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이 친일파라도 자기 자신이 친일과 무관하다면, 이런 사람은 친일과 관련된 비판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친일파의 후손이 조상의 친일을 비호하거나 친일 청산을 방해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런 사람은 친일파 조상과 공동운명을 걷겠다며 민족 앞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므로, 민족구성원들이 자신과
조상을 연관시키는 것에 대해 분개하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 시인 푸시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충고한 것처럼 그들은 "서러워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친일파'인 이명세(1893~1972년)를 할아버지로 둔 이인호 KBS 이사장도 마찬가지다.
이인호 이사장은 할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했는지,
이 사전의 수록자 명단이 발표된 2005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진영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이인호 이사장은 2004년 11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친일청산에 대한 반대의 의지를 천명하면서
"이것은 학자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또 2006년에 뉴라이트 인사들이 결성한 교과서포럼에 가담하여,
이 포럼이 만든 대안 교과서를 2008년에 감수했다.
이 교과서에서는 친일파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으로 미화했다.
또 2011년에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결성한 한국현대사학회의 고문이 되었다.
이 학회는 교학사 교과서를 집필한 단체다. 이 교과서는 친일과 독재를 미화했다는 이유로 작년에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이인호 이사장은 자신과 할아버지가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선언한 셈이 된다.
따라서 민족구성원들이 자신과 할아버지를 연계시키는 것에 대해 그는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도 푸시킨의 시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친일파'라니? "이명세가 이완용도 아니고, 어째서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친일파라고 욕하는 건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명세를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친일파'로 규정한 인물이 따로 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주도권 되찾으려는 이명세 앞에 놓인 '김창숙 벽'
▲ 조선총독부. | |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
일본이 인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던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명세는 총독부 어용기관인 조선유도(儒道)연합회의 핵심 간부가 되어
조선 유림, 조선 유학자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1942년 5월 조선유도연합회 기관지인
<유도> 창간호에서 그는 '우리나라(일본)가 승리할 수밖에 없으므로 유교 정신을 황도 정신(일왕의 통치 이념)에 합치시켜
국가적인 대(大)사업에 기여하자'는 취지로 전국 유림에게 절절히 호소했다.
이명세는 '우리나라'의 승리를 확신했지만, 그의 나라는 승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나라는 망했는데도 그는 망하지 않았다. 일제 패망과 함께 유림 사회에서 주도권을 잃기는 했지만,
그는 사회지도층의 지위와 사회적 기반만큼은 지켜냈다.
이명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상임이사가 되고 1954년에 이사장이 되었다.
미군과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비호한 덕분이었다. 해방 직후 변절자의 삶을 그린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에 나오는 이인국 박사처럼 이명세는 당시의 상황을 잘도 피해나갔다.
▲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있는 김창숙 동상 | |
ⓒ 김종성 |
살아남은 이명세는 유림 사회의 주도권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의 앞에 엄청난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벽은 독립투사이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1879~1962년)이었다.
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14년 형기를 채우는 동안에 모진 고문을 받아 두 다리가 마비된 김창숙은 해방과 함께
유림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1945년 11월 신설된 유도회총본부(이하 '유도회') 위원장에 취임하고 성균관 관장을 겸했다.
해방 이후의 성균관은 유교 성현들에 대한 제사를 핵심 업무로 하는 조직이다.
상황은 1955년부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때 이명세가 김창숙에게 타협을 제의했다.
1960년 10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1955년 7월 이명세 일파는 8천만 환을 유도회 및 성균관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유도회 부위원장 자리를 요구했다. 독립투사 계열과 친일파 계열의 동거를 제안한 것이다.
이명세는 수차에 걸쳐 윙크를 보냈다. <동아일보>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수차에 걸친 강요'였다.
하지만 대쪽 같은 선비인 김창숙이 그런 동거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좀전에 언급한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친일파'란 표현이 등장한다. 김창숙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친일파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며
"불의한 돈을 받는 것은 공맹(공자·맹자)의 도에 어긋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이명세는 이승만과 자유당의 비호 하에 폭력적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1957년 7월 김창숙의 주도로 열린 전국지방유도회 및 향교대표자대회를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무산시켰다
. 그런 다음에, 그는 대의원 일부를 강제 납치해서 불법 대회를 개최한 뒤 성균관 임원진을 마음대로 구성했다.
이로써 성균관은 친일파 이명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성균관을 되찾기 위해 시작된 김창숙의 법정 투쟁
이때부터 성균관을 되찾기 위한 김창숙의 법정 투쟁이 시작됐다.
김창숙은 이명세가 개최한 유림대회의 무효 확인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맞서 이명세는 기독교 신자인 대통령 이승만을 성균관 총재로 추대함으로써 보호막을 만들었다.
유교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성균관의 총재직에 기독교인을 추대한 것이다.
이명세는 이승만의 1960년 대선 승리를 돕고자, 유림들로 구성된 선거대책위원회까지 만들었다.
김창숙은 사법부의 양심에 호소하고, 이명세는 이승만의 힘에 호소한 것이다.
김창숙은 1958년에 선고된 1심 판결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사건은 2심으로 넘어갔다
. 김창숙은 1959년에 선고된 2심 판결에서도 승소했다. 그러나 사건은 3심으로 넘어갔다.
만약 이승만 정권의 비호가 없었다면, 잘잘못이 너무나 명확한 이 사건이 시간을 질질 끌며 3심까지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다. 그러자 김창숙 계열은 물리력을 동원해서 성균관을 접수했다.
하지만 이명세 계열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양쪽의 공방이 격화되는 속에서 이명세는 불법적인 대회를 열어 성균관 관장에 취임했다.
그 해 9월에 선고된 3심 판결에서 김창숙의 승소가 확정됐지만, 이것은 대결의 판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성균관장 이명세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4·19 혁명으로 들어선 민주당 정권은 국정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혁명적 분위기가 약해지자, 이명세가 힘을 추스르고 방어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명세는 8·15 뒤에도 살아나고 4·19 뒤에도 살아났다.
이명세 아닌 김창숙과 연대하려 했던 박정희의 속내
▲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의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박정희 흉상. 문래근린공원은 5·16 쿠데타의 발상지인 육군 제6관구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 |
ⓒ 김종성 |
김창숙 대 이명세의 대결이 명확히 종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1961년에 일본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전복했다. 박정희의 등장은 이 대결에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등장은 이명세에게 유리한 조짐이었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5·16 쿠데타 이후에 많은 독립투사들에게 훈장이 추서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친일파 박정희는 독립투사들에게 명예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가리고자 했다.
박정희는 그런 식으로 김창숙을 바라봤다. 김창숙과의 연대가 가져올 정치적 이익을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이명세가 아닌 김창숙에게 접근했다. 1962년 3월 박정희는 김창숙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이것은 생존 중인 독립투사에게 수여된 유일한 건국훈장이었다.
2개월 뒤인 5월 초순, 박정희는 김창숙이 입원한 중앙의료원의 병실까지 방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명세는 당황했을 것이다. 이명세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눌까 하고 걱정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명세가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창숙은 의식이 없어서 박정희가 온 줄도 몰랐다. 김창숙의 성격을 놓고 볼 때, 그때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당장에 퇴원 수속을 밟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창숙이 의식이 있었더라도, 이명세가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가 방문하고 나서 며칠이 지난 5월 10일, 김창숙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창숙에 대한 친일파 박정희의 애정 표현은 같은 친일파인 이명세의 질투심을 유발할 만했다. "예전에 김창숙의 우리나라와 우리들의 우리나라는 달랐는데, 어떻게 우리 편인 박정희가 김창숙에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나?" 하고 이명세는 분개했을지 모른다.
박정희 집안과 이명세 집안 사이에는 위와 같이 김창숙으로 인한 불편한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불편한 역사가 2014년 추석 직전에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사회적 비판을 무릅쓰고 이명세의 손녀인 이인호를 공영방송 수장인 KBS 이사장에 앉혀놓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두 가문의 불편한 역사는 상당 정도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권을 쥔 친일파가 친일파를 서운하게 만들고, 정권을 쥔 친일파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친일파 집안과의 불편한 역사를 청산하고...
이렇게 대한민국에서는 친일파 가문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땅이 친일파가 청산된 땅이라면,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미군과 대한민국정부의 통치가 총독부의 통치와 전혀 다른 것이라면,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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