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월요일, 밀양 자택에서 이뤄진 인터뷰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날씨도 무척 더웠거니와 약산 김원봉 선생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할머니가 말씀을 제대로 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더위 때문도, 80살이 넘은 나이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아픈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오빠가...." 하며 약산 선생 얘기를 직접 꺼낼 때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쉬어야 했습니다.
"그 뒤로는 숨이 죽어가지고 누가 무슨 말만 해도 마 겁이 나고 그래. 그렇게 살았어예."
● "차라리 김구처럼 총살 당했으면…"
김 할머니는 해방 직후인 1946년 난생 처음으로 오빠를 만났습니다. 많은 인파 속에 환영 받는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어렴풋이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 알았답니다. 그러나 1948년 어느날 할머니는 담을 넘어온 경찰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오빠가 잠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월북했다는 걸 안 건 한참 뒤였습니다. 할머니는 당시 부산 경남여고 학생이었는데, 여러 차례 물고문을 받았다고 털어놨습니다. "숨이 죽어서 누가 무슨 말만 해도 겁이" 나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마 이길로 난 죽는건갑다, 이래 생각했지. "
한국전쟁이 휴전상황에 들어간 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할머니는 직장조차 구하지 못했다가 독립운동을 한 교육계 인사의 도움으로 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빠 4명이 모두 사법절차도 거치지 않고 총살되는 등 이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상황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처럼 와 가지고 총살만 당했으면 그 뒤로 뭘해도 했을 건데..."
할머니는 이후 결혼도 하고 자녀도 가졌지만, 오빠 이야기나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는 바깥은 물론 자녀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 20년째 태극기를 내리지 않는 이유
김 할머니가 오빠를 얘기하기 시작한 건 2000년 전후부터입니다.
"친일파들이 들어와가지고 결국 오빠를 북한 공산주의자로 몰아가지고 이래 하는구나 하는 걸 그때는 내가 알았고..."
윤세주 선생을 비롯해 열혈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밀양에서 약산 선생를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 사이 10명의 오빠 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도 마음을 돌린 계기가 됐습니다. 2005년부터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북한 정권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번번히 좌절됐습니다.
"우리 오빠는 절대로 공산주의자는 아니고 민족주의자고...서훈을 받으면, 그리 하면 내 한이 안 풀어지겠나"
할머니의 집 정문과 안방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벌써 20년째, 단 하루도 내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빠로부터 물려받은 애국충정 때문일까. 이유를 묻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한이 맺혀서 안캅니까. 태극기 건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은..."
한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도, 부인(박차정 여사)도, 부모와 형제자매들도 다 버렸는데, 그 조국으로부터도 인정을 못받고 있다는 게 한스러워 태극기를 내리지 못한다는 할머니. 조용히 펄럭이던 그 태극기는 오빠가 이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했다는 소리없는 외침이자, 이 나라만큼은 약산을 기억해줘야 한다는 한맺힌 절규였던 셈입니다.
● 중국 국민당과 손잡고 항일…그는 정말 '빨갱이'였나?
김원봉 선생은 월북한 뒤 국가검열상, 내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분단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약산을 공식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항일운동 궤적과 월북 경위 등을 보면 좀 달리 봐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약산이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과 친분이 있었으며,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 과정에서도 국민당과 긴밀히 연계돼 있다는 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독립운동에 필요하면 좌, 우 가릴 것 없이 손을 잡았던 겁니다.
약산이 월북하게 된 건 크게 두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하나는 함께 좌우합작 운동을 펼쳤던 여운형 선생의 피살입니다. 약산 선생도 여러 차례 암살 위협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를 붙잡고 고문했던 친일순사 출신 경찰 노덕술로부터 받은 모멸입니다. 약산 선생은 남로당 파업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노덕술에 의해 체포됐다가 풀려났는데, 이후 3일 동안 밤잠을 못이루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월북 이후에는, 이념대립을 지양하는 이른바 '중립화 통일방안'을 주장하다가 결국 김일성 눈밖에 나서 1958년 연안파 숙청사건 당시 함께 숙청됐습니다. 북에서는 '국제간첩'으로 몰려 이후에도 복권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궤적을 보면 단순히 약산 선생을 '북한 정권 사람'이라고 한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잊혀지겠죠?"
영화 '암살'에서 약산선생을 연기한 조승우의 마지막 대사입니다. '암살'이 극장에서 내려지면 다시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의 얘기를 꺼내기가 당분간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또 잊고 살더라도 영화가 됐건, 기념일이 됐건 계기가 생길 때마다 기억하려고 애쓰는 노력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역사에서 지워진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나라의 기원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김무성 의원은 지난 15일 한 민간단체가 주최한 '건국 67년 대회'에 참석해"우리 현대사는 일부 좌파세력이 주장하는 굴욕의 역사가 절대 아니란 게 증명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굴욕의 역사도 있고 아픔의 역사도 있게 마련입니다. 굳이 있는 굴욕을 없다고 강변하려다 보면, 친일했던 형사가 버젓이 해방 정부의 경찰이 됐다는 사실도 외면해야 하고, 이런 경찰로부터 독립운동가들이 고문받았다는 사실도 지워버려야 합니다. 임시정부가 세워진 1919년이 아닌 1948년을 건국으로 보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위배될 뿐더러, 그 사이 이름없이 스러져간 많은 독립투사들의 공을 강제로 지워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정부가 아베 정부에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라고 요구할 수가 있을까요?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부끄러웠던 일은 부끄러웠다고 말할 때도 됐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강해졌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과거를 인정한다고 우리 존재가 부정당하진 않습니다. 얼마 전 조지현 기자의 팟캐스트'북적북적'에서 김구 선생이 쓴'나의 소원'을 들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김원봉 선생까지,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꿈꿨던 조국은 바로 이런 나라일 겁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잊혀진 영웅들을 다시 '기억'하고 '포용'하는 노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오,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 김 구 선생의 '나의 소원' 중에서
문준모 기자moonj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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