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이 기막히게 빼앗은 한양 제일의 정원
김종길 입력 2018.07.31. 10:21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16] 석파정(상)
[오마이뉴스 글:김종길, 편집:최은경]
'김흥근은 한양 북문 밖 삼계동에 별업(別業)이 있었다.
서울에서 제일가는 명원(名園)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그것을 팔라고 청했으나 김흥근은 듣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다시 청하며 "하루만 놀게 빌려 달라"고 했다.
대개 원정(園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들이 놀이에 빌려달라고 하면 부득불 허락하는 것이 당시 서울의 옛 풍속이었다.
김흥근이 마지못해 허락하자 흥선대원군은 마침내 임금에게 행차할 것을 권하여 모시고 갔다.
그 후 김흥근은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다.
임금의 발길이 머문 곳을 신하된 도리로 감히 거처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하여 삼계동 별업은 마침내 운현궁의 소유가 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흥선대원군이 탐이 나서 빼앗을 정도로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정원은 서울 제일의 명원이었다. 여기서 말한 김흥근의 별업(별서)이 지금의 석파정이다.
▲ 석파정 전경 건너편 석탑에서 본 석파정 풍경이 그윽하다. |
ⓒ 김종길 |
장동 김씨는 어떤 가문이었을까.
사실 장동 김씨의 선대는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문곡 김수항, 몽와 김창집 등으로 모두 당대를 주름잡았던 덕망과 명망이 있는 인물들로 가득했다.
장동 김씨라 불린 것은 김조순 때에 이르러서였다.
김창집의 5대손인 김흥근에게 김조순은 당숙(5촌)이었다.
김조순은 글에 능했고 일처리가 능란하며 후덕하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의 자손 대에 이르러 탐욕과 교만, 사치에 빠져 외척으로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장김'을 알아도 국가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한다고들 했다.
김조순이 예전에 살았던 곳은 경복궁 북쪽 창의문 아래 자하동(紫霞洞)이었다.
지금의 종로구 효자동, 창성동 일대이다.
자하동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어 계곡과 숲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성 안과 비할 수 없이 좋았다.
▲ 석파정 원래 일고여덟 채로 사랑채와 안채, 별채와 별당, 중국풍의 정자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중 4개 동이 남아 있다. |
ⓒ 김종길 |
▲ 석파정 소수운렴암에서 본 석파정 계곡 풍경 |
ⓒ 김종길 |
흥선대원군은 이때부터 장동 김씨들 중에서도 김흥근을 가장 미워하게 되었고,
이후 김흥근이 소유한 땅 수십 경(頃)을 빼앗았다고 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대원군은 김흥근이 소유하고 있던 이름난 별서마저 고종을 대동하는 수를 써서
빼앗고 말았으니 석파정이 단순히 개인 간의 단순한 소유권 이전이 아닌
여러 정치사회적인 상황에 맞물려 있었다는 걸 당시 시대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석파정
▲ 삼계동 바위 각자 석파정은 원래 김흥근이 소유할 때만 해도 집 뒤에 ‘三溪洞’(삼계동)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 |
ⓒ 김종길 |
그 옆에 세로로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漢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 "한수재 권상하(寒水齋 權尙夏, 1641~1721)가 벗 정이(定而)에게 글을
써 준 것으로 때는 신축년(경종 1년, 1721년)"이라는 뜻이다.
▲ 소수운렴암 바위 각자 지금도 석파정에 가면 계곡가 너럭바위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이라고 새긴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에 세로로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漢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라는 글씨를 볼 수 있다. |
ⓒ 김종길 |
▲ 유수성중관풍루 석파정 깊숙이 있는 중국풍의 정자로 특히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다. 다음 편에서 소개 예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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