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물

차은택 차지철

참도 2016. 10. 18. 12:12

김희윤의 '딥스토리' -백지영 '사랑안해'와 '조국의 찬가' 노랫말 지어, 박지원 말대로 닮은 점 많아 


지난 11일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박근혜 정권의 비선실세 특혜 의혹을 받은 차은택 감독을 거론하며 "차지철도 이런 짓은 못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 허수경의 시 ‘불취불귀’ 중에서 


살아있는 돈, 살아있는 권력을 향한 대중의 관심은 집요하다. 이들의 대외활동은 물론이고 CEO가 휴양지엔 어떤 책을 들고 가는지, 대통령의 인사 배후엔 어떤 학맥과 혈연이 연결됐는지 실시간 리스트업에 가계도까지 신속히 등장해 다음 날 언론의 톱을 장식하는 것이 이를 반증하는 사례. 최근 불거진 미르· K재단 의혹의 배후로 거론된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 역시 40년 전 영상과 함께 최씨의 전 남편인 정윤회, 부친인 최태민 목사와의 오랜 인연까지 연일 신문 지상을 오르내리며 ‘국정농단’의 주 세력으로 지목되고 있는 가운데 그사이, 전에 없던 새로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그 새로운 인물을 가리켜 유신정권의 실세 차지철 전 경호실장에 빗대며 “대통령의 측근 실세의 전횡이 국정 전반에 독버섯처럼 퍼져있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미 죽어 박제된, 권력욕의 화신으로 회자되는 정치인의 이름을 거명할 만큼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라는 무대 위 주인공으로 인식되고 있는 그를 향해 박 위원장은 이어 “(그가) 창조경제 전도사로 봉사한 것이 아니라 창조경제가 차은택을 위해 존재한 것”이라 일갈했다.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 경호실장의 과오를 상쇄할 만큼의, 대칭에 놓인 차은택의 전횡은 무엇이었을까. 스타를 두고 새로운 스토리를 메이킹하던 감독은 어느새 VIP 곁에서 ‘천인보’를 통한 새로운 업적을 설계하고 있었다.

차은택 감독이 연출한 싸이의 '행오버' MV 스틸 컷


깔끔한 실력, 드러난 재능 

CF감독 차은택은 일찍이 ‘드라마타이즈’형식의 MV와 대중적인 CF를 통해 스타감독으로 자리매김한 인물. 연모하는 소녀의 초례 준비를 초조하게 바라보다 연잎으로 꽃신을 덮고 마음을 여미는 소년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이승환의 ‘당부’ MV를 필두로 양조위, 전도연, 류승범이 소매치기로 등장해 도시의 밑바닥 풍경을 헤매는 더 네임의 ‘The Name’, 명성황후 민자영에 대한 부정적 역사적 인식을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 한마디로 호감으로 바꿔버린 명성황후OST '나가거든'을 거쳐 최근에는 월드스타 싸이의 ‘행오버’ MV에서 싸이와 함께 미국 힙합뮤지션 스눕독의 코믹한 모습을 담아내며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비서실장 차지철은 용산고등학교를 나온 모범생이었으나 육사시험에 불합격, 육군 포병간부시험을 치는 것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서자 출신이라는 출생 콤플렉스에 육사 콤플렉스가 더해지면서 권력을 향한 열망과 육사 출신에 대한 열등감은 이후 그의 출세 지향적 성향의 근간을 이뤘고, 여기에 더해 그의 성격은 매사 치밀하고 또 치열했다. 성실하고 깔끔한 복무 태도를 인정받아 공수특전단 배치 후 미국 육군 포트베닝 레인저 학교로 유학을 다녀오면서 군에서 두각을 나타낸 차지철은 5.16 정변당시 대위 신분으로 적극 참여해 이후 박정희 육군 소장의 경호대로 발탁됐고,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엔 예편하여 전국구 국회의원에 출마, 30세의 나이로 당선되며 군대를 넘어 정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차은택 감독이 총연출을 맡은 융복합 뮤지컬 '하루(One Day)' 공연장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과 차은택 감독. 사진 = 연합뉴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 

앞서 언급한 MV가 아니더라도, 차 감독은 한 해 100여 편의 CF를 찍는 업계 탑클래스 감독이었다. 돌연 2014년 8월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을 때만 해도 그가 정치 쪽에 이토록 깊이 개입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위원 임명 1년 만에 그는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고위공무원 '가'급, 과거 1급·실장급 상당)에 발탁되며 중앙정계에 이름을 알렸고, 이 과정에서 그의 단장자리를 만들기 위해 2015년 3월 ‘창조경제 민관협의회 등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27230호)’을 19일 만에 초고속 개정할 만큼 그를 향한 청와대의 신뢰는 두터웠다.  

이후 창조경제를 무대로 종횡무진하는 그의 행보를 두고 언론은 ‘문화계 황태자’라 부르며 심도 있게 다루기 시작했고, 그가 기획한 ‘문화가 있는 날’, ‘뮤지컬 원데이’ 행사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힘을 실어줬다. 청와대 수석비서관도 대통령을 독대하는 게 어렵다는 토로가 무색하게 차 감독은 박 대통령에게 심야 독대 보고를 한다는 증언이 이어지면서 그는 정권의 실세로 통하기 시작했다.  

한편 차지철은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를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조언을 건네자 그길로 준비를 시작해 한양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 수년 만에 박사학위까지 취득하며 기회를 다졌고 이후 국회 외무위원장, 내무위원장을 역임하며 정치적 입지 또한 확고히 했다. 이후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지역구에 출마해 내리 3선에 성공하며 4선 중진의원으로 발돋움하는 사이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을 책임지고 물러난 박종규를 대신해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임명되며 그는 활동 무대를 국회에서 청와대로 옮기게 된다. 

경호실장 취임 후 차지철은 경호실의 위상을 높인다는 이유로 경호실장의 직위를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켰다. 그 밑에 차장으로는 육군 중장 또는 소장을 임명하며 군부를 우회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고, 비서실 업무에 간섭하는 한편 경호실 공금으로 대규모 사설 정보팀을 운영해 수집한 정보를 박 대통령에 독대 보고하면서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당시 그가 사석에서도 복창할 만큼 즐겨 쓴 말은 “각하가 곧 국가다”였다.

사진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그 오른쪽이 박근혜 대통령,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차지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그는 거기 없었다 

계속되는 의혹은 곧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르재단의 임대차 계약서는 차은택의 절친한 후배이나 미르재단과 관계없는 A씨가 작성했으며, 재단 내 이사진은 차 감독의 대학원 교수, 업계 지인들로 꾸려졌다. 그가 대표로 있는 ‘아프리카 픽처스’엔 예정에 없던 정책 홍보 광고와 KT 광고의 상당수가 쏟아졌고, 그와 친분관계로 얽힌 김홍탁 대표의 ‘플레이그라운드’ 역시 문광부 산하 해외문화홍보원의 교류행사 프로젝트의 진행을 잇달아 수주하며 막대한 국고를 지원받았다. 이 같은 파상 공세가 차 감독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다. 그는 정계에 등장하기 전에 이미 한 해 100여 편의 광고를 소화하는 ‘일류감독’이었고, 마치 실력도 없는 이가 정권에 기생해 분에 넘치는 일을 전횡을 통해 싹쓸이해갔다는 식의 호도는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의 악의적 오해에 불과하다. 의혹을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선 본인이 공개석상에 나와 시시비비를 가리면 될 일이나, 그는 현재 중국에 머물며 소수의 매체를 통해 괴로운 심경을 전하는 것으로 입장표명을 자제하고 있다. 

1979년에 접어들면서 차지철은 명실상부 권력의 2인자로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항간에는 그가 대권을 잡았을 때 휘호를 쓰기 위해 명필을 독선생으로 두고 서예 연습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한밤중엔 전차 중대를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치, 청와대 주변을 돌며 위압적 쇼맨십을 선보였는가 하면 일주일에 한 번 국기하기식이라는 행사를 치르며 장관은 물론 육사 출신 4성 장군 등을 두루 초청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일개 예비역 중령이 장군들을 사열하며 거수경례를 하고, 또 장성급 승진 인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 지휘봉을 하사하는 일은 군의 위계질서를 통째로 뒤흔들 일대 사건이었지만 실세 2인자의 전횡에 제동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79년 10월 18일 부마항쟁이 일어나며 사태가 점차 악화되자 사안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김재규를 제치고 현장에서 “캄보디아에선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안하무인 격인 그의 태도에 격분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일주일 뒤인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이뤄진 ‘대행사’ 현장에서 가슴에 숨겨둔 발터 PPK로 그의 팔을 먼저 쏜 뒤, 화장실로 도주한 그를 다시 다른 총을 가져와 흉부를 저격해 현장에서 즉사시켰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작사가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먼저 사진 상단은 차지철이 작사한 '민족의 노래' 공연 영상, 하단은 차은택이 백지영의 '사랑 안 해'를 작사한 배경을 공개한 KBS2 '이야기쇼 두드림' 캡쳐 화면


숨겨진 작사 실력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작사가'라는 공통의 이력을 갖고 있다. 먼저 차지철은 당대 유명 작곡가인 김희조의 곡에 직접 글을 붙인 ‘조국의 찬가'와 ‘민족의 노래’를 EP 음반으로 발표했는데, 1970년대 인기 보컬그룹 ‘봉봉 4중창단’의 목소리로 녹음한 이 곡들은 국책홍보영상에 삽입되며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차은택은 평소 알고 지내던 앨범 프로듀서로부터 작사를 부탁받게 됐는데,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지인이 부탁한 일인 만큼 성의껏 작성했는데 초고는 퇴짜 맞았고, 두 번째로 쓴 ‘사랑 안 해’가 프로듀서의 마음을 움직여 2006년 복귀한 백지영의 5집 타이틀곡으로 낙점됐다. 차 감독은 당시 백지영의 재기 발판이 된 이 곡의 히트로 수억 원대의 저작권료를 벌었다고 한 방송에서 밝히기도 했다.  


파행 후 재개된 국정감사가 막바지에 다다른 가운데 최순실과 차은택을 둘러싼 청와대 발 비선실세 의혹에 대한 실언과 폭언, 폭로와 침묵이 이어지면서 차은택의 국정감사 증인채택 요구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의 지적대로 차은택의 전횡 의혹은 5공화국 차지철의 만행에 비견할만한 것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사람의 이유 있는 항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의혹의 거품을 걷어내고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외곬로 살아온 두 남자의 전혀 다른 행보는 변해가는 시대의 권력 상을 적나라하게 비춰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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