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계 4위 갑부, 신격호가 타 재벌과 달랐던 점
김종성 입력 2020.01.19. 22:12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신격호 성공신화를 상징하는 잠실 롯데월드타워. |
ⓒ 연합뉴스 |
스무살에 일본 건너가 맨손으로 10대 재벌 일궈
123층짜리 롯데월드타워로 상징되는 한국 롯데 신화를 이룩한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세상을 떠났다. 12월 중순부터 식사에 지장이 있어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타계했다.
향년 99세, 우리 나이로 100살이다.
1921년 경북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출생한 신격호는 4년제 삼동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6년제 언양공립보통학교(언양초등)에 편입해 졸업한 뒤 2년제 울산농업보습학교를 나왔다.
종축장에서 양털 깎고 돼지 키우는 등의 일을 하다가 20세 때인 1941년,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부인 노순화를 두고 일본으로 떠났다.
이때만 해도 사업가가 되겠다는 명확한 꿈은 없었다.
신격호와 동향인 서진모 전 <경향신문> 기자가 쓴 <청년 신격호>는 이렇게 말한다.
"한때 청년 신격호의 꿈은 기자 또는 작가였다고 전해진다.
하루 세끼 밥 먹기도 힘들던 시절이라, 글 쓰는 직업보다는 장사나 기술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가의 꿈을 접고 사업가로 인생 진로를 바꾸었다."
사업가로 꿈을 세우긴 했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먹고사는 일이었다.
그에게 절박한 과제는 객지 일본에서 주경야독을 무사히 해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 과제를 잘 수행했다. 우유 배달이나 고물상·전당포 점원 등을 하면서
와세다중학교와 와세다고등공업학교에 다녔다.
자기 나라에서도 하기 힘든 주경야독을 이국 땅에서 잘 해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뜻하지 않게 고용주였던 하나미쓰가 5만엔을 빌려주면서 사업을 권유하는 일이 있었다.
회사원 월급이 80엔 하던 시절이다. 이런 큰돈을 빌려줬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뜻하지 않은 일들은 계속 벌어졌다.
하나미쓰의 금전 대부는 좋은 의미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 돈으로 커팅오일(기계선반용 기름) 공장을 차린 신격호는 나쁜 의미의
'뜻하지 않은 일'을 연달아 겪었다.
전쟁 때문에 커팅오일 수요가 많을 때 공장을 차렸건만,
얼마 안 있어 공습을 받아 공장이 완파됐다.
하나미츠에게 새로 돈을 빌려 다시 차렸지만, 또다시 미군 공습으로 폭싹 망했다.
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짐 싸들고 귀국했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딴 데서 돈을 꿔 비누와 포마드 크림 같은 유지류를 제조하는 공장을 차렸다.
1945년 일제 패망 뒤였으므로, 이때는 공습으로 망할 일이 없었다.
장사는 꽤 잘됐고 하나미츠에게 꿨던 돈도 갚았다.
이 상태에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리고 껌 개발에 도전했다. 제품 인기가 매우 좋았다.
그래서 투자자들을 모아 차린 회사가 주식회사 롯데다.
1948년의 일이니, 도일 7년 만에 주식회사 경영자가 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롯데상사, 롯데부동산, 롯데아도, 롯데물산,
훼밀리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프로야구단 롯데 오리온스까지 인수했다.
▲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
ⓒ 롯데그룹제공 |
한국에서도 승승장구... 세계 4위 갑부까지
일본에서 기반을 다진 이 '목형' 기업가는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6년 한국 진출을 개시했다.
롯데알루미늄으로 시작해 롯데제과·호텔롯데·롯데전자·롯데칠성음료·롯데삼강·
롯데건설·롯데쇼핑 등을 설립하고, 일본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야구단(롯데 자이언츠)을 운영했다.
한·일 양국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는지는 1988년 7월 9일자 <중앙일보> 기사
'롯데 신격호 회장 세계 4위 갑부 랭크'에서도 확인된다.
"미국의 격주간지인 포브스지는 최근호에서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의 랭킹을
발표하면서 신격호 회장의 재산이 80억 달러로 4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1위는 일본 세이부그룹 회장인 쓰쓰미 요시아키(189억 달러),
2위는 빌딩 68개의 소유주인 일본인 모리 다이키치로,
3위는 캐나다인 랠프 라이히만이었다.
일본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좋을 때라,
신격호를 포함한 일본 기업인 3명이 4위 안에 랭크될 수 있었다.
일본에 간 지 30년도 안 돼서 세계 4대 부자 소리를 듣게 됐으니,
그의 사업에 관해서는 더 이상 상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조세 포탈이나 신동주·신동빈 아들의 경영권 분쟁 으로 세상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한국인이 차별받는 일본 땅에서 단단히 기반을 잡았음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기업까지 일궈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신격호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 관한 한,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편, 그가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문제적 영역인 재벌의 일원이었다는 점도
동시에 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 역시 한국 재벌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이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피할 길이 없다.
재벌들이 한국 현대사에 죄를 범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역사에 끼친 그들의 죄악은 크게 두 가지에서 기원했다.
대부분의 재벌은 이 두 가지에 다 걸리는 데 반해, 신격호는 그중 하나에만 걸린다.
그런 점에서 여타 재벌들과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재벌의 죄악을 잉태한 첫 번째 요인은,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과의 결탁을 통해
일본인 적산(귀속재산)을 '합법이지만 부당하게' 획득했다는 점이다.
적국 일본인들이 두고 갔다 하여 적산으로 불리는 이 재산들은 한국인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과 함께 국민들의 몫이 됐어야 했다.
이런 재산들이 해방 당시 한국 총자산의 80%를 차지했다.
▲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 명예회장이 지난 2018년 10월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경영 비리'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항소심 선고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 이희훈 |
자수성가 했지만 정경유착의 그늘 드리워져
한국의 주요 재벌들이 그때 불하받은 재산을 기초로 지금의 부를 축적한 데 반해,
신격호와 롯데그룹은 이 점에서 자유롭다.
그는 일본인 돈으로 사업을 벌였지만 적산도 아니고, 국민의 것을 가로챈 것도 아니고,
사실상 공짜로 얻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두 번째 요인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한국 사업을 시작한 시점은 1966년이다.
구멍가게라면 몰라도 규모 있는 대기업을 정권과의 제휴가 없이 운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4대문 내에 새로운 백화점을 인허가할 수 없다'는 박정희 정권의 방침이 있었는데도
서울 중구 소공동에 롯데쇼핑이 들어선 것은, 롯데그룹과 박 정권의 유착관계를
설명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신격호와 박 정권이 얼마나 친밀했는지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에서도 드러난다.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제3권에 따르면, 신격호는 박 정권 핵심들의
'은밀한 청탁'까지 들어줄 정도로 정권과 매우 가까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그 뒤 이후락은 1972년 3월 일본에 대사로 부임해왔고,
치나츠는 롯데 사장 신격호를 통해 첩이 돼 달라는 이후락의 청을 받고 이를 승낙했다."
신격호와 정권의 유착은 박정희 때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후의 정권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적산기업 헐값 불하라는 원죄에는 저촉되지 않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원죄로부터는
그 역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고인이 된 신격호는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거대한 업(業)을 일궈냈다는 점에서는
분명 훌륭한 기업인이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죄악 중 하나인 정경유착을 통해 돈을 벎으로써 한국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인물이다. 대단하기는 하지만,
부정적 발자취 역시 적지 않게 남겼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