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2] 23년을 삼성전자에서 일한 주아무개씨의 백혈병 사망 뒤늦게 알려져…
끝없는 사망 소식에도 산재 진상 규명은 요원한가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던 주아무개(51)씨가
지난해 11월14일 숨진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노동계는 주씨의 죽음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 등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림프종 등 희귀질환에 걸려 숨진 노동자가 15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지금 희귀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는 89명에 달한다.
15번째 백혈병 사망자
주씨는 1983년 8월1일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대학 졸업 뒤 엔지니어로 입사한 그는 2006년 1월까지 23년을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최초 라인인 1라인부터 6~7라인까지20년 넘게 일해왔다.
그가 10년가량 일한 3라인은 2006년과 2007년에 백혈병으로 숨진 이숙영씨와 황유미씨가 일한 곳이기도 하다. 주씨는 삼성전자 부장 시절인 2006년 1월 삼성전기로 발령이 났다. 이어 3월에 급성골수성백혈병을 확인하면서 퇴직했다.
그는 2010년 5월 근로복지공단에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산재 인정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진술서를 제출했다. 이를 보면 위험한 환경에서 일했음에도 제대로 된 방지책조차 없었다. "사원부터 시작하여 대리, 과장, 부장으로 진급하여왔고 부장 직급을 달고부터는 예전만큼 현장을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근무 기간 대부분을 클린룸 라인 안에서 보냈고 담당 공정이 디퓨전이었기 때문에 1~7라인의 디퓨전 공정 파트에서 일했습니다." 디퓨전 공정은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표면에 화학물질을 주입해 원하는 깊이와 농도로 필요한 입자가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주씨는 이 과정에서 화학물질과 관련한 아무런 주의를 받지 못했다. "폭발이나 화상 같은 눈에 보이는 사고 위험이 있는 화학물질 등에 대한 사용시에는 그러한 주의를 받으나 발암 위험이 있는 물질의 경우에는 특별한 주의사항은 없었습니다."
회사 쪽은 위험 예방에도 소극적이었다. "방사선 발생 부서에서는 방사선 측정 배지를 달고 일해야 하는데 남자들이 귀찮아서 안 하기도 했습니다. 1983년부터 2006년까지 근무하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인체 독성이나 환경영향에 대한 제재가 상대적으로 덜하였기 때문에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물질도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성분분석까지 하면서 사용한 것이 아니고 케미컬(화학물질)의 부산물에 대한 건강 영향까지 생각하면서 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가 백혈병 발병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삼성전기로 발령받은 뒤였다. "원래 건강 문제에 좀 둔하게 대처하여 기침이 심해지고 빈혈이 심해지고 했지만 특별하게 병원에 방문하지 않다가 (발령받은 삼성전기의) 상무와 같이 등산을 하는데 힘이 들어 산에 오르지 못할 정도여서 병원에 갔고 당시 골수 검사 끝에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어 긴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산재 신청은 투병 생활 5년이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중증 암환자로 진료비의 5%만 비용을 부담하면 됐지만, 그 혜택은 최대 5년이었다. 당시 주씨의 아내는 시민단체인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과의 인터뷰에서 남편에 대해 "꿈에도 이건희 회장이 지시를 내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라며 뒤늦게 산재 신청 소송에 참여한 이유를 밝혔다. 또 "삼성전자는 퇴직했으니 치료비를 줄 수 없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주씨는 5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지난해 11월 숨을 거뒀다. 이후 주씨의 아내는 지난해 12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산재 인정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이종란 노무사에게 '대리인 위임 해지 통보'를 보내왔다. 이종란 노무사는 "과거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씨의 사례에 비춰볼 때 정황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투병한 박지연씨는 지난해 3월31일 숨졌다. 박씨가 투병 중일 때는 가족들이 삼성전자 쪽에 산재 보상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박씨가 숨진 뒤 산재 인정 행정소송을 취하했다. 이에 대해 지난해 7월 박씨의 어머니는 "삼성전자에서 4억원을 받고 회사 쪽 요구대로 소송을 취하했다. 삼성이 우리 가족을 매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지속되는 삼성의 유족 회유
삼성 쪽의 회유는 산재 인정 소송을 벌이고 있는 다른 유족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삼성 백혈병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56)씨는 지난해 12월15일 삼성전자 기흥공장 인사과 간부가 황씨의 강원도 속초 집으로 찾아왔다고 밝혔다. 이후 12월28일에도 황씨를 찾아왔고, 올 들어서는 전화로 연락하고 있다. 황씨는 "예전에도 합의하자고 했는데 이번에도 금품을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며 "굶어죽어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딸을 먼저 보낸 아버지는 1월14일 천안을 찾았다. 삼성전자 LCD 탕정공장에서 일하다 지난 1월1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아무개씨 유족의 기자회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황씨는 이 자리에서 "노동조합다운 노동조합이 없어서 젊은이가 죽는 일이 또 발생했다"며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 없으려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해외에서 번지는 '삼성 책임 요구 청원운동'
전세계 전문가 460명 "산재 인정하라"
해외에서 전문가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삼성 노동자에게 일어난 백혈병 등에 대해 삼성의 책임을 요구하는 청원운동(www.gopetition.com/petition/40246.html)을 벌이고 있다. 이 운동은 '실리콘밸리독성물질방지연합'(SVTC)과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ICRT)을 설립한 테드 스미스 박사에 의해 지난해 10월29일 시작됐다.
스미스 박사는 < 한겨레21 > 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전세계에서 보건복지 분야의 저명한 박사와 교수 등 460명 이상이 서명에 참여했다"며 "영국 스털링대학의 앤드루 왓슨 교수나 미국 보스턴대학의 리처드 클랩 교수 등 참여자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전문가"라고 밝혔다. 또 "삼성은 지난 20년 동안 전자산업의 세계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고 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1위가 됐지만, 노동자들은 그런 제품을 생산하면서 백혈병 등 질병을 앓게 됐다"며 "우리는 삼성과 한국 정부가 산재를 인정하고 좀더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기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미스 박사는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 > (Challenging The Chip)의 저자이기도 하다.
지난 1월11일 삼성전자 LCD 탕정공장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현씨의 죽음 소식도 해외에 순식간에 퍼졌다.
유럽의 전자산업 감시 시민단체인 굿일렉트로닉스(www.goodelectronics.org)는 1월13일(한국시각) 여러 시민단체와 회원들에게 김씨의 죽음을 알렸다. '젊은 삼성 노동자의 자살'(Suicide of young Samsung worker in Korea)이라는 제목의 전자우편에서 "김씨의 자살은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서 비슷한 죽음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일어나 더욱 우려된다"며 "삼성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해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필요성을 또 한 번 일깨워준다"고 밝혔다. 또 "김씨를 추모하면서 삼성에 책임을 묻는 캠페인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며 스미스 박사가 주도하는 청원 사이트를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