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혁훈 기자의 벤처농업대학 日記-1]
'벤처'라는 말과 '농업'이라는 말은 왠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무려' 한국벤처농업대학이 있습니다.
입학생을 받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20년째가 됐습니다.
어디에 있냐고요? 충청남도 금산군입니다.
인삼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죠. 충남에서 가장 높은 해발 904m 서대산 자락에 벤처농업대학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식 학위가 수여되는 대학은 아닙니다.
그러나 매년 130~150여 명의 농업인이 이 학교에 입학해 1년 과정을 마칩니다.
수업은 어떻게 하냐고요? 매월 셋째주 토요일에 모여 일요일까지 1박2일로 진행됩니다.
한 달도 거르는 날 없이 1년 열두 달 열립니다.
공식 학위가 수여되지 않으니 소속감이 적을 거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이 개근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4회 이상 결석하면 졸업장을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졸업장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벤처농업대학 학생들은 열정적입니다.
저는 지난 16일에 있었던 19기 학생들 졸업식을 참관했습니다.
사실 졸업식이 끝나고 한 시간 뒤 열릴 입학식 대상자인데, 선배들 졸업식을 보기위해 몇 시간 미리 도착했습니다.
졸업식과 입학식 모두 3월에 열렸어야 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연기를 거듭한 끝에 이날 열린 겁니다.
졸업생은 총 130여 명인데, 코로나19 여파로 모든 학생이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날 졸업식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20대 청년 농부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70대 농업인까지 격의 없이 어울리며
서로 검은색 학사모 위치를 잡아주며 웃고 즐기는 모습에서 이곳 분위기가 짐작됐습니다.
이날 졸업식은 벤처농업대학 설립자 겸 운영자이자 전임교수인
민승규 한경대 석좌교수(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사회로 진행됐습니다.
언젠가 따로 자세히 소개 드리겠지만 민 교수는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삼성경제연구소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농업의 새로운 성공모델을 찾기 위해 온몸을 바쳐온 최고의 농업전문가입니다.
흔히 박사급 전문가들은 이론의 함정에 빠지기 쉽지만 이 분은
농업인보다 더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현장에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민 교수는 "2001년 벤처농업대학이 수업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휴강을 할 정도로 코로나19가 많은 속을 썩였다"며
"오늘은 교수진이 학생들에게 춤을 선보이려고 준비를 많이 했는데 코로나19로 다음으로 미룬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 날은 교가와 졸업식 노래 제창도 대표자 두 분이 연단에서 부르는 걸로 대체됐습니다.
코로나19 탓에 실내에서 하던 졸업식을 밖으로 옮겨 진행하다 보니 빔 프로젝터를 활용하지 못하는 게 단점이었습니다.
1년간의 학교 생활을 음악과 함께 사진으로 준비했지만 결국 사회자가 말로 소개하는 것으로 대체됐습니다.
다행히도 민 교수의 뛰어난 유머 감각 덕분에 화면 없이도 모두가 1년을 즐겁게 추억하기에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빵 터지며 산중에 울려퍼지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맴돌 정도입니다.
이어 공로상과 우수상, 농식품부 장관상, 농협 회장상, 농촌진흥청장상, 최우수학생상 등에 대한 수여식이 열렸습니다.
시상식은 마치 영화제나 연예대상 수상식처럼 흥이 넘쳤습니다.
역시 백미는 수상소감이었습니다. 농업인들의 소감엔 진솔함이 묻어나면서 재미도 만점이었습니다.
차로 3시간을 달려 울산에서 왔다는 김복영 씨는 식사시간에 돼지고기를 제공해준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받았지만 반전 소감으로 히트를 쳤습니다.
김씨는 "벤처농업대학 존재조차 모를 때 지인 소개로 왔다가 지금은
학교가 너무 좋아졌는데 벌써 졸업"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사실은 저는 소를 기르고 있다"고 말해 좌중의 배꼽을 잡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는 저한테 너무 귀한 존재라 다음에도 요청만 해주시면 무조건 돼지로 보내겠다"고
덧붙여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그러면 돼지농장주라면 한우를 가져와야 했을까요?
아, 닭고기가 있네요. 역시 한우란 존재는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날 맛난 아이스크림을 '스폰'해 찬사를 받은 엄용태 씨는 물류회사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땅 5000평을 마련해 조만간 농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해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농협회장상은 수상자보다 시상자가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금산군 추부면에 위치한 만인산영농조합법인의 전승구 조합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 역시 벤처농업대학 6기 졸업생입니다.
조합장 선거에서 4차례 낙선 끝에 당선된 것도 눈길을 끌었지만 직원 6명으로 시작한 유통센터를
90명 직원에 400억원대 매출로 키웠다는 사회자 소개에 환호가 이어졌습니다.
전 조합장은 "저는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벤처농업대학을 다니면서
생각을 바꾼 덕에 지금은 매년 사업계획을 초과 달성하고 있다"며 "후진 기어가 없어서 지금까지 전진만 해왔듯이
여러분들도 한국 농업과 농촌, 농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전진기어만 사용해달라"고 힘줘 말했습니다.
역시 이곳 졸업생이자 교수로도 활약중인 김병원 전 농협중앙회장도 학생들 앞에 섰습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조용하게 지내온 김 전 회장은
"한자로 '락'자에는 떨어질 락(落)과 즐거울 락(樂)이 있는데, 이번에 떨어지고 나니까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며
"떨어지지 않았으면 이런 사실을 평생 모를 뻔했다"고 비유적으로 심경을 전해 응원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학사모를 위로 던지는 마지막 이벤트와 함께 졸업장을 받아든 학생들은 삼삼오오
기념사진을 찍은 뒤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졌습니다.
민 교수는 마지막 발언에서 "코로나19로 언싱크(unthink), 언러닝(unlearning), 언택트(untact)가
자리잡는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런 때일수록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만나면서 네트워크를 만들라"고 마지막 숙제를 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졸업생들의 발걸음이 그렇게 힘차 보일 수 없었습니다. 한국 농업의 미래는 그래서 밝은 것 같습니다.
[금산 =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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