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찾아 수천 리 행군해 탈북한 북한군 스키여단 참모장[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입력 2020.09.25. 13:59 댓글 6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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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북한군 스키여단 참모장(대좌)이었던 정명운 씨.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 그가 모처럼 카메라 앞에 앉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18세 딸이 사라졌다.
모 대학 음악과에 다니던 딸이 갑자기 없어졌다.
집에 숨겨두었던 1200달러도 없어졌다. 2006년 3월 2일에 일어난 일이다.
일주일 남짓 지나자 보위부에서 찾아와 그를 끌고 갔다.
“딸을 어디다 빼돌렸냐”며 한 달 내내 조사와 고문이 이어졌다.
4월 11일 그는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그 사이 딸이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냈다.
딸이 탈북한 동선을 추적해 중국의 지인을 동원했지만 딸을 찾지 못했다는 대답이 왔다.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새벽 정명운 씨(58)는 딸을 찾겠다고 두만강을 넘었다.
당시 마흔 넷인 그는 북한군 특수부대인 스키부대 여단참모장(대좌) 출신이었다.
막상 중국에 와보니 얼마 전까지 옌지(延吉)에 머무르던 딸이 또 사라졌다.
수소문하며 며칠 지체하는 사이 북에선 비상이 걸렸다.
중국 공안에 정 씨를 무조건 잡아 넘겨달라는 협조 공문이 전달됐다.
옌지에 가서 딸을 찾아 몰래 북에 돌아가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어차피 이젠 돌아가 봐야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는 한국으로 가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탈출
4월 19일 그는 옌지에서 공안에 체포됐다.
한족 택시기사가 신고해 공안차 7대가 와 차에서 내리는 그를 덮쳤다.
북한에선 빨리 넘기라고 독촉했다.
4월 22일 새벽 그는 북송길에 올랐다.
당시 공안은 외부 시선을 의식해 깊은 밤에 탈북자들을 북송했다.
승용차 앞에 2명이 타고, 뒷좌석에 그를 가운데 앉히고 양쪽에 공안이 앉았다.
그의 오른손과 공안의 왼손이 하나의 수갑으로 묶여 있었다.
새벽이라 도로엔 차도 없었다.
승용차는 빠르게 투먼(圖們)으로 달렸다.
이제 끌려가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결단을 내렸다.
승용차 문을 벼락같이 열고 수갑을 함께 찬 공안을 밀치며 뛰어내렸다.
둘 다 아스팔트에 쓸리며 깊은 상처를 입었다.
수갑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멈춘 승용차에서 내린 공안들이 그를 포위했다.
정 씨는 몸에 품고 있던 칫솔을 꺼내 의식을 잃은 공안의 목을 겨누었다.
“수갑을 풀지 않으면 여기서 함께 죽겠다.”
공안들은 이미 정 씨가 어떤 경력의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공안은 한동안 고민하더니 대치 상태를 풀고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들도 부상 입은 동료를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던 것이다.
정 씨는 그 길로 옌지 시내에 숨어들어 지인의 집에 숨었다.
그곳에서 한달 넘게 부상을 입은 몸을 치료했다.
그동안 한국행을 타진했다.
지인의 지인이 다롄(大連)까지 오면 한국행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차와 버스 등 교통수단은 이용할 수 없었다.
그를 찾는 수배 전단이 사방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지인이 조선족들이 보는 한글로 된 중국 지도를 서점에서 구해주었다.
익숙한 군용지도가 아니었다.
밖에 나가 북두칠성을 기준으로 그 지도 위에 걸어갈 노선을 그었다.
현지에 가서 도시와 마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각 지명 위에 중국어 발음을 적었다.
산맥을 지도에서 숙지했다.
여단 참모장 시절 늘 했던 지도 작업이었다.
6월 5일 밤 배낭에 옷가지와 운동화 세 컬레,
중국돈 2000위안을 넣고 출발했다.
옌지에서 다롄까지는 직선거리로 850㎞ 정도 된다.
그러나 직선 코스 안엔 북한 땅이 들어 있어 선양(沈阳)을 1차 목표로 에돌아가면 1000㎞ 넘게 늘어난다.
거의 3000리를 행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전 구간 내내 백두산 산맥을 타고 넘는 험준한 노선이었다.
#행군
그는 북한군 특수부대 시절로 돌아가 강행군을 시작했다.
낮에 11시~2시 사이 좀 자고 나머지 시간에는 산을 타고 이동했다.
군에 있을 때 특수부대 행군 속도는 급속 행군시 시속 12㎞, 보통 행군시 시속 10㎞ 였다.
일반인들은 달려야 하는 속도를 경보병부대는 무기와 장구를 휴대하고 이동하게끔 훈련하는 것이다.
먹을 것을 구할 때는 새 옷을 갈아입고 마을에 나가 빵을 사서 배낭에 넣은 뒤
산에선 다시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끔 지나가는 화물 트럭에 몰래 매달려 타고 가기도 했는데, 도중에 차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갔다.
먼 길을 돌아 나오느라 고생하는 바람에 함부로 탈수도 없었다.
길을 걸으며 북에서 배웠던 혁명가요를 자기 식대로 개사하며 불렀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7월 12일 마침내 다롄에 도착했다. 무려 37일이나 걸렸다.
다롄에 도착해서도 한국행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7월 15일 가짜 여권을 만들어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다
들키는 바람에 또 체포의 순간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번엔 단둥(丹东)에 옮겨와 한국으로 가는 여객선을 알아보았다.
신의주가 바라보이는 단둥의 압록강 옆에서 마침내 한국행 브로커와 접선했다.
마침내 7월 20일 인천항에 내렸다.
가짜 여권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는데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항을 지나가는 나이든 경찰을 붙들고 “조선에서 왔다”고 하니 그가 깜짝 놀라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상봉
그가 서울의 조사기관에서 조사받던 어느 날 창밖에서 그처럼 그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내다보니 운동장에서 딸이 자기 또래들과 떠들며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딸을 목청껏 불렀다. 딸도 창문을 올려다보고 굳어졌다.
“북한 집에 있어야 할 아버지가 어떻게 서울의 조사기관에 있는거지?”
정 씨는 분노했다. “내 딸이 이 건물에서 조사를 받는 걸 알면서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며
일주일 동안 조사를 거부했다. 그런 끝에 딸과 만날 수 있었다.
딸은 어려서부터 한국 드라마와 음악에 빠졌다.
대학에서 친한 화교 친구가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마침 먼저 한국에 간 고모와도 연락이 됐다.
부모에게 말하면 못 가게 할 것이 뻔하니 집에 있는 돈 1200달러를 가지고 도망쳤다.
50달러를 국경경비대 중대장에게 주고 무사히 두만강을 넘어 옌지로 갔다.
18세, 대학 2학년 때였다.
그가 옌지의 지인의 집에 숨어 있을 때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왔다.
딸은 “컴퓨터를 하는데 웬 남자 둘이 들어와 집안을 둘러보고 나갔다”고 했다.
그들은 정 씨에게 그 집엔 딸이 없다고 전했다.
정 씨가 딸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단발머리라고 알려주었는데
그새 딸은 중국에 도착해 가짜로 긴 머리를 붙였던 것이다.
딸을 찾지 못하자 결국 정 씨가 두만강을 넘었다.
아버지가 두만강을 넘던 4월 15일 딸은 한국행 길에 올라 이미 미얀마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7월 13일 한국에 입국했다.
아버지보다 일주일 먼저 도착한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딸을 찾아 탈북했고, 37일을 행군해 다롄까지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정명운 씨가 2006년 한국에 도착한 직후에 찍은 사진. 정명운 씨 제공
#토대
정 씨는 한국에 와서 독방에 갇혀 3개월을 조사받았다고 회상했다.
남들은 보통 1개월이면 끝나는 조사였다.
정 씨는 한국에 3개의 신분증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최고사령부 작전지휘조 신임장,
예비역 군관 신분증, 영예군인증이었다.
그의 북한 경력은 특이했다.
정 씨는 자신의 토대가 혁명가 집안이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항일유격대 최현 부대에 원호물자를 운반하다가
악명 높은 이도선부대에 체포돼 처형됐다고 한다.
최현은 최룡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부친이다.
정 씨의 부친은 6.25전쟁 시기 최현 부대 정찰소대장을 지냈다.
그 정찰소대가 나중에 경보병부대를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의 전신이라고 한다.
전후 정 씨의 부친은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잠바부대’ 선전부장(상좌)을 지냈다.
일명 ‘농산대’라고 불린 여단급 잠바부대는 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을 하기 위해 만든 당시 북한의 최정예 특수부대였다.
나중에 이 부대는 ‘신천복수대’란 이름으로도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부친은 훈련장에 찾아와 무리한 도하훈련 지시를 내려
7명을 익사하게 만든 김창봉 민족보위상에게 반발하다 회창의 북한군 노동연대로 끌려가 수감됐다고 한다.
이곳은 군 교도소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부친은 줄기차게 김일성에게 ‘신소편지’를 올려
김창봉 일당 숙청에 명분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석방된 부친은 군 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고 제대돼 북한에서 유명한 식료공장
당비서로 옮겨가 은퇴 연령을 지나 수십 년을 일했다.
#아동병기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정 씨는 1977년에 특수부대에 뽑혔다고 말했다.
중학교 5학년, 만 15세 때였다.
당시 북한은 남조선 혁명이란 명분으로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뽑아 인간병기로 키웠다.
뽑혀 갈 때도 집에 당일에 통보할 정도로 극비 부대였다.
이곳에서 정 씨는 전술, 사격, 단도조법, 육박전, 수영, 한국 무기 다루는 법 등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쓸 수 있게” 훈련받았다.
개천에 가선 기관차 모는 법을, 순천비행장에선 쌍발비행기를 모는 법을,
정주에선 자동차 모는 법을 배웠다.
어린 소년들에게 담력을 키워주기 위해 시체를 파는 훈련, 15일 굶기 등이 강요됐다.
그러나 1980년 임무 수행 중 분계선 부근에서 대전차 지뢰가 터져 조원 3명이 즉사하고,
그는 발에 큰 부상을 입고 몇 달을 치료받았다.
부상으로 몸이 편치 않자 당국은 그해 10월 그를 강건군관학교에 보냈다.
1982년 학교를 졸업한 뒤엔 654군부대로 불리는 스키여단에 소대장으로 임명됐다.
#최연소 여단 참모장
그때부터 그는 승승장구했다. 2년 뒤 중대장
다시 2년 뒤 대대 참모장 등을 거쳐 91년 여단 참모장까지 올라갔다.
30세 여단 참모장은 북한군에서도 이례적인 것이다.
북한에서 특수부대는 한 급 높여 대우를 해준다.
가령 특수부대 대대장은 대좌인데,
이는 일반 보병부대 연대장 직급이다.
정 씨는 북한군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여단 참모장이 됐고,
1992년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김정일군사연구원반을 4년 다닌 뒤 1996년 졸업했다고 한다.
장령이 되려면 이 코스를 수련해야 한다.
1991년에 상좌가 됐고,
34세 때인 1996년에 대좌로 진급했다고 한다.
그의 여단은 전쟁 시 태백산맥을 타고 내려와 전라도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고 한다.
훈련도 전라도 모형 축소판을 만들어 진행했다.
여단 참모장실 옆 기무과에는 콘크리트 50㎝ 두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금고가 있는데
그 안에 전시 작전 명령을 담은 밀봉된 봉투가 있었다고 했다.
전쟁 시 여단 행동 방향을 지시한 봉투라고 들었지만 참모장 하는 기간 뜯어볼 수는 없었다고 한다.
스키 여단 구성은 독특하다.
120명 중대가 4개 소대, 2개 타격대로 구성돼 있고 전쟁 시 1타격대는 중대장이 인솔,
2타격대는 정치지도원 또는 군사부중대장이 인솔한다.
2000년 초반 그의 여단은 자강도로 이동해 군수기지 방어 임무를 맡았다.
한국의 특전사가 침투할 경우 ‘반특공대’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사고
승승장구하던 정 씨는 1997년 1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스키여단은 동계, 하계 훈련을 한달 씩 한다.
여름훈련은 자전거를 메고 다니며 하고, 겨울은 스키를 타고 한다.
기동 속도를 높이기 위해 계절별로 스키부대와 자전거부대 역할을 하도록 훈련하는 것.
훈련은 보통 1000리(400㎞)를 이동하며 하는데 산악 70%, 평지 30%를 도보로 행군한다.
여름엔 주로 함남 맹산에 있는 종합훈련장에서 하고, 겨울은 백두산에 옮겨가 한다.
그해 겨울 그의 여단도 백두산 깊은 눈 속에 들어가 이동했다.
어느 날 스키를 타고 뒤를 따르던 무전수가 넘어지면서 24㎏짜리 무전기가 그의 뒤통수를 쳤다.
정신 잃으며 쓰러지는 순간 뒤따르던 병사의 스키 날이 왼손을 타고 넘었다.
정 씨에 따르면 스키부대 훈련은 워낙 격렬해 각 중대별로 1년에 1명 정도는 사고로 죽는다고 했다.
정 씨가 사고를 당한 백두산 리명수 근처 산림은 헬기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병사들이 며칠 동안 깊은 눈길을 헤치며 걸어 나와 삼지연비행장까지 그를 이송했다.
그는 특권층만 갈 수 있는 평양의 봉화진료소에 옮겨가 치료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눈길을 헤쳐 나오는 동안 손의 상처가 썩어 특발성 괴저가 시작됐다.
병원에서 끝내 엄지손가락만 남기고 왼손가락들을 모두 절단해야 했다.
하반신 마비도 풀리지 않아 1999년까지 병상에 누워 있었다.
손가락이 없어진 이상 군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북한군 최연소 여단 참모장은 37세인 1999년 제대됐다.
1977년 아동병기로 발탁돼 떠났던 두만강 옆 고향 땅에 22년 만에 돌아왔다.
처음엔 해당 지역의 당 간부로 임명됐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수하에 100여명의 직원을 둔 작은 단위 책임자로 옮겨갔다.
#정착
그와 딸이 한국에 온 뒤 북에 남은 부인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군에 입대해 좋은 부대에 있던 아들은 오지로 쫓겨났다.
정 씨와 딸은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다.
2009년 부인을 한국에 데려왔고, 끝내 오기를 거부하던 아들도 마침내 2010년 한국에 왔다.
정 씨는 “처음 전화통화를 할 때 아들이 군에서 어떻게나 세뇌됐는지 자기 앞길을 막은
고모와 여동생을 총으로 쏴죽이겠다고 펄펄 뛰었다”고 말했다.
아들을 포기하고 돈을 보내지 않았다.
돈이 가지 않자 6개월 만에 아들이 중국에 들어와 “나도 데려가 달라”고 전화를 해왔다.
그 아들은 연세대와 해외 유학을 거쳐 현재 유명 외국계 기업에서 인정받는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정 씨는 지금 한국 공기업 직원으로 살고 있다.
지금까지 언론을 멀리하고 살았지만 이젠 은퇴할 때가 되니 굳이 숨기고 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여전히 숨기고 있는 비밀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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