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면세점과 중국 보따리상들

참도 2018. 4. 26. 14:41

서울 시내 면세점 곳곳에서 '밤샘 대기'가 일상이 된 보따리상들 지난해부터 급증
'유령 단체관광객' 둔갑해 페이백 챙겨

지난 24일 새벽,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 중국인 보따리상들이 비를 맞아가며 줄지어 서 있다.


[아시아경제 심나영 기자]사람들이 무언가를 사기 위해 노숙자를 자처하며 길에서 밤새도록 줄을 서서 기다리는 때가 있습니다.

(이젠 옛 이야기가 돼 버렸지만)새 아이폰이 나오는 날, 한정판 나이키 운동화가 출시되는 D-day,

방탄소년단의 팬미팅 당일(요즘엔 팬미팅에서 연예인 관련 '굿즈(Goods·상품)'도 팝니다) 등등.

 이런 기다림도 1년에 많아 봤자 한 두 번 일 뿐, 그래서 사람들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특이하게도 '밤샘 대기'가 일상이 된 이들도 있지요. 바로 서울 시내에 있는 면세점을 점령한 중국인 보따리상들입니다.

지난 겨울 영하 10도 칼바람에도, 올 봄 세찬 봄비가 내려도 이들은 매일매일 면세점 앞에 줄을 섭니다.

새벽녘에는 수십명 수준에서 면세점 오픈 시간을 앞두곤 수백명까지 불어나기 일쑤입니다.

이들의 지상 과제는 단 하나. 인기있는 화장품 물량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보따리상들이 아홉시 반 면세점 문이 열리자마자 인기 화장품 브랜드 매장을 향해 100m 달리기를 합니다.

특히 설화수나 후 같이 보따리상들에게 가장 잘 팔리는 화장품은 1인당 판매 개수도 5세트나 10세트씩 제한돼 있습니다.

이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날은 허탕치는 날이지요.

 이렇게 확보한 화장품 세트는 중국으로 중간 도매상들에게 넘겨진 후 온라인 등 각종 비공식 거래선을 통해 판매됩니다.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내 롯데면세점 화장품 매장 앞에 보따리상들이 사가는 화장품 박스가 쌓여있다.


서울 시내 면세점, 백화점, 호텔, 공항에 가면 면세 제품을 가득 담은 큰 캐리어를 끌고 삼삼오오 모인 중국인 보따리상들이

어디서든 눈에 띄지요. 이들은 언제부터 한국에 들어왔을까요. 중국인 보따리상이 많아진 건 지난해부터 입니다.


그 전에도 간혹 물건을 대량 구매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사태 이후

중국인 관광객 발길이 뚝 끊기며 중국인 보따리상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내에선 여전히 한국 면세품에 대한 수요가 높지만 제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보따리상 밖에 없기 때문이었죠.

 관광객이 줄어들자 여행사 가이드까지 보따리상으로 변신해 돈을 벌고,이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아르바이트도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보따리상들이 서울을 점령하다시피 하지만 공식적으론 이들이 몇명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한국면세점협회가 매달 발표하는 국내 면세점 방문 고객수를 보고 증감 정도만 파악할 뿐이지요.

지난달 국내 면세점 고객수는 408만329명으로, 내국인(251만867명)은 61.4%, 외국인(157만8462명)은 38.6%로 구성됐습니다.

고객수는 전년 동기 대비 8.5%, 올해 2월에 비해 15.3% 증가한 셈입니다.

중요한 건 보따리상들의 영향력이 이제 면세점 산업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커졌다는 겁니다.

 지난달 국내 면세점의 외국인 1인당 평균 매입액은 사상 처음으로 801달러(86만3157원)를 기록했습니다.

 면세점 외국인 매출액(12억6465만5312달러)에서 외국인 고객수(157만8462명)를 나눈 수치이지요.

외국인 1인당 매출은 2016년 3월 378달러에 그쳤지만, 중국의 사드 보복이 시작된 지난해 3월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면세업계는 구매력 높은 외국인의 대부분을 보따리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ㆍ외국인을 포함해 국내 면세점 전체 매출 중 75~80% 가량이 중국인인데다 현재 면세점을 방문하는 중국인 고객의 90% 이상이 보따리상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설명입니다. 그만큼 보따리상에 대한 면세점의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보따리상들이 많아지자 급기야 서울 시내면세점엔 '유령 단체관광객'들이 출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한국에서 영업하는 중국 여행사들 일부는 서울 시내면세점을 방문하는 보따리상들을 단체관광객로 등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송객수수료 때문인데, 송객수수료란 여행사나 가이드가 모집해 온 단체관광객으로부터 발생한 매출의 일정액을 면세점이 여행사 등에 지급하는 수수료를 말합니다.

여행사들이 중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떨어지자 보따리상들을 단체관광객으로 등록해 면세점 수수료를 챙기는 꼼수를 부린 것이지요. 매출을 올려야 하는 면세점과 송객 수수료로 먹고 살아야 하는 여행사, 페이백(payback)으로 이익을 얻는 보따리상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입니다.

실제 위챗을 비롯한 중국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여행사들이 보따리상들을 대상으로 거짓 단체관광객 등록을 유인하는 전단이 돌고 있습니다. 지난 1일 한국에 있는 중국 여행사들이 뿌린 전단을 살펴보면 제품을 롯데면세점 명동점에서 살 경우 16.5%, 월드타워점은 19.5%, 코엑스 점은 21%의 페이백을 지급한다고 기재돼 있지요. 신라면세점에서 구매할 시 받는 페이백은 17.5%를 준다고 합니다.


유령 단체관광객에 대해 한 면세점 관계자는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주차장에는 하루 종일 단체관광객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한 대도 없었는데 일일 매출 정산을 할 땐 여행사가 데려온 요우커가 매출을 올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사드 사태 이후 다 같이 살자고 나타난 면세점과 여행사, 보따리상 간의 '이상한 거래' 때문이다". 여행사들과 면세점들도 '울며 겨자 먹는' 신세입니다. 여행사들은 수수료의 1~2%만 남기고, 전부 보따리상들에게 주고 있고, 면세점들 역시 경쟁사에 보따리상을 뺏기지 않으려고 유령 단체관광객인 줄 알면서도 여행사에 수수료를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세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22개 시내 면세점 사업자가 여행사와 가이드 등에 준 송객수수료는 1조1481억원으로 전년 대비 19% 증가했습니다. 2015년 5630억원이던 면세점의 송객수수료 지출이 2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입니다.

면세점들의 고민은 한한령 해제 이후에도 이어질 것 같습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본격적으로 밀려 들어오는 시점 이후 '진짜' 단체관광객들과 '가짜' 단체관광객들에게 동시에 수수료가 지급될 경우 비용이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행사들이 지금처럼 보따리상들은 물론 일반 관광객들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체관광객으로 등록 시키면 면세점이 지출하는 송객 수수료 규모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실정. 중국인 보따리상들에게 전적을 매출을 기대는 국내 면세점들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심나영 기자 sny@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