂나’ ‘천상 배우구나’ 그런 경탄을 했었죠. 나는 굉장히 순진한 사람이었고. 걔는 뭐 거의 경험 많은 배우들 같은 노숙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웃음)
양 :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출마 권유를 많이 받았고 노 대통령께서도 생전에 출마권유를 하셨는데, 일종의 시민적 영역으로 이 캠페인과 운동을 하고 계시지만 직접 나가서 정치해본다는 생각은 가져보신 적이 없나요?
문 : 그거는, 두고 있는 거에요. 행복하지 않다, 가급적 안 하면 좋은 거고. 이 운동과 야권 단일정당문제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변화될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기 때문에 그냥 열어두고 있는 거지요.
양 : 지금 몰입해 있는 이 일이 아니면 평소 낙이 뭐에요?
문 : 산 다니고, 촬영하고, 친구들하고 막걸리 마시고 그런 거지요. 책은 그다지 잘 안 읽어요. 종종 읽지만. 왜냐하면 배우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손해예요. 먼저 생각하게 돼. 느껴야 되는데. 소설집이나 시집을 읽는 건 괜찮은데.
양 : 상상력을 자극하는 콘텐츠 쪽으로 가면 좋다는 거지요?
문 : 그렇게 가야지. 경제학 이런 거 읽는 거 안 좋아요.
“하도 힘들어 살이 안 찌니 원 없이 먹을 수 있어 행복”
양 : 배우가 된 이후 평생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하나요?
문 : 네. 그런데 이거 시작하면서부터 아무거나 먹어도 활동량이 많아서 체중이 늘지 않아요. 요새 삼겹살, 피자, 막 먹습니다.
양 : 먹는 걸로만 따지면 가장 행복한 시기네요.
문 : 가장 행복해. 아무것도 안 가려.
양 :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 노무현의 동지 문성근이 아니었다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문 : 한 가정의 가장으로, 좀 막사는 배우 하고 있겠죠.
양 : 우리가 흔히 보는?
문 : 예.
양 : 다음 목표나 소망이 뭔가요?
문 : 민주정부가 장기집권 하는 거에요. 이 운동이 성공하고 틀거리를 만들어 야권 단일정당을 창출하고, 2012년 선거 후에, 시민정치운동으로 남겠다는 지금 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서 전국 네트워크를 만들어보는 거에요. 그렇게 하는 것이 장기집권의 길을 여는 거라고 생각해요. 장기집권이 되면, 나는 편안하게 연기하면서 노는 게 제일 좋죠.
양 : 먼 훗날, 사람들이 문성근에 대해서 평가할 때 명배우로 남기를 원합니까, 한국정치를 굉장히 의미 있게 바꾼 보람 있는 운동가로 평가받기를 원하십니까?
문 : ‘열심히 살았던 사람’ 정도지.
양 : 긴 시간 진솔한 말씀 고맙습니다.
인터뷰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안 끝났습니다. 현직 기자 때 포함해서 꽤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인터뷰 요청은 제가 했는데, 그는 할 말이 남았다며 얘기를 더 하자고 했습니다. 제가 성의없는 인터뷰어였나 싶을 만큼 미안했습니다. 평소 그는 말이 많거나 얘기를 길게 하는 스타일이 결코 아닙니다. 늘 사양하는 스타일입니다. 민란에 대해 못다 한 얘기가 남았던 겁니다. 왜 민란인지를 말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노무현 대통령 선거유세 때 보여줬던 그 열정 그대로였습니다.
“정치는 연애… 연대해 잘할 수 있다는 진정성부터 보여줘야!”
▲ 2010년 11월 3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야권단일정당 창출을 위한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문성근 대표, 여균동 공동집행위원장, 최교진 공동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2만명 돌파 민란콘서트 <우금치 다시 살아> 기자회견이 열렸다. ⓒ오마이뉴스 |
문 : 요새 자꾸 ‘정치는 연애다’ 하는 느낌이 들어요. 시민들은 뭔가 정치적인 변화를 요구하시는 거지요. 정치는 연애라는 게, 마음을 서로 주고받아야 돼. 마음이 열려야 서로 소통이 되고 이러는 건데. 스님들 삼천 배 하는 그런 심정으로 하게 돼요. 왜 그런 생각이 드냐면,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우리 시민은 존중받고 싶다, 위로받아야 된다, 그동안 정치권이 국민을 너무 고문해왔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국민의 심리상태가 뭐냐면요. 배우는 인물을 연기하려면 그 사람 특징 하나를 딱 잡아. 그걸 문고리로 잡고 문을 열고 들어가. 문고리라는 말은 이창동 표현이에요. 많은 국민들이 왜 이명박을 선택했냐? 그러니까 민주정부 10년 동안 평가받을 참 좋은 일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만족시키지 못 했어요. 이유야 어찌 됐든 불만족 상태에서 화도 많이 났고, 그래서 홱 돌아앉았지만 이명박 하고 연애하는 건 아니에요. 이명박이 돈을 벌게 해 주겠다, 집값을 올려주겠다고 하니까 그냥 다 찍었어요. 다 놓아버린 거죠. 정의, 도덕, 이런 거 놓아버렸다고.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보니까, 아주 개차반이거든. 완전히. 돈 벌게 해 준다는 것도 아니야. 그랬을 때 국민들 심리상태는 뭐겠어요. 나는 그걸 ‘욕망을 택했던 것에 민망함, 허망함’이라고 봐요. 그렇다고 민주 정부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야. 그때는 굉장히 짜증이 났었고 그래서 돌아섰던 것이니까.
그러니까 국민들의 이 상태가 어떤 거냐면, 속이 다 빠져나가고 넋이 다 빠져나간 허망한 상태라는 거죠. 거기다 노 대통령은 바위에서 몸을 던졌단 말이에요. 그러고 나니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경제를 잘했다’가 15에서 60이 됐잖아요. 45%의 국민이 속았다는 걸 안 거야. 그래서 고개를 돌려서 이쪽으로 돌려보는? 한 번씩, 이제 보는 거야. 다시. 미안한 부분도 있어요. 노무현에 대해서. 그렇게 욕했던 게. 그래서 6·2선거에서 그렇게 표현해 준거죠. 근데 아직 옛날처럼 돌아앉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실망했었고 화가 났던 게 다 풀린 게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조금 미안한 건 있어. 그러나 ‘너희들 잘못했어. 왜 나를 실망시켰냐’ 이거거든요.
지금 민주진영은 뭐를 해야 되겠어요. 국민들이 정치인에게 다가와서 “미안해, 내가 오해 했어” 이렇게 얘기할 리는 없는 거에요. 그러면 이쪽이 다가가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잘할게요.” 이 얘기를 해야 되거든요. 돌아선 애인, 연인이에요. 그런데 가서 그들에게 지금 뭐 어쩌고저쩌고 정책 얘기하는 건 뭐냐면 “우리가 결혼하면 내가 어떻게 해 줄 게”로 얘기하는 거야. 결혼할 생각이 아직 없는데. 소용없어요. 정책은 말짱 꽝이야. 마음으로 다가가야 돼요. 다가가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달라졌습니다. 옛날하고 달라졌습니다.” 라는 거를 확인을 시켜 드려야 돼요.
속이 빠져나가고 넋이 다 빠져나간 사람한테 가서 “야, 이런 게 낫지 않냐? 야, 민주정부 10년 동안 소득을 이렇게 높였어. 4.5% 성장했어. 이명박은 3.2%잖아. 우리가 더 잘 했잖아.”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들어요. 이걸 채워 드려야 돼. 허망함을. 그러려면 우리가 믿음직한 상대가 되어야 해요. 믿음직한 상대가 된다는 거는, 정책적으로 다시 반성하는 부분도 있지만, 자세가 달라야 돼요. 그 자세의 핵심이 뭐냐. 한나라당을 보자 이거야. 쟤네들은 사찰을 해도 안 깨져요. 집권하니까 4대 권력기관을 휘둘러서 개차반을 만들어요. 조중동, 뉴라이트, 다 뭉쳐서 완벽한 철옹성 동맹구조를 만들고 있어요.
우리 민주정당 10년 돌아보자 이거야. 열린우리당, 참여정부를 지지고 볶았어요. 진보정당은 신자유주의라고 욕했어요. 국민들이 볼 때는 그게 그건데. 시민사회단체는 정치 중립이래. 자기네가 주장하는 정책 들어주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죽어라 해서 60점 정도 하면 신자유주의라고 욕했잖아요. 시민들은 뽑아놓고 손 놓았어요. 갈기갈기 찢겨진 거야. 이렇게 갈라진 상태에서 우리가 국민들에게 “우리, 잘 할게요?” “뭘 어떻게 잘할 건데?” “정책이요.” “너희들부터 봐. 이놈들아. 너희들이 하는 얘기를 어떻게 믿으라고. 또 지지고 볶을 거지? 쟤네들 봐. 쟤네들 저렇게 똘똘 뭉쳐 하는데 너희들 어떻게 믿어. 어떻게 믿고 마음을 다시 열란 말이야.” 이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정말 잘 할게요” 라고 빌어야 돼. 거리에 나가서 빌어야 돼. 빌면서 “우리가 달라질 겁니다.” “뭐가 달라질 건데?” “뭉칠게요. 믿음직한 상대가 돼 드릴게요” 그걸 하자 이거야, 지금. 민란을 통해서.
열변이 길어지면서 그는 시간에 쫓겼습니다. 국밥 한 그릇 대충 먹고 행사장으로 내달리는 그를 뒷모습으로 배웅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리 바쁘게, 살얼음의 거리로 서둘러 내달리게 할까요. 그는 오랜 기간, 매 시대, 모든 무대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이든, 다른 사람의 조연이든. 그런데 너무 오랜 기간, 시대에 가장 정직했던 명배우를 우리는 너무 혼자 있게 한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지금 모두가 그의 말에 한 번은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할 이유입니다.
양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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