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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 이나영 결혼식

참도 2015. 6. 16. 09:35

정선밀밭

 

얼마 전 우리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결혼 사진을 보게 됐다. 배우 이나영과 원빈의 결혼식이다.

 물론 그 풍경 안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 있었다면 훨씬 현실적인 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푸른 밀밭을 버진 로드로 삼겠다는 웨딩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신선하고 우아했다.

 이후 한 연예 프로그램에서 그들의 결혼식 비용을 추적하기도 했다.

 메인홀 역할을 한 이틀치 민박집 대여료 60만 원, 1인당 1만 원으로 계산한 하객들 식비는 50만 원, 가마솥 사용료는 무료,

 그리고 꽃장식에 사용된 들꽃과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밀밭 사용료도 무료였다.

 이 계산법에 따르면 그들의 결혼식 비용은 고작 110만 원이 된다. 물론 이보다는 더 들었을 것이다.

소속사에서도 “그렇게까지 간소하게 한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참 그들다운 결혼식이었다는 것이다.

 이나영이나 원빈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아는 게 없어도, 어쩐지 모든 것이 그들다웠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아주 많은 커플들이 ‘그들다운’ 결혼식을 기획하다 이내 포기한다. 양가 부모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적당한 결혼 장소를 찾기 어려워서, 유난 떨지 말라는 소리가 지겨워서, 결국 남들처럼 하는 게 속 편해서다. 유독 결혼식만큼은 남들과 티끌만큼이라도 다르게 하기 어렵다. 마이웨이를 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간섭과 충고 앞에서 의연해야 하며, 유난 떨지 말고 남들만큼 하라는 구박에도 굴하지 말아야 한다.무엇보다 부지런해야 한다. 이미 결혼을 한 친구들은 항상 “남들처럼 하는 게 결국 가장 소박한 결혼식이더라”는 취지의 말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이 말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 한국에서 남들만큼 하려면 정말로 너무 많은 돈이 든다. 실제로 서로에 대한 확신과 애정을 가진 아주 많은 커플들이 충분한 돈을 모으지 못해서 결혼을 미루고 있으며, 결혼하기엔 충분했던 확신이 이 문제로 인해 깨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세팅된 결혼식이 모두에게 즐거운 이벤트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나의 경우만 해도 지난달에만 여덟 개의 청첩장을 받았다. 그중 간신히 한 군데의 결혼식에만 참석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불참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청첩장을 받을 때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막상 그 날이 되면,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오랜 만에 보는 동창생과의 어색한 대화, 적당한 축의금의 액수, 민폐가 되지 않을 만한 옷과 구두와 가방의 콤보,

서울의 교통 상황 등등 하찮고 시시콜콜한 문제들이 그 무엇보다 중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속 편하게 하루를 보내는 건 아니다. 청첩장을 준 친구에게 너무 미안하다.

 삼십 년이 넘게 성실하게 남들의 결혼식에 출석하고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조금 울적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나는 결혼식을 꽤 싫어하는 것 같다.


“저, 다음 주에 결혼해요.”


그런데 지난주, 친한 후배가 불쑥 말했다. “저 결혼하게 됐어요. 다음 주에.”

 그녀는 갑작스레 결혼 사실을 알려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로서는 전혀 사과받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에게 결혼식에 올 필요도, 올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그녀가 결혼 카드를 한 장 보내 왔다.

 ‘Live well, Laugh Often, Love much’라는 문구가 쓰여진 그 카드에는, 언제 어디로 오라는 문구나 약도 같은 것들은 일절 없었다.

대신 “2006년 중국 상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2015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합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시간들을 그려보기도 하면서 가장 두 사람다운 단어들로 천천히 빈칸을 채워 가려합니다.

”라는 글귀만이 적혀 있었다. 오랜 커플인 그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결혼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의 회의 일정이나 월요일의 PT 준비처럼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쳐내다 보니 좀처럼 결혼식 준비를 할 수 없었고,

 하루 이틀 미루다가 많은 시간이 지났고, 마침내 ‘결혼식 때문에 결혼을 미루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아서’

 결혼 여행으로 결혼식을 대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할 일이 많아서 결혼식은 생략이에요”라니, 괜히 덩달아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결혼식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된 결혼식이 아니었다.

 돈을 들인 만큼 호화스러워진 결혼식도 물론 아니다.

부모님에게 죄송하든 유난 떤다고 욕을 먹든 자신들의 생각대로 밀어 붙인 ‘그들다운 결혼식이다.

내가 아는 어떤 커플은 연애기간 동안 서로를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그 전시를 휘휘 둘러 보는 것 만으로, 지지고 볶고 치대고 앵기는 연애의 역사를 얼마 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키가 2m에 달하는 미국 남자와 결혼 한 나의 선배는 결혼식 날 이베이에서 검색해 구입 한 빈티지 원피스를 입었다.

또한 결혼 행진곡 대신 두 사람이 함께 좋아하던 록 밴드 윌코의 곡을 틀었다.

윌코는 처음에 두 사람이 만나서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된 계기가 되어 준 뮤지션이었으니, 참으로 지당하고 마땅한 선곡이다.

 이 날의 결혼식에서는 음악을 좋아하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함께 춤을 추는 유쾌한 장면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잘 살고 자주 웃고 더 많이 좋아하겠다는 후배의 결혼 카드. 잘 살아라.

지금 후배 커플은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고 있을 것이다.

가서도 거창한 계획은 없다고 시크하게 말했었지만, 캐리어에 수수한 흰색 원피스도 한 벌 챙겨 넣었고,

네일은 가우디 타일 컨셉으로 알록달록하게 연출했다.

거리에서 12유로에 구입한 부케를 들고 람블라스 거리를 버진 로드 삼아 걷기도 했다.

 스토킹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자신들이 결혼하는 과정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페이스북에 ‘Live well, Laugh Often, Love much’라는 페이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웨딩홀에 사람을 가득 채우지 않고도, 더 많은 사람들과 결혼의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김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