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M&A시장 달구는 '창업자 은퇴'
중소·중견기업 인수합병 역대 최대
60대 이상 창업주 "자식들이 경영 꺼리니 팔 수 밖에.."
실탄 풍부한 PEF·승계 마친 기업들, 알짜 매물들 사들여
'경영권 승계' 관심 없는 2·3세들
업종 1위 기업까지 매물로
이달 초 중소 제조사 A사의 사장은 회사 지분 70%를 사모펀드(PEF)에 600억원에 매각했다.
해외 유학파인 외동딸에게 경영권보다는 현금을 쥐여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다.
자동자 부품업체인 B사도 올해 초 팔렸다.
서울에 거주하는 아들이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지방 공장으로 출퇴근하다가
더 이상 못 하겠다며 두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중소·중견기업의 인수합병(M&A)이 올 들어 역대 최대 규모에 달하고 있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데다 제조업 경영 환경이 악화된 데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M&A 시장 호황으로 제값을 쳐줄 때 파는 게 낫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한국경제신문 마켓인사이트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대기업 계열사와 구조조정
매물 등을 제외한 개인 대주주 기업의 매각 사례는 36건으로 집계됐다.
조사를 시작한 2012년 이후 반기 기준 최고치다.
올 하반기 들어서도 가구 1위 한샘, 세탁서비스 1위 크린토피아 등 굵직한 회사가 잇따라 매물로 등장했다.
시중에 나온 개인 대주주 기업 매물이 20여 건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연간 최고치였던
2019년의 51건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중견기업의 ‘큰 장’이 서자 대형 회계법인과 PEF 등은 1980~1990년대 창업한
중소·중견기업을 공략하는 별도 팀을 꾸려 대응하고 있다.
한 PEF 대표는 “최근 M&A 매물의 절반 이상은 이런 기업들”이라며 “풍부한 실탄을 갖춘 PEF,
승계를 마치고 도약을 노리는 또 다른 중견기업 등이 사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회계법인 M&A 자문 본부장은 “주 52시간 근로제, 중대재해처벌법 등 경영 관련 규제 강도가
세지고 코로나19로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중소기업의 경영 기피 현상이 더 심화됐다”며
“영세 중소기업은 후계구도가 흔들리자 아예 자산을 팔고 휴·폐업 절차를 밟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자산거래 중고장터에 나온 중고 기계·설비 매물은 올해 상반기
735건으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였던 지난해 기록(601건)을 훌쩍 넘어섰다.
중견기업 대주주 지분 매각 올 상반기 36건 '최대'
유학파 외동딸·공학박사 아들…기업경영 적성 안맞아 '손사래'
공학박사 출신인 아들은 경영권 승계를 거부하고 정보기술(IT) 분야에 뛰어들었다.
현직 의사인 딸도 회사 지분 대신 현금 증여를 원하고 있다.
최근 국내 대형 회계법인에 기업 매각을 의뢰한 한 중견기업의 사례다.
최근 2~3년 사이 이처럼 승계 실패에 따른 기업 매물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는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국내 가구 1위인 한샘, 1세대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 등이 올해 승계 대신 지분 매각을 택한 대표적 사례다.
업력이 40년에 달하는 대구·경북 기반 MS저축은행도 상속세 부담 등이 겹치자 2세에게 물려주는 대신 SK증권에 팔았다.
크린토피아, 태화기업, 승명실업, 태림포장, 제이제이툴스, 이지웰, 성원산업 등 최근 5년 동안
개인 대주주가 경영권을 매각하거나 추진한 사례는 총 181건에 달했다.
○‘지방 공장’ 경영 꺼리는 2세 늘어
최근 인수합병(M&A) 시장에 주류로 등장하는 매물은 대부분 1970~1990년대 창업한 제조·서비스업체들이다.
한 대형 회계법인의 M&A 담당 변호사는 “60대 이상 창업주들이 회사를 매각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승계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점 때문”이라며
“물려줄 만한 자식이 없든가, 있어도 회사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능력이 모자란 경우”라고 말했다.
또 다른 회계법인 관계자는 “과거 조선, 해운, 자동차 부품 등에 치중된 국내 주력 업종이
최근 IT, 플랫폼, 서비스 등으로 바뀌었다”며 “자녀들에게 근면 성실하게 제조공장을
운영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한 사모펀드(PEF) 대표는 “또 창업주의 자녀가 해외에서 유학한 뒤 외국계 기업과
스타트업 등에서 근무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제조업 경영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말했다.
최근 매각된 한 금형업체는 공장이 있는 지방에서 자녀 교육을 시킬 수 없다는
며느리의 반대로 아들의 승계가 무산되기도 했다.
매각 대금으로 편의점을 차려달라는 아들의 요청 때문에 회사를 판 사례도 있다.
과거와 달리 창업주들 사이에 ‘능력 없는 자녀’에겐 물려주지 않는다는 인식도 확산됐다.
중견 제조업체 A사의 사장은 아들의 경영능력이 기대에 못 미치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팔았다.
70대 창업주가 일군 B사는 50대 자녀들의 승계 다툼이 심해지자 돌연 매각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했다.
상속세 부담도 중견기업 매각을 부채질하는 요소로 꼽힌다.
국내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지만 최대주주 지분으로 주면 60%에 육박한다.
한 중소기업 유관단체 관계자는 “가업승계 공제나 과세특례 제도가 있지만 고용 유지 등의
조건이 달려 있다 보니 2세들도 ‘현금 증여’를 선호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승계보단 현금 보유 ‘선호’
이 같은 매물의 상당수는 PEF가 채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PEF는 총 855개,
투자자가 PEF에 출자를 약정한 금액은 97조1000억원으로 모두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경영권을 매각해 회사가 성장한 전례가 늘어나면서 대주주와 임직원들의 PEF에 대한
거부감이 예전처럼 크지 않은 상황이다.
신규 PEF도 계속 늘어나면서 “좋은 값에 회사를 사겠다”는 제안도 많아졌다.
PEF들도 가격이 치솟을 수 있는 공개 경쟁입찰보단 대주주와의 수의계약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물 밑에서 꾸준히 딜이 성사되는 이유다.
M&A업계에선 ‘대목’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중개 수수료를 주요 수익원으로 하는 투자은행(IB)과 회계법인, 법률법인 등은 더 분주해졌다.
대형병원의 인맥을 총동원해 알짜기업 오너 일가의 건강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거나
주요 임직원에 접촉해 오너 일가의 불화를 찾아내는 등 기회 포착을 위한 물밑 경쟁도 치열하다.
대형 회계법인 중에는 지방의 작은 회계법인과 사전에 친분을 쌓은 뒤 그 지역의 알짜
중소·중견 기업 경영인들의 속사정을 수집하는 사례도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제조업체의 경영 체질을 개선하고 미래 먹거리를 찾는다는 측면에선
PEF가 인수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며 “경영 일선에 남아 조언을 한다는 조건으로
회사를 매각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민지혜/차준호 기자 sp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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