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912 :대지재사...(조의, 권재진)
작성자장병창 @ 2020.05.11 06:04:04
도청신도시 예천 912 : 대지재사...(부, 용문면 출신 권재진 전 법무부장관, 9일 별세...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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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재사(大枝齋舍) [建物] :
호명면 직산리 588번지 행갈에 있는 사묘재실(祠廟齋室) 1동으로,
경상부도 유형문화재 제173호(1993.9.29 지정)이다.
김원채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 : 1467-1535)에게 제사드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김양진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사람으로, 학행이 높고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 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며,
주변 건물들의 배치 형태는 ㄷ 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안쪽 재료를 짜 맞춘 수법과 문짝을 다는 부분의 구조 수법들이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귀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文化財廳 홈페이지 2002, www.ocp.go.kr 2002)
. 풍산인 유연당 김대현(悠然堂 金大賢, 1553-1602)이 시로써 이르기를,
"대지재사(大枝齋舍) 벽에 써서 붙임//
해질녘 깊은 산에 홀로 누대에 기대니/ 멀고 먼 나의 심사가 아득하구나/
떠나려니 나도 몰래 다시 머리 돌려지고/ 선영에는 서리내려 또 한 해가 가는구나//"라고 하였다.
대지재사 [記事] :
대지재사(大枝齋舍)이야기(윤천근-안동대 교수)
종가 / 고택/ 2008.07.13/ 金度鈞/ [대지재사 가는 길]
: 호명에서 예천 나가는 길, 길은 4차선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4차선 길을 치달려 가는 것은 시선을 앞쪽으로만 유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속도가 높을수록 시야는 좁아진다.
그러므로 4차선 길은 문화적인 길이 아니다.
문화는 여유 속에서만 생겨난다.
속도는 여유를 증발시키고 문화로 나아갈 기회를 박탈한다.
목표가 뚜렷하게 있을 때에만 우리는 속도를 뛰어넘어 특별한 시선방향을 확보할 수 있다.
호명과 예천 사이, 직산에 이르면 도로의 서쪽 편으로 멀리 골짜기 속에 자리잡은 기와집들이 보인다.
큰집이고, 길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집이지만,
그 집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고, 우리를 4차선 도로로부터 벗어나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권능을 행사할 수는 없다.
4차선 도로 위에 올라서는 순간 우리는 목표점을 향해 치달려가는 현대적인 방식의 행인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4차선 도로를 벗어나 그 옛집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옛집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목표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직산의 산천 속 깊이 숨어있는 이 집은 대지재사라 하였다.
풍산김씨 허백당 김양진金楊震의 묘사를 돌보기 위한 재사이다.
안동의 오미동은 풍산김씨의 세거지이다.
김양진은 이곳에 살지는 않았지만 자주 내왕하였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조선에서의 일이다.
오미동이라는 이름은 김양진의 증손 김대현과 그 자제들로부터 비롯된다.
김대현은 8남을 두어 모두 진사가 되었는데,
그 중 다섯은 과거 급제를 하였다.
그러므로 인조임금은 그들의 생가가 있는 마을에 오미동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김양진 시대에 오미동은 오릉동五陵洞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에는 고려조에도 풍산 김문의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송도로 떠났다가 다시 이주한 것은 7세 김자순金子純 때라고 한다.
김자순은 한양 장의동에서 오미동(오릉동)으로 낙향하였다.
김양진은 김자순의 증손자이다.
김자순의 낙향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후손들은 여전히 한양에 살았다.
풍산김씨 일문의 완전한 낙향은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 때에 이루어진다.
잠암 김의정은 기묘사화 후에 이곳으로 완전히 낙향을 하여 마을 이름을 오무동五畝洞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후에 또 오미동으로 바뀌는 것이다.
오미동의 뒷산을 넘으면 예천의 직산이다.
여기 광석산의 동쪽 기슭에 대지재사는 자리잡고 있다.
장마철은 한 달을 두고 줄기차게 비를 뿌려대고 있었다.
오는 듯 하다가 말고, 마는 듯 하다가 오고,
비를 염두에 두지 않고는 생활을 설계할 수 없는 것이 장마철이다.
그런데 참으로 오랜만에 햇볕이 쨍 나는 날이었다.
너무 좋은 날씨이기도 하고, 신도비각 너무 나쁜 날씨이기도 하였다.
장마철의 한가운데에서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내리쬐니 모든 것이 다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후텁지근하고, 육신은 무더위에 익숙하여 있지 않았다.
숨이 턱에 찰 정도의 열기가 천지를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4차선 도로에서 벗어나 직산의 산골짜기를 파고드는 길은 분지의 한끝을 타고 나아가는 1.5차선 정도의 포장도로였다.
도로의 한쪽은 벼포기가 짙푸르게 자라고 있는 논이었고,
다른 한쪽은 길 가장자리까지 타고 내린 산기슭이었다.
길의 양켠으로는 풀숲이었다. 장마철에는 풀들이 고속성장을 한다.
장마철이 없으면 풀들은 키를 키울 수분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건기와 우기가 나뉘어져 있지는 않지만,
장마철에는 우기와 비슷하게 대부분의 수분이 공급되고,
장마철이 아닐 때에는 건기와 비슷하게 별로 비오는 날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 한국의 날씨이다.
우리는 누구나 장마철에는 풀이 자라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길이 조금 경사면을 그리며 올라붙으면, 저수지가 한쪽으로 나타난다.
상당한 규모의 저수지에는 물이 가득하였고,
물 표면은 자잘한 물풀들로 가득 덮여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대지재사 영역이다.
대지재사 가는 길의 양켠에 숲을 이루고 있는 풀들은 그냥 놓아두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기에는 제초제가 뿌려졌고, 풀들은 흉물스럽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대지재사의 신도비각] : 대지재사는 큰집이다.
골짜기는 온통 대지재사의 영역이다.
집이라고는 재사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을이 들어서야 마땅한 공간 속에 재사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낯선 풍경이다.
우리의 산천은 비좁고, 일정한 규모 이상의 분지 속에는 정해놓고 마을이 들어앉아 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 대지재사 영역은 통상의 분지보다 큰 분지인데 마을은 없고 재사뿐이다.
이 부근 농지가 모두 재사에 딸린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풍경이라고 하겠다.
재사의 입구에는 동으로 신도비각, 서로 느티나무가 갈라져 서 있다.
느티나무는 젊은 나무이다. 그것은 중간규모의 바위 한쪽에 뿌리를 내리고 섰다.
나무보다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신도비각이 더 고색창연하다.
신도비각은 대문을 함께 갖추고 있다.
울타리는 없는데 대문이 비각의 추녀에 이르는 높이로 앞을 막고 선 것이다.
대문이나 비각이나 키가 훌쩍 커 보인다.
날씬한 품새가 특별히 눈길을 끈다.
기와도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옛 신도비각은 다른 자리에 있었다고 하니,
생각만큼 오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비각의 대문은 추녀는 직선으로 지어져 있고 용마루는 조금가운데가 낮은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다.
그것은 뒤의 비각 지붕의 곡선들과 기가 막힌 화음을 연출한다.
비각의 지붕은 곡선이 유난히 강조되어 있다.
이 건물에서 보게 되는 곡선은 한국 건축미학의 일반적 범주를 벗어난다.
추녀의 선은 사면이 다 날아갈 듯한 호선이다.
지붕은 두껍고, 오똑하다.
좁은 평면을 이루고 있는 지붕의 모습은 넓이가 두께의 두 배 정도를 이루고 있다.
두터운 지붕은 아래 추녀 선과 위 용마루 선 사이에 상당한 간격을 만들어낸다.
통상의 경우보다 옆으로 펼쳐진 길이가 위로 솟구친 길이보다 짧은 것이다.
그것은 이 지붕에 오똑 솟은 느낌을 주고,
비각의 전체적인 미학을 날렵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완성시켜 준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축소된 모습이다.
추녀의 양쪽 끝이 너무 들어올려져 있어서 아래쪽 지붕 천정 구조가 드러나 보이기까지 한다.
처마 선이 날아오르듯 출렁거리니 용마루 선 역시 그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위와 아래가 일치되는 곡선의 미학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면 지붕의 선들은
서로 서걱대는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비각의 아래쪽은 기둥과 나무살창으로 되어 있다. 너무 직선이 강조된 모습이다. 이 부분에서 직선의 경색된 분위기를 해소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네 기둥의 둥근 모습이다. 동일함의 미학은 단순하고 무미건조하다는 약점을 갖는다. 이러한 약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금 다른 미학을 섞어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비각의 아랫부분과 위쪽 지붕 부분이 서로 다른 미학적 특징을 갖게 만들어 놓은 것은 적절한 선택이다. 비각의 지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곡선, 곡선, 또 곡선이다. 들림추녀가 만들어내는 곡선이 크게, 아니면 길게 휘어지는 곡선이라면, 그러한 흔들림은 용마루 선의 작게, 또는 짧게 느즈러지는 곡선으로 마무리된다. 지붕 평면을 덮은 암기와 수키와가 만들어 내는 자잘한 곡선들은 곡선의 미학을 이루고 있는 평면 전체에 잔잔한 변화를 불러온다. 잘게 흔들리고, 크게 흔들리고, 그렇게 비각의 지붕에서 곡선의 미학은 화려한 비상의 군무를 추는 느낌을 탄주한다. 너무 흔들리고, 너무 떠 있는 분위기이다.
이것을 눌러 앉히는 역할을 하는 것은 지붕의 사면을 이루고 있는 선이다. 아래 지붕의 추녀가 한껏 들어올려져서 끝나는 지점에서 지붕 선은 네 귀퉁이에서 수평선을 그리며 안쪽으로 좁혀진다. 그렇게 하여 반쯤의 길이가 수평을 이루는 지붕 선으로 단숨에 좁혀지고, 거기서 다시 수선의 지붕선을 그리며 지붕은 용마루 선과 만난다. 여기 중간부위에서 지붕은 짧고 굵은 횡선과 수선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횡선과 수선은 지붕면에서 움직이는 곡선들을 효과적으로 눌러 앉히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게 하여 지붕의 곡선 미학은 하늘로 날아오르지 않고 적절하게 균형을 잡으며 우리의 시선 속에 눌러앉게 되는 것이다. 비각 안에는 커다란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이 비석은 특히 거북바위가 일품이다. 거북은 살이 찌고 둔중한 모습이다. 거북의 머리는 간략화된 양식이 추구되고 있다. 그저 뭉툭한 머리에 이목구비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 전부이다. 그 무신경한 듯한 거북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화려한 미학으로 이루어져 있는 비각 안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혀 이질적인 이 거북의 단순하고 투박함은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게 된다. 단순함 속에서 단순함은 빛을 낼 수 없다. 화려함 속에서는 화려함이 힘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미학의 일반적 원칙이다. 화려함 속에 단순함이 조금 섞여 있을 때, 그 단순함은 최고의 빛을 발하고, 화려함의 미학을 완성시키게 된다. 대지재사의 비각 영역에서는 비신을 올려 세우고 있는 거북돌이 바로 그렇게 화려함의 미학을 완성시키는 단순함의 요소였다.
[대지재사] : 대지재사는 규모가 큰 집이다. 이것은 트인 미음자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지재사 앞에는 커다란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73호/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538번지/ 이 건물은 조선 세조에서 중종 때 문신이며 청백리인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1467-1535)을 제향하기 위해 후손들이 400여 년 전에 세운 재사이다. 뒤쪽에 낮은 야산을 의지하여 동향으로 위치하였는데 앞쪽에는 주사가 서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튼 미음자 형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이중기단 위에 디귿자로 배치되어 있다. 자연적 초석을 놓았고, 양 측면은 네모기둥, 후면 대청 쪽은 둥근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중 중앙 3칸이 우물마루를 깐 대청이고 양 퇴칸은 각 2칸통의 온돌로 꾸며져 있다.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앞으로 나서 있는 것은 주사 건물이다. 정면에서 보면 앞 건물은 6칸 규모이다. 건물은 석축을 쌓아올린 대좌 위에 올라서 있다. 석축은 오른쪽 부분에서는 세 줄, 또는 네 줄로 이루어져 있고, 왼쪽 부분으로는 두 줄, 또는 세 줄로 이루어져 있다. 대좌는 중간영역이 한단 높고 좌우 양쪽 영역은 한단 낮은 석축이다. 이 건물의 정면 벽면을 꾸미고 있는 것은 불균형의 미학이다. 벽면들은 각 면이 다 다르게 꾸며져 있다. 벽면의 분할 비례, 각재가 수선으로, 또는 횡선으로 질러져 있는 모습은 하나같이 다 다르다. 문, 또는 창문의 모습이나 크기, 그것들이 붙어있는 위치 역시 다 다르다. 대문은 왼쪽 제2칸에 마련되어 있다. 대문의 문지방은 아래쪽으로 배가 나온 호선이다. 지붕은 들림이 없는 직선이다. 주사건물은 디귿자 형상을 북쪽을 향하여 열어 놓은 모습이다. 왼쪽의 연결채는 4칸 규모이다. 오른쪽 연결채는 3칸 규모이다. 안에서 보면 앞 건물채는 좌우의 날개부분에 길고 짧음에 차이가 있다. 이 불균형은 오른쪽 방향에 두 칸 규모의 목조 방을 두기 위한 배려이다. 목조방은 이 건물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이것은 아래 건물채 오른쪽 날개 건물 위에, 위쪽 재사건물의 아래쪽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왼쪽 방향을 바라보며 옆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왼쪽 방향은 두 칸 규모이고, 아래쪽 방향은 한 칸 규모이다. 칸의 크기는 통상의 경우보다 조금 짧다는 느낌이다. 이 목조방은 바닥을 목판을 깔고 벽은 판자로 빈틈없이 싸발랐다. 벽을 처리한 방식은 사각의 각재를 폭을 좁혀 수선 방향으로 촘촘히 세우고, 그 안쪽으로 판재를 횡선방향으로 빈틈없이 박아올린 모습니다. 목재의 색감은 윤기가 흐르고 거무스름한 느낌이다. 기름을 먹여 목재를 잘 관리한 모양이다. 이 목조방의 용도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건물은 아래쪽 주사건물과의 사이에 두 쪽 규모의 나무판 문을 두고 있다. 두 건물이 조금 떨어져 있는 것이다. 벽면도 아래쪽 주사건물보다는 더 오른쪽으로 튀어나간 모습이다. 아래 주사건물의 바깥쪽 벽선은 위 재사 건물의 측면 벽면의 선과 일치한다. 그 사이에 있는 이 목재방은 그와 같은 두 건물의 오른편 벽선보다 밖으로 반 칸 정도는 튀어나가 있는 모습인 것이다. 목조방은 위의 재사 건물 처마 아래로 자리 잡고 있다. 두 건물 사이에는 재사건물 뜨락 정도의 간격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재사건물과 목조방 사이의 간격은 주사의 왼쪽 건물과 재사건물 사이의 간격보다 좁다. 그 짧고 긴 부조화는 목조방을 사이에 끼워 넣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왼쪽의 주사건물과 재사 건물 사이의 간격은 담을 쌓아 메꾸었다. 주사건물이 놓인 평면과 재사건물이 놓인 평면이 다르므로 여기 간격을 메꾼 담은 2선으로 층을 이루는 모습이다.
재사의 안마당은 일반 집의 안마당보다는 넓다. 건물이 크니 안마당도 클 수 밖에 없는 것은 정한 이치이다. 재사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올라서 있다. 표면을 거칠게 다듬은 직사각형 자연석을 4단으로 쌓아 올렸다. 중간 크기의 돌들이다. 그러므로 전체 높이는 어른의 키 정도에 이른다. 마당으로부터는 8단의 계단을 밟고 뜨락에 오르도록 되어 있다. 재사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정면 제 3칸의 처마 밑으로는 대지재사라는 현판이 올라붙어 있다. 양쪽 끝으로는 각 1칸의 통방을 두었다. 중앙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마루방이다. 마루방 영역은 앞뒤로 나무판 벽을 마련하고, 각 칸마다 한가운데에 나무판문을 배치하였다. 앞쪽 중앙의 벽면 안에 들어있는 나무판 문은 규모가 크다. 입구역할을 하는 곳이니, 여기 두 쪽 나무판문은 문의 미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른 벽면의 나무판 문들은 문보다는 창의 미학을 반영한다. 재사 건물에서는 추녀 끝에 살짝 들어올려진 모습이 보인다. 재사 안에는 현판이 하나 게시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지곡 묘산 수호 입의 : 아래의 결의는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호명의 묘산은 우리 부모, 우리 선조의 유체와 혼백(體魄)이 의탁하고 있는 곳이다. 그것을 오래 지켜 나가서 폐허가 되지 않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자손된 사람의 정리로서 없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삼가 서애 유성룡 선생의 ?금계묘산수호입의?를 옮겨 쓰고 ?불사?(不祀), ?산직?(山直) 두 조항을 보탠다. 만일 훗날 불초한 자손이 있어 태만히 묘산을 살피지 않고 이 결의를 준수하지 않는다면 비단 우리 선조의 신령이 보우하지 대지재사 정면 않을 뿐만 아니라 국법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일족의 사람들은 모든 모임에서 이것을 통지하라. 이와 같은 죄로 성토되고 이와 같은 죄로 보여지는 행위를 완강하게 고치지 않는 경우에는 글로 지어 조상들의 묘에 고하고, 그 사유를 갖추어 관에 알려서 불효의 죄로 다스릴 것이니 가볍게 여기지 말 일이다. 1. 네 계절에 다 묘소에 오르는 것은 조상들이 해 오신 일이니 마땅히 잘 지켜서 가볍게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조 이상은 세대가 이미 멀어 묘소에 오르는 회수가 줄어들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산에 있는 묘소는 매년 다만 한식과 추석에만 묘제를 올리고 제수의 가짓수도 차등을 두어 줄이고, 새해와 단오에는 단지 술과 과일만을 진설한다. 1. 자손 중 묘제를 담당할 집에 유고가 있을 때에는 그 다음 집이 받아서 행한다. 아무 일도 없는데 일이 있다고 하거나, 끼니를 거른다는 이유 같은 것을 대어 묘제를 거르는 경우에는 일족이 연명하여 집강에게 알려 죄를 묻는다. 연달아 두 번 묘제를 거른 경우에는 관에 알려 죄를 묻는다. 1. 묘직 일을 하는 노비가 가령 세월이 오래 흘러 후손을 많이 생산하였다면 모두 묘직의 일에 속하게 하여 산아래 가까운 곳에 거주하게 할 일이며 대수가 오래 되었고 숫자가 많아졌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나누어 점유하려는 일을 하지 말 것이며, 다른 일을 하게 하지 말고 전적으로 묘산 수호의 일만 맡길 일이다. 영원히 바꾸지 말고 지켜나가기 바란다.
1. 산직은 다른 일에 돌리지 말고 침탈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노비를 태장으로 다스린다. 1. 묘제를 위한 전답 중 부근 산 아래에 있는 약간은 영원히 묘제 대상 조상에 속하게 하여 대수가 다하여 자손들이 묘제를 행하지 않게 되더라도 묘사를 위한 전답으로 묘직 노비를 시켜 행한다. 또 세수의 반은 재사에 비축하여 놓았다가 배향하고 소제하는 일에 쓰게 한다. 이 두 조항을 어겨서 행하지 않는 족인은 이 의논에 따라 관에 알리고 죄를 물어 유용한 제물을 돌려놓게 한다. 1. 재사에 속한 승려들은 힘닿는 대로 돌보아 이치에 맞지 않게 침탈당하는 법이 없이 편안히 일을 돌볼 수 있게 해야 한다. 1. 일족 중 식견과 의리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1인을 유사로 삼고, 산 속 집을 수호하는 일과 제례를 올리는 일을 다 감독하게 한다. 2년 임기 후에 바꾸는데 한식 제사 후에 족인들이 다 모여 순차적으로 직임을 맡는다.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한 사람은 가벼운 경우에는 노비를 태장으로 다스리고 무거운 경우에는 무리에서 쫓아낸다. 1. 제기가 파손되어 부족하게 되면 족인에게 회람문을 돌려 쌀을 거두어 용처를 분명히 적어 두고 순차에 따라 보충해 나갈 일이다./ 을해 정월 일/ 위의 ?불사산직?(不祀山直) 두 조항 외에는 모두 서애 선생이 정한 것들이다. 재사의 뒤쪽은 조금 경사가 급한 산록이다. 그 경사면을 자르고 올라서 있는 것은 사당이다. 허백당 김양진을 모신 곳이다.
[허백당 김양진] : 재사의 앞을 지키고 있는 신도비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허백당 김선생 신도비명>/ 공의 세계는 안동부 풍산현에서 시작되는데 시조로부터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이름이 높았던 조상들이 많았다. 고조부 안정安鼎이라는 분은 고려 때 벼슬하여 삼사 좌윤에까지 이르렀다. 자순子純이라는 분은 군기시 직장으로 증직 좌통례를 받았고, 종석從石이라는 분은 어려서 요절하였는데 증직 병조참의이다. 휘손徽孫이라는 분은 진산군수이고 증직 이조참판이다. 이분은 동지돈령부사 민효열閔孝悅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았다. 공은 바로 그분의 맏아들이다. 통례로부터 참판까지, 증직이 주어지는 것은 공이 귀해진 까닭이다. 공의 함자는 양진楊震, 자는 백기伯起이다./ 허백당은 풍산김씨 세계상 7세에 속하는 삼사좌윤공 김안정 金安鼎의 현손이고, 10세 진산군수 김휘손 金徽孫의 독자인 11세 공조참판 김양진 金楊震의 아호이다. 세조 13년 정해년 1467년에 출생하였고, 중종 30년 을미 1535년에 타계하였다. 향년 6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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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면 출신 권재진 전 법무부장관, 9일 별세... 명복을 빕니다.
권재진(예천군 용문면 출신 권재진 前법무부 장관 암투병 중 9일 오전 별세(향년 67)..) [기사]
: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바 있는 예천군 용문면 출신의
권재진 전 법무부 장관이 2020년 5월 9일 오전 암 투병 중 별세(향년 67세)했다.
권 전 장관은 경북고~서울대 법대(1972년)를 졸업, 문재인 대통령,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홍준표 의원, 정동영 전 의원 등과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72학번이다.
서울대 졸업 후 사법시험(20회)에 합격, 대검찰청 공안부장~대구.서울고검장 등을 역임했으며,
청와대 민정수석, 62대 법무부 장관에 올라 2011년 8월~13년 3월까지 장관직을 수행,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보숙 씨와 2남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11일 오전 6시 30분, 장지는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맛질) 선영이다.
참고 안내=빈소:삼성 서울병원 14호실. 발인:2020년 5월 11일(월) 오전 6시 30분
. 장지:경북 예천 제곡리(맞질 송골) 선영. 상주:권석현, 권석재.(정차모 기자 에천인터넷뉴스 20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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