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한다.
조국이 날 이해하게 되길
조국이 원치 않는다면
그땐…
그냥 조국을 지나가는 수밖에
비스듬히 내리는 비처럼!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낸 언론인 출신 원로학자 김삼웅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러시아 혁명시인
마야콥스키(1893-1930)의 시구를 읊조리다 눈물을 보였다.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회의실. 김 대표는 '조선의열단과 약산 김원봉' 국회 학술회의에 발표자로 참석해
'약산 김원봉 서훈,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김 대표는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약산 김원봉을 6·25의 원흉이자 6·25남침의 핵심역할 등으로 몰아치는데 사실과 거리가 멀다"면서
"김 약산은 당시 북한에서 당이나 군, 정부의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이었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김원봉이 한국전쟁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두 번의 훈장을 받았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김 대표는 단호한 목소리로
"김 약산이 '전쟁 시 국군을 많이 죽여 훈장을 받았다'라는 주장은 엉터리다"라면서 "
1952년 3월 공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1급 최고훈장'이 아니라 1951년 북조선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 재직 시
평북 지역의 보리파종 실적이 우수하다고, 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준 '노력훈장'"이라고 설명했다.
▲ 약산 김원봉(해방 후 모습) | |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 김원봉은 백범 김구와 더불어 우리 독립운동사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 인물이다.
1919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시에서 의열단을 창설한 뒤 연이은 의열투쟁으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이 됐다.
이후 1926년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이육사와 정율성 등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1938년 우리 국군의 뿌리가 되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1939년 5월 중국 치장에서 백범과 함께 공동으로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해 우리 민족이 걸어가야 할
자주독립국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됐고,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도 활동했다. 194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해방 후 만 27년 만에 개인 자격으로 고국에 복귀했지만 1948년 자발적으로 월북했다.
이후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1958년 11월 이후 북에서도 종적을 감췄다.
"겁이 나서 토론회 한 번 주최 못했다"
이날 토론회는 안민석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주최했다.
안 위원장은 인사말에서 "실은 지난 6월에 토론회를 준비했다 연기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약산 김원봉을) 언급하고 나서
이념 논쟁으로 번졌다. 6월에 예정한 토론회는 솔직히 겁이 나서 못하겠더라.
그러다 김원웅 전 의원님이 광복회 회장으로 취임하는 걸 보고 용기를 내 이렇게 토론회를 열게 됐다"라고 밝혔다.
안 위원장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 약산 김원봉에 대해 국회에서 토론회 한번 하자는 것인데 두려워했다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오히려 학계의 원로와 어르신들이 나섰다. 많은 정치인이 이런 역할을 하고 앞장서서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회의실에서 "조선의열단과 약산 김원봉, 100년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국회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 |
ⓒ 김종훈 |
안 위원장에 이어 토론회의 좌장을 맡아 기조강연에 나선 윤경로 전 한성대학교 총장은 담담히
우리 현대사에서 약산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설명했다.
"한 원로학자가 '한국독립운동사상 가장 불행한 인물이 바로 약산 김원봉'이라고 했다. 과언이 아니다."
윤 전 총장은 "김원봉은 환국 후 친일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에게 취조를 당했다.
의열단이 반드시 죽여야 한다 말한 '칠가살'에 오른 노덕술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한 것이다.
증거불충분으로 십여 일 만에 석방됐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껴 월북을 결행했다"라고 덧붙였다.
"약산의 북행은 불가피한 선택"
윤 전 총장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김삼웅 대표는 약산이 북으로 간 이유에 대해
"단정에 반대하다 미군정 경찰에 쫓긴 것"이라면서 "(1947년) 여운형 암살 이후 거듭되는 테러 위협에 불안을 느꼈고,
미군정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정책이 확고해지면서 중도·좌파세력 입지가 좁아지자 예전 동지들인 조선의용대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북한을 택하게 된 것"이라며 약산이 북으로 간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대구사범대학교 동기동창인 황용주 전 MBC사장의 발언을 빌려
'약산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약산의 북행은 민전(민주주의 민족전선)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따른 단원들의 이탈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 |
ⓒ NARA / 박도 |
김 대표는 이어 "약산은 월북 또는 납북된 독립운동가 '재북평화통일촉진회'를 만들어 활동했다"면서
"당시 북은 김일성 체제가 강화되면서 최창익 등 연안파가 숙청당했다, 이어서 김일성 유일체제의 필연적이고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약산도 숙청당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북한 통치 이데올로기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서 주체사상을 해외에 전파한 외교가이고,
북한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의장, 주체사상연구소장, 노동당비서, 노동당국제담당 비서,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황장엽이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면서
"이후 황장엽은 국가정보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상임고문, 전주대학 석좌교수 등 예우를 하고,
이명박 정부는 2010년 그가 사망하자 1등급 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라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황장엽이 죽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유해를 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면서
"독립운동은커녕 그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주체사상가 황장엽에 대해서 최상의 예우를 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약산에 대해 추가로 언급했는데, 몇 마디 잇지 못하고 이내 눈물을 보였다.
"독립전쟁의 영웅 김원봉은 용납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이고, 주체사상가 황장엽은 무궁화장을 받은 애국자로 추앙하는..."
▲ 중국 무한에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 최초로 조직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 임정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서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는 화북지역 태항산으로 이동하고 조선의용대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다. 제1열에서 항일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북한 초대 보건상 허정숙 (오른쪽 2번째 여성), 의열단장 김원봉(4번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리집중(5번째), 석정 윤세주(6번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성숙(7번째), 북한 초대 재정상 최창익(8번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이자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 박효삼(11번째)의 얼굴이 보인다. | |
ⓒ 독립기념관 |
한편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은 독립유공자에 대해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 사실이 있는 자로
그 공로로 건국훈장 및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상훈법에는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에는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 수여한 물건 및 금전을 환수할 것'을 명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월북한 약산 김원봉이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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