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전두환 등 신군부의 군사정변 당시 군부에 의해 체포·가택연금 후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던 할아버지. 함께 체포됐다가 망명길에까지 같이 오르게 됐던 아버지. 그런 핏줄의 인연으로 1986년 미국서 태어나 이중국적자가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맏손자이자 김홍업(DJ차남) 전 국회의원의 아들 김종대 리제너레이션 대표(32, 미국 애틀란타 거주), 그를 만났다.
숙명처럼 이중국적 신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피보다 진한 DNA 탓일까,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보고 들은 영향 탓일까,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인 그는 '통일'과 '난민'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
DJ 서거 9주기를 치룬지 불과 일주일 만인 지난 24일 오후 제주시내 모처에서 <제주의소리>와 만난 김 대표는 "통일 문제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저 또한 미국 사회에서 이중국적자로서, 이민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다"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현재 그는 미국 애틀란타에서 한국 유학생 출신의 부인 최자현 씨(31)와 함께 이주 난민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지원하는 '리제너레이션'이라는 비영리단체를 2017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김홍업 전 의원의 맏아들이자 'DJ 가문'의 종손이다. 지난 2009년 8월 DJ 서거 당시 국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서 장남 홍일 씨에게는 딸만 셋이 있어 차남 홍업 씨의 장남인 김 대표가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었다.
투병 중 맏손자의 군대 전역을 기다렸을까. 김 대표가 민간인으로 돌아온 엿새 만에 눈을 감은 할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영결식장으로 들어서던 20대 청년은 이제 30대 가장이자 민간구호 교육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NGO 대표로 어엿하게 성장(?)해 있었다.
DJ는 손주들 중에서 김 대표를 가장 아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거 사흘 뒤 공개된 '마지막 일기장'에서 맏손자를 향한 고인의 애틋한 심정과 이웃사랑 실천을 누누이 당부한 할아버지의 유지(遺志)가 고스란히 묻어난 일화는 당시 각별하게 회자됐다.
김 대표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중·고교를 나와 애틀란타 소재 명문 사립대학인 에모리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2012년 대학 졸업후 에모리대 국제교류협력처 교직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기도 했다.
그가 생활하고 있는 곳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 16km,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의 클락스턴이란 소도시다. 인구 1만명이 채 안되는 사람들이 면적 1마일x1마일 안에서 세계 각지의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난민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난민타운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시아의 부탄, 미얀마, 브룬디, 네팔,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중동의 이라크와 이란, 시리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라이베리아, 소말리아, 케냐, 수단, 코트디부아르, 그리고 동유럽의 보스니아 등 전 세계 40여개국, 60여개의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다. 애틀랜타에 온 탈북자 일부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클락스턴 전체 인구의 80%가 난민 출신인데 이들 중 절반 가량이 난민 1세대, 나머지 절반이 미국 현지에서 태어난 2세대들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사회에서 클락스턴은 '난민들의 보금자리'로 유명하고, 뉴욕타임스(NYT)도 이곳을 "미국 내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사는 1제곱 평방마일"이라고 비유했을 정도다.
누구보다 우리민족의 통일을 염원했고 이웃사랑 실천의 유지를 남긴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김 대표는 미국에서 '통일'과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역할을 실천하고 있다.
김 대표는 "통일은 단순히 우리나라가 하나가 되는 걸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남북이 하나가 되더라도 다시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으로 나뉘고 그 내부에서 진정한 융합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한 통일이 아니냐"며 "결국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어떻게 함께 공존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난민 신분인 탈북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가 이번에 제주도를 찾은 것도 예멘 난민신청자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닷새를 제주에 머무는 동안 꼬박 나흘을 예멘 난민신청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김 대표는 "미국에서 언론을 통해서 본 한국은 '무슬림(에멘인)을 진짜 다 내좇으려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제주에 와서 보니까 난민들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과 그런 움직임이 많다는 걸 직접 보고 한편으론 감사했고 희망을 느꼈다. 그들을 보듬어 주는 제주도민들께 감사드린다. 결국 이런 활동들이 거름이 돼 우리사회도 변화하고 인식또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현재 진행 중인 예멘인들의 난민지위 심사에 대해선 "우리나라에 난민법이 시행된 것이 2013년으로 알고 있다. 아직 시스템적으로 갖춰나가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며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률은 국제수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난민법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해선 안된다. 이번을 계기로 보완되길 바라고 있다. 결국 함께 사는 것은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역량이 좀 더 발휘돼 그런 방향으로 갔으면 싶다"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는 또, "미국은 난민 정착을 위한 프로세스가 아주 잘 구축된 나라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미국도 '반 이민, 반 난민' 정책으로 가고 있다."라며 "그러나 미국의 정체성은 '이민자의 나라', 난민 정착과 이주의 역사로 이뤄진 나라다. 다양성과 공존이 미국의 큰 힘인데 지금 그 반대로 가고 있다. 지난 2016년 시리아 사태 당시 미국은 대선에서 트럼프가 '그들만의 민족주의, 백인 우월주의'를 자극하며 당선됐다. 미국도 다시 통합이 큰 숙제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가 이주 난민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지원하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리제너레이션'이라는 단체는 아인슈타인이 세운 국제구호위원회(IRC)와도 협력하고 있다.
김 대표는 "아인슈타인도 난민 출신이었다. 클락스턴에 있는 난민정착 지원단체들과 계속 파트너십을 맺어 가고 협력하면서 역량을 더 모아가려 한다. 당장은 리제너레이션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으니 더욱 체계화시키고 후원자들을 늘리는데 집중 할 것"이라는 각오도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제주도민들에게도 "제주에도 김대중기념사업회가 있는 것으로 안다. 할아버지의 유훈을 지켜주시고 애써주셔서 너무 감사드린다. 저도 함께 협력해서 할아버지의 못다한 유훈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나갈 수 있으면 고맙겠다"고 인사했다.
끝으로 김 대표는 "제주4.3이 70주년을 맞았다. 4.3으로 많은 도민들도 난민이 됐던 것으로 안다. 개인적으로 이번 제주방문이 4.3에 대해 더욱 공부하고 관심 갖는 계기가 됐다. 제주도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4.3의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DJ가 생전에 가장 애착을 가졌던 손자. 김대중 대통령의 종손이란 이유로 불필요한 주목까지 받아야 했고 부담도 컸을 터. 아마 그 정도는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 여기는 듯 했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묻고 싶었지만 끝까지 삼킨 질문이 있다. '훗날 정치를 할 것이냐'고. 그러나 김종대 대표에게 질문이 왠지 우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통일을 고민하고 난민들과 함께 하고 있는 그에게 이미 생활이 정치인 셈이다. 제도권 정치인만이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니. 그가 제도권 정치인이 되던 그렇지 않던 새삼스럽거나 특별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아래는 김종대 대표와의 인터뷰 전문]
- 반갑다. 현재 미국 애틀란타에서 생활한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 부탁한다.
미국 애틀란타에 인근에 클락스턴(Clarkston)이라는 도시가 있다. 여의도 1/3의 면적의 소도시다. 인구도 1만명 정도밖에 안된다. 재미있는 게 여기 인구 중 80%가 난민 출신이다. 이 곳 인구의 30~40%가 외국에서 태어난 난민 1세대고, 2세대들까지 합하면 80% 가량 된다. 저는 여기서 아내와 함께 난민들의 교육지원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 '리제너레이션'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애틀란타는 1960년대에 건설 붐이 일었고 집과 비행장 등 건물을 지을 때 인구를 유치해오는 과정에서 접근성이 좋은 클락스턴에 아파트촌이 형성됐다. 클락스턴에는 1960~70년대에 건설된 아파트가 많다. 공사가 끝나고 노동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빈 집이 많이 생겼다. 집값이 저렴하니 1980~90년대부터는 미국정부가 난민들을 이쪽으로 보냈다. 처음엔 베트남계 이주민 많이 왔고 다른 국가에서도 하나둘씩 오기 시작하니까 난민정착지역이 됐다. 그 기간 동네가 구성원의 변화도 많이 겪었다.
클락스턴의 캐치프레이즈가 '미국 내에서 가장 다양한 1.1제곱평방마일'이다. 40여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60여개 언어를 쓰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곳이란 의미다. 하나의 거리 한 쪽엔 교회가 있고 맞은 편에는 이슬람 사원이, 그 옆에는 사찰이 있다. 난민들이 많이 정착하는 곳이 되니 자연스레 미국 내 난민 정착 관련 NGO, 선교단체, 비영리단체가 모여들면서 재미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지게 됐다.
분위기가 따뜻하고 누구나 굉장히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성도 있고 굉장히 재미있는 도시다. 미디어에서도 취재를 많이 온다. 어떤 기자들은 파내도 파내도 이야기가 많다며 '보물섬 같다'고 말한다. 지금도 이 도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제작 중일 정도로 주목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이 '반 난민, 반 이민' 정책으로 가고 있다. 그럴수록 아무래도 이 도시에는 (트럼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어서, 이 도시가 많이 주목받고 있다. 미국 안에서 굉장히 좋은 난민 정착 케이스로 소개되고 있다.
- 미국에서 생활한지는 오래 됐나?
저는 할아버지(DJ)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시게 되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다시 한국에서 살다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다시 유학생활하면서 다시 캐나다와 미국에서 중고교를 나왔고 대학을 애틀란타에서 다녔다. 이후 대학 교직원으로 취직하면서 자연스럽게 애틀란타에 정착하게 됐다.
-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인 2009년에 영정을 들었는데?
그때 마침 제가 한국에서 군대를 전역한 직후라 국내에 있었다. 그해 8월 12일날 전역했는데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일주일만인 8월 18일 돌아가셨다.
- 김 대표가 운영하는 리제너레이션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어떻게 설립하게 됐는지 설명해달라.
리제너레이션은 난민들의 교육지원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다. 제가 사실 난민문제에 처음 관심 갖게 된 계기가 통일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중국적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미국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한국인으로서 미국사회에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 살고 있는데,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듣고 자라온 영향도 있어서 통일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컸다.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건강한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나의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2016년이 미국에 중요한 시기였다. 그 때 시리아 사태가 전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연히 난민이 굉장히 큰 이슈였다. 그런데 미국인들 안에 내제돼 있던 타국인을 향한 적대심이나 그들만의 민족주의, 백인우월주의를 자극하는 트럼프라는 인물이 나타났고 그의 대선 캠페인으로 인해 국수주의나 자국민 우선주의가 부활하기 시작한 걸 보게 됐다.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공통적인 숙제라고 생각하는데 미국의 정체성 자체가 '이민자의 나라'다. 이민자들이 와서 만든 나라고, 다양성과 그에 따른 공존이 미국이란 나라의 큰 힘인데 그 반대로 가고 있다. 그런 걸 보면서 미국이란 나라도 지금 다시 통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
오마바 정부 때도 난민을 8만명씩 받아들였다. 시리아 사태가 발생하면서 난민들을 더 수용해야 하는 필요가 있었음에도 미국 내부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시리아 난민은 테러리스트고, 위험하고 왜 굳이 들여오냐'는 논의가 일어나는 걸 직접 봤다. 이런 일방적인 주장으로 '미국 사회도 역행해가고 있구나' 하고 걱정했다.
난민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미국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미국은 난민 정착 프로세스가 잘 구축돼 있다. 해외에서 이미 심사를 거치고 나서 미국으로 오게 되는데, 계속 난민들을 무조건 배척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위험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이런 걸 보면서 '미국에서도 난민들이 너무 힘들어지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때 딱 떠오른 게 대한민국에 온 탈북자들이다. 그들도 결국 난민이다. 이 사람들도 정말 힘들게 한국에 왔는데, 한국사회가 이들을 포용하지 못한다. '이들이 정착하게 되는 상황이나 미국 난민이나 다르지 않구나, 뿌리는 동일하구나. 한국사회와 미국사회가 동일한 숙제를 갖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통일은 국가가 단순히 하나 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가 하나가 되더라도 다시 남한 출신, 북한 출신으로 나뉘고 내부에서 융합이 일어나지 않으면 무의미한 통일이 되는 것 아닌가. 결국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문제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어떻게 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나에 대한 고민과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탈북민들 뿐 아니라 타 이주민, 다문화가정이나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사회는 굉장히 배척적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통일을 얘기하기 전에 난민부터 도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사는 애틀란타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클락스턴이란 곳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좀 더 배우고 미국으로 오는 난민들과 함께 삶을 공유하면서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2016년 초부터 클락스턴에서 아내와 함께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난민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클락스턴에서 가까이 지나게 된 가정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무슬림 가정인데 아이가 10명이다. 원래 이 가정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와 인근 차드 공화국 난민캠프에서 7년 간 생활했는데 도저히 미래가 안보였다. 특히 아이들의 교육이 걱정되서 미국으로 난민신청을 하게 됐고, 잘 풀려서 미국에 정착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고민으로 정착한 건데, 막상 오면 당장 생계를 책임지는 것 때문에 부모가 아이들을 케어할 수가 없다. 밤에 일하면 임금을 더 주니 부모는 밤에 일을 나갔다 아침에 돌아와야 한다. 이들이 미국에 오긴 했는데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배울 시간도 없고. 아이들을 잘 케어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영어도 못 배우고 일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클락스턴이 교육환경이 좋은 곳은 아니다. 공립학교에서는 아이들 잘 챙겨주지 못하는 상태다. 아이들은 더 공부하고 싶은 열망은 있고, 고등학생들인데 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대학 입시라는 프로세스가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어려운 건데, 그게 없는 거다. 클락스턴 난민들이 이런 상황을 깨닫게 되면서 '이 곳 아이들의 교육을 어떻게 해야 되나'라는 고민을 하면서 봉사활동을 1년 동안 했다.
작년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에서 MBA를 끝내게 되면서 진로를 고민하다가...제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뭐라도 시작해보자고 해서 리제너레이션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됐다. 리제너레이션은 2017년 12월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됐다.
저희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가 대화의 장을 여는 것, 두 번째가 'Empowering Youth Communication'이라고 해서 청소년들을 교육을 통해서 세워가는 일이다. 주로 두 번째 미션에 좀 더 포커스가 맞춰진다.
첫 번째에 대해서는, 제가 난민 관심 갖게 된 것도 통일과 통합에 대한 부분이어서 거기 관련된 주제로 강연회도 열었다. 미국인들 한반도 관심이 많아서 애모리 대학과 연계해 강연회도 진행했다. 통일을 위해서는 한반도 안에 있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해외에 나가 있는 한인들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애틀란타 한인 청년들과 1주일에 한 번 통일스터디 모임을 진행 중이다.
두 번째로, 아이들 대학 입시 준비를 도와주고 있다. 미국에서 대학가기 위해서는 SAT 시험을 봐야하는데 클락스턴에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은 많지만 SAT에 특화된 교육은 많이 없더라. 그래서 시작한 게 SAT 학원을 열어서 아이들에게 무료로 공부 가르쳐주는 일이다. 처음 공부하고 시작할 때는 '글로벌 시티즌 리더십 캠프'라고 해서 3박4일 간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과연 세계시민이라는 건 무엇일까', '내 커뮤니티 안에서 공동체 일원으로 살아가는 리더십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아이들과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아내랑 평소에 하는 말이 있다. 난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민과 연결시키는데, 이 아이들이야 말로 더욱 더 글로벌해지는 시대에 적합한 리더상이다. 예를 들어 미얀마에 있던 친구들이 말레이시아로, 태국으로 많이 간다. 이들은 다른 언어와 문화를 접하게 되고, 다시 미국으로 와서 미국의 문화를 습득하게 되는데 마인드 자체가 글로벌한 거다. 이 아이들이 정말 잘 자라야 한다. 교육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 불과 일주일 전, 고 김대중 전 태통령 서거 9주년이었다. 아마 김 대표가 난민문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는 건 DJ의 DNA 영향도 있을 듯 하다. 생전 어떤 말씀을 많이 해주셨나.
항상 저를 만나면 앉아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유언격의 말씀도 많이 하셨다. 조금 다른 얘기를 하자면, 이 일을 하게 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저의 삶의 이야기도 어찌보면 난민의 스토리다. 저는 1986년생인데 할아버지가 미국에 망명을 오셨을 때, 아버지도 함께 오셨다가 제가 그 때 태어났다. 이 일을 하면서 저 역시 난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 중에 '사람 마음 안에는 항상 선과 악이 있다. 천사와 악마가 있는데. 우리는 항상 천사가 이기는 쪽으로 정말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웃을 사랑할 때 결국에 선을 따라가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할아버지는 신앙인이셨다. 할아버지의 포용이라는 원칙이 신앙에서 배웠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 하셨던 말씀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선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었다..
항상 '행동하는 양심'을 말씀하셨고, 그래서 제가 어떻게 보면 좀 양심의 찔림이 있어서, 사실 좀 무모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이 길이 계속 눈에 밟히고, 또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이라 생각하고, 제 양심에 해야하는 일이라고 느껴서 '일단 뭐라도 해보자'해서 아내랑 같이 리제너리이션을 시작하게 됐다.
- 앞서 아내 얘기가 잠깐 있었다. 미국에서 난민구호 교육봉사를 함께 한다고. 결혼은 언제 했나?
2014년 12월에 결혼했다. 아내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이름은 최자현. 1987년생이다. 무엇보다 신앙이 중요한 가치로 이어지게 됐다. 처음 만난건 친구가 있는 뉴욕에 놀러갔을 때 친구의 소개팅으로 아내를 만나게 됐다. 그때 아내는 막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했고, 직장을 구한 상황이었다. 이후 장거리 연애로 교제했다. 피아니스트로 자란 와이프는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복수전공 하더니 대학원와서 예술경영을 공부했다. 와이프의 관심사 다양하다.
- 우리나라도 난민으로 살았던 시대가 있다. 일제강점기가 있었고, 제주에는 4.3이 있었다. 가까운 우리의 부모, 조부모들이 난민의 삶을 살았는데 지금은 되레 우리가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불편해졌다. 이런 배타적 시선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근본적으로 올라가자면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제일 크다. 결국 두려움이라는 게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좀 더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두려움이란 감정이 없어지는 거다. 워낙 우리 사회에 있는 편견들이 강한 것들이 역할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워낙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한데 아직 인식 속엔 머리가 노랗거나, 흑인이거나 하면 이들을 대한민국 시민이라고 생각하면 어색함이 있다.
다양한 이민자들과 혹은 난민들. 이들과의 교류가 점점 더 잦아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금은 과도기 적인 상황이 아닌가. 크게 보면 긍정적이다. 이런 부딪힘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더 발전돼 가는 과정, 포용적으로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예멘 난민시청자들이 이슬람이라는 것 때문에 생기는 '이슬람포비아'(Islamophobia, 이슬람공포증)가 있다.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다. 사실 그것도 이슬람을 잘 몰라서, 모르기 때문에 배타적이게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먼저 생긴다. 두려움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걸 나쁘다고 뭐라고 하기도 그런데...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만나는 것이다. 만남을 통해서 옆에 사람이 예멘인인데, 예멘인을 무서워만 하다가 실제로 보고 웃으면서 몇 마디만 나눠도 뭔가 바뀐다. 미국에는 '접촉이론(Contact Theory)'이란 게 있다. 섞이면 섞일수록 집단 내에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이론이다.
클락스턴 안에는 'Refugee(난민, 피난처) 커피숍'이 있다. 시작한 지 3~4년 정도 됐는데, 클락스턴으로 이사 온 백인 목사의 아내가 만들었다. 이 도시에 와서 이웃들을 만나다 보니 이들에게 '모이고 싶어하는' 열망, 공간에 대한 열망을 느낀 것이다. 이 커피숍이라는 공간에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 왔다갔다 하고 만남의 장소가 되다 보니 난민출신도 오고 미국인들도 오고 관심있는 사람들도 오고... 최근에는 무슬림들의 라마단 기간이었는데, 해가 지고 저녁시간에는 다 같이 가족이 모여서 음식 나누면서 축제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커피숍의 주인과 봉사활동 하는 사람도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이들이 무슬림 명절날 밤에 함께 밤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독교인 바로 옆에서 무슬림이 기도하고 있고... 참 이런 조화로운 모습이 참 보면서도 되게 좋다.
일단 그런 만남이 제일 중요한 거 같다. 저도 기독교인이고 무슬림 만나기 전 편견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무슬림이랑 친구나 가족같이 되니 무슬림이라는 게 그냥 문화고 이슬람이라는 것도 하나의 문화고, 결국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다 똑같다 사람은. 그 만남이라는 게 너무 중요한 것 같다.
- 오늘 인터뷰 직전도 예멘 난민 숙소에 있다가 여기에 왔다고 들었다. 그곳 분위기는 어땠나.
젊은 예멘 남자 친구들이 많은데. 사실 그 곳 안에서는 내가 이방인이다. 그런데 정말 밝게 환영을 해주고 먼저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왔다. 그들이 오히려 이방인인 저를 환대하고 배려하는게 느껴졌다. 좋은 친구들이란 느낌이었다.
- 제주에는 예멘인들을 포함해서 난민신청자들을 지원하는 NGO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분들도 만난 것으로 안다. 특별히 느낀 점이 있다면?
미국에서 언론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면 '한국이 진짜 무슬림을 진짜 다 내좇으려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제주도에 와서 보니까 온 난민들을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는 시민단체분들이 많이 있고, 이런 움직임도 많다는 데 한 편으론 감사했고 희망적이었다. 예멘인들을 포함한 난민신청자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제주도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런 분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해주시면 결국 우리사회의 난민들에대한 인식도 바뀌어 나갈 것 같다.
예멘 난민들도 한국사람들이 자기들을 무서워하는 거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조심히 행동하려 한다. 요 며칠 이들을 만나면서 되게 뭉클했던 게 이들이 모여 '한국사람들이 우릴 이렇게 생각한다더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그럼 우리가 음식을 만들어서 주민들과 나눌까', 얼마전 지나간 태풍 솔릭 이후에는 '태풍이 지나갔으니 청소라도 도울까?'라는 의견들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분명 좋은 친구들이다.
- 제주는 과거 해방공간에서 4.3당시 빨갱이 섬으로 낙인 찍힌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제주에 오기 전에 4.3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나.
솔직히 4.3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4.3이 7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고, 타국에서 생활하다보니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부족했다. 다만 한국에서 군대 시절 '4.3 제대로 알자'라는 책자를 본 적이 있는데 4.3에 대해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의 큰 비극, 제주도민들의 한과 아픔이 있다는 것은 근래 들어서 알게 됐다. 제주도에 와서 관련 책자들 있길래 많이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번 제주방문에서 난민 구호활동을 하고 계신 NGO분들을 만났을 때 얘기를 들었는데 제주도에 계신 나이 드신 분들은 예멘인들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한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나이 드신 제주도민들이 잘 이해를 해주신다는 취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4.3당시 그 분들과 가족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난민이나 다름없었다고 들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제주는 어떻게 보면 통일에 관해서도 그렇고 난민에 관해서도 그렇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시기다. 대한민국 국가의 정체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단일민족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패러다임 전환 일어나는 시점에서, 난민들이 제주에 많이 와 있는 거다. 4.3을 통일에 대한 염원이란 측면에서 봤을 때 어떻게보면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통일에 대한 고민을 하기 적합하고 곳이 제주다.
- 우리나라에는 난민법이 있다. 그러나 난민 신청자들 중 실제 난민 인정 비율이 국제 평균과 비교할때 많이 낮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한국에 난민법이 자체적으로 시행횐 것이 2013년이라고 들었다. 사실 시스템적으로 아직 갖춰나가야 할 부분이 있으니 한편으로는 이해도 간다. 그래도 아쉬움을 느꼈던 게 예멘이 한국으로 온 이유 중 하나가 한국에는 난민법이 있다는 점인데, 인정률을 보면 세계평균보다 매우 낮다. 이건 보기에 따라선 난민인정을 거의 안 해주겠다는 상황으로 읽힌다. 난민법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셈인데 이번을 계기로 보완되었으면 한다.
미국이란 나라는 난민정착과 이주의 역사가, 그 경험이 풍부해서 좋은 케이스가 많다. 물론 미국도 완벽한 시스템은 아니다. 오히려 북유럽, 캐나다가 잘 정착돼 있다. 한국을 보면 전체적 부분에서 느끼는 게 정부가 너무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관할하고 있고, 항상 탑다운이 너무 많다. 미국 시스템은 일단 정부에서 심사를 거치면 다 NGO한테 맡기는 형태다. 10개 정도의 큰 난민정착NGO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정책이 진행되는데, 그 목적 자체가 '자립'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통계적으로 정착 난민의 75%가 6년 내에 정부의 보조를 전혀 안받고 완전히 자립한다.
다른 나라에도 좋은 케이스 많으니 그런 걸 참조하면서 좋지 않을까. 결국 함께 살아가는 건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역량이 좀 더 발휘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갔으면 한다.
- 제주는 자주 오나?
마지막으로 온 게 2010년 가족여행이다. 가족여행으로 4~5번 정도 왔다.
- 그럼 성인이 돼서 여행이 아닌 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온 건 이번이 처음?
그렇다.
- 제주는 어떤 섬인가.
너무 아름다워서 더 있고 싶다. 좀 더 있고 싶다. 올레길도 많이 걷고. 보이는 게 오름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것들도 너무 아름답고. 아내와 꼭 다시 제주를 찾아 오겠다. 기회가 되면 제주에서도 생활해보고 싶을 정도다.
- 앞으로 계획은?
리제너레이션이라는 단체를 시작했으니 좀 더 체계화시키고, 아무래도 후원이 많이 필요하니 후원자 많이 모색해야 한다. 시스템을 갖춰나가고 있다. 미국 NGO들과도 협력관계를 가지려 한다. 국제구호위원회(IRC)라는 단체와도 교육 부서와 협력하고 있다. 이 단체는 아인슈타인이 창립한 단체인데, 아인슈타인도 난민이었다. 클락스턴에 있는 난민정착단체와 계속 파트너쉽 맺어가고, 여러 단체들과 협력하면서, 역량을 모으려 한다.
되게 재밌는 게 클락스턴의 비영리단체가 백인 중심이다. 그러다보니 저희 역할도 그 안에서 특별해지더라. 그 쪽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거다. '우린 난민을 섬기는데 이사회는 백인들로 구성되고 그러면 되겠느냐, 귀 더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다. 그런 차원에서 저희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려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난민 정착이라는 것도 공론화가 돼 가고 있는 추세인데, 우리가 좋은 케이스를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과 미국의 다리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으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감사히 하겠다.
- 할아버지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제주도민이 많다. 도민들에게 DJ의 손자로서 인사말씀 해달라.
할아버지를 기억해주시고 기념사업회라는 걸 통해서 할아버지의 유훈을 따르려고 애써주셔서 손자로서 너무 감사드린다. 함께 같이 협력하면서 할아버지의 못다한 유훈을 위해 노력해나갈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거듭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