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풍수 강의

상촌 김지수 묘역

참도 2020. 7. 8. 09:40

지정종목 : 경기도기념물 제98호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1095(재실)

1.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생애

고려의 문신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1374-1388) 초에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조선시대 사간원의 정육품 벼슬)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 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선생 묘역 안내

공양왕(恭讓王) 4년(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392년 고려왕조가 붕괴되고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건국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조선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김자수 선생의 순절비(殉節碑)

2. 김자수가 남긴 절명시(絶命詩)

平生忠孝意(평생충효의) 평생에 품은 충효의 뜻

今日有誰知(금일유수지) 오늘날 누가 있어 알리오

一死吾休恨(일사오휴한)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탄하랴

九原應有知(구원응유지) 하늘은 마땅히 알아 주리

3. 와비(臥碑)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상석(床石)·향로석(香爐石)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望柱石)이 1쌍,

문인석(文人石)이 1쌍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김자수(金自粹)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새로 채유후(蔡裕後 조선 중기의 문신, 대사헌)가 내용을 지어 건립하였다.

옛 신도비는 누워 있기에 ‘와비(臥碑)’로 불린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와비(臥碑)는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가 스스로 자진하기 전에 아들 근(根)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해서 비석을 만들지 않았으나

세월이 흘러 후손들이 묘하게 해석해서 `세우지 말라고 했으니 눕혀 놓으면 된다.`는데

 

의견을 모아서 결국 비문을 쓰고 눕혀서 땅에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600여년이 흐른 와비는 1928년 후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후 김자수 선생의 순절비(殉節碑)가 다시 세워져 있다.

 

김자수(金自粹)가 스스로 자진하기 전에 아들 근(根)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해서

비석을 만들지 않앗으나 후에 비석을 만들어 세우지 않고 눕혀두게 됨.

새로 만들어 세운 신도비

4. 김자수(金自粹)의 묘 - 아들 근(根)의 묘 - 며느리 우봉이씨(牛峯李氏)의 묘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면 가장 먼저 김자수(金自粹) 선생의 묘가 있고

 

그 뒤로는 아들 근(根)며느리 우봉이씨(牛峯李氏)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낮은 뒷산 봉우리가 내려온 곳에 무덤이 있고 양쪽 산 날개가 포근하게 감싸고

약 1km떨어진 서쪽에 불곡산(335m)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선생 묘역

 

김자수 선생 묘역 배치도

이곳도 아들 근(根)과 며느리 우봉이씨의 묘가 아버지인 김자수(金自粹)보다 위쪽에 있어

순서가 뒤바뀐 역장(逆葬)의 형태이다.

 

김자수 선생의 후손 가운데 추사체로 잘 알려진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김자수의 15대손이다.

1665년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김자수가 배향되어 있다.

문인석

 

초강서원(草江書院)은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1611년(광해군 3)에 세워진 서원으로

1611년(광해군 3)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연(朴堧)·박사종(朴嗣宗)의 위패를 모셨다.

 

1665년(현종 6)에 김자수(金自粹)·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다.

그 후 초강서원은 1868년경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었다고 한다.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선생 묘역

5. 문익점(文益漸)의 시(詩)

`고려사` 열전에 김자수(金自粹)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 시묘(侍墓)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 정경을 보고 문익점(文益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문익점 초상

시묘(侍墓)살이하는 김자수(金自粹)

始見安東居堊子(시견안동거악자) 안동에서 시묘살이 하는 사람 보았네

剖氷求鯉自恢恢(부빙구리자회회)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기뻐하더구먼.

筍生雪裏誠心厚(순생설이성심후) 눈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효성이 지극함인데

雉下苦前孝烈開(치하고전효열개) 자리 앞에 꿩이 내린 것은 孝烈의 열림이라.

6. 황희(黃喜)가 지은 만사(輓詞)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 뒤로는 스승인 포은 정몽주(鄭夢周)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황희(黃喜)

김자수의 죽음을 두고 황희(黃喜)가 지은 만사(輓詞 :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다.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였다.

‘삼강행실록’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기도 했다.

황희(黃喜)가 지은 만사(輓詞)

有忠有孝難(유충유효난)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유효유충난)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이자개운득)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황우살신난) 하물며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좌청룡 우백호가 감싸고 있는 모습

사진 글 정리 임신영(010-8814-3084)

[출처] 조선시대의 역장(7) 상촌(桑村) 김자수와 아들 근의 묘|작성자 금산향기 임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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