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무슨 일 있었나..12·12사태 결정적 장면 6가지
한승곤 입력 2017.12.12. 16:19 수정 2017.12.12. 16:25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38년 전 오늘(12일)은 ‘12·12 사태’이 일어난 날로 전두환과 노태우가 속해있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치적 실세로 자리를 굳힌 날이다.
전두환은 이후 김영삼 정권에서 전직 대통령이 아닌 피의자 신분으로 구치소에 수감된다.
전두환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이 된 후 구치소에 수감될 때까지 ‘12·12 사태’의 결정적 장면들 .
① 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작전 모의’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했다.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태’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일으킨 내란에 방조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한 뒤,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 총장을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② 12월12일 정 총장 보안사로 강제 연행…최규하 대통령에게 조사 재가 요청
12월12일 오후 7시 허삼수 등은 정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
33헌병대 병력은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한다.
난입한 지 21분께 이들은 정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 오후 9시30분께,
전두환 등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정 총장은 국방부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되어 첫 공판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
재판 직후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 예편, 국방부 장관의확인 징역 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③ 수도 서울을 점령하라
최 대통령이 재가 고심을 하고 있을 당시 서울 한복판에는 ‘하나회’ 일원이던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 병력과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던 3공수특전여단,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특전여단이 출동해 자리를 잡는다.
이후 1공수특전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 국방부 50헌병대 경비병력으로 근무하던
정선엽 병장을 사살한 후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이후 국방부 청사에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은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끌고 갔다.
한편 사살된 정 병장의 경우 조선대 2학년을 다니다 입대했다.
그는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의 초소에서 근무했다. 당시 정 병장은
제대를 3개월 앞둔 터였다.
④ 최규하 대통령, 정 총장 연행 재가 내려…군 주도권 장악
13일 새벽 5시10분 최규하 대통령은 결국 정 총장의 연행·조사 재가를 내린다.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사태’ 연루 혐의로 정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등이 구속된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후 전두환은 권력 실세가 됐다.
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전두환, 대통령 선출
이듬해인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은 노태우 등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통해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같은 날 비상계엄 전국확대 되면서 국회가 군으로 포위된다.
이후 5월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다.
이날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에서는 전남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군부의 쿠데타적 조치에
항거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
시위가 확산하자 전두환 신군부는 탱크 등을 앞세워 무력으로 유혈 진압에 나섰다.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끊겨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께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전두환은 8월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
27일 대통령 최규하에게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전통을 남긴다는 명분 하에 물러 나게 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됐다.
한편 당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은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⑥ 김영삼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전두환·노태우 구치소 수감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과 6월9일 연세대학교 재학생이던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결국 10일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전두환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겸
총재 노태우를 내세워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하고,
29일 노태우는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노태우 정권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11월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범으로 지목된 전두환과 노태우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소환,
각각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에 모두 구속한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
또 같은 해 관훈클럽 토론에서 “노태우 씨는 전두환 대통령과 같은 군인 출신으로서
12·12 사태를 일으켰고, 일선 군부대를 빼내 쿠데타를 한 사람이다.
쿠데타 한 사람이 대권을 잡는 것은 군정의 연장이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역사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안부 합의 박근혜 역할 (0) | 2017.12.27 |
---|---|
채동욱 전검찰총장 낙마 (0) | 2017.12.23 |
이순신 류성룡 (0) | 2017.02.27 |
[스크랩] 일본 돈 10억엔..할머니들 "정부가 이렇게 괴롭힌 건 처음" (0) | 2016.08.26 |
[스크랩] 역사가 부끄러워할 10억엔 (0) | 2016.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