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년 10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유배생활 중에 마을 사람들의 자식들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학(邪學)을 접했다는 죄명으로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 온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다산은 당시 자신이 머물던 주막집 방에 작은 서당을 열었다.
10월 10일 열다섯 살 소년이 서당을 찾아왔다. 다산이 일주일을 두고 보니 소년의 성실함과 재능이 눈에 띄었다.
다산은 소년을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누며 공부에 매진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오늘 나눈 대화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그 내용을 친필로 적어주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내가 산석(山石)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鈍) 것이요, 둘째는 막힌(滯) 것이며, 셋째는 답답한(戛)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데 있다
. 둘째,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 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틔우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다산으로부터 진지하게 공부해보라는 권유와 함께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소년은
강진의 아전(衙前)이었던 황인담(黃仁聃)의 맏아들 황상(黃裳)이고, ‘산석’은 그의 아이 적 이름이다.
아전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 관리를 말한다.
황상은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준 스승에게 감격했다.
그는 스승이 종이에 직접 써준 가르침을 ‘삼근계(三勤戒)’라 부르며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돌처럼 지키고 강물이 바다를 향하듯 따랐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의 정신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다산은 쓸쓸한 유배지에서 만난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황상을 아들처럼 아끼고 진심으로 가르쳤다.
스승은 제자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문사(文史)를 공부할 것을 권했는데,
특히 황상이 시(詩)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을 간파하고 시문(詩文)에 집중하도록 이끌었다.
책을 추천해주고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주었으며, 과제를 내주고 치밀하게 지도했다.
다산은 제자의 눈높이와 처지에 맞춰 때로는 제자 스스로 답을 찾게끔 질문과 과제를 주었고,
때로는 제자에게 두보(杜甫), 한유(韓愈), 소동파(蘇東波), 육유(陸遊) 등 네 명의 시인을 철저하게 연구하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스승과 제자는 함께 소풍을 떠나고 시를 짓기도 했으며, 스승은 돌림병에 걸려 아픈 제자를 위해 ‘학질 끊는 노래’를 지어 주기도 했다.
다산은 자신의 맏아들 정학연(丁學淵)이 유배지를 찾아왔을 때 황상을 불러 함께 공부하고 교유하도록 했다.
황상이 평생 동안 즐겨 사용한 ‘치원(巵園)’이라는 호를 지어준 사람도 다산이고,
또 황상의 아들이 태어나자 손수 이름을 지어주며 “네 아들은 내 손자다”고 할 정도로 스승은 제자를 사랑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며 제자는 나날이 성장했다. 특히 시 짓기에서 큰 성취를 보였다.
그런 황상을 보며 다산은 “제자 중에서 너를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기뻐한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훌륭한 제자가 훌륭한 스승에게 잘 배웠다
다산은 황상이 31살 때 유배에서 풀려 강진을 떠났다. 제자는 스승이 떠난 후에도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독서는 물론이고, 책의 내용 가운데 주요 부분을 뽑아서 적는 초서(抄書)에 열중했다.
초서는 스승이 누누이 강조한 공부법이어서 황상은 일흔 살을 넘어서도 초서를 멈추지 않았다.
이를 두고 주위 사람들이 건강을 염려하여 만류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나이에 남의 글이나 베껴서 뭐할 거냐고 비웃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귀양살이 20년 동안에 날마다 저술만 일삼아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습니다.
제게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려주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것을 얻었다.
’ 몸으로 가르쳐주시고 직접 말씀을 내려주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합니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저의 백 년 사업이 이를 버려두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에서 그 유명한 ‘과골삼천(踝骨三穿)’의 고사가 등장한다.
‘과골삼천’은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났다는 뜻으로, 다산이 유배생활 중에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집필했는지를 보여준다.
황상은 이런 스승의 자세를 일생 동안 흠모하며 자신도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다.
황상은 스승 다산처럼 대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자신이 한 평생 전념한 시(詩)에 있어서는 스승 못지 않은 경지에 올랐다.
황상은 일생 동안 강진에서 은거하듯 살았지만 60세를 넘으면서 그의 이름이 서울까지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 같은 시대를 산 명사들은 황상의 질박하고 바른 인품과 수십 년 동안 스승을 본받은 자세, 그리고 그의 독창적인 시에 주목했다.
특히 당대 최고의 지성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황상의 시를 접하고 한눈에 반했다.
추사는 황상을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에 유배에서 풀리자마자 강진을 찾았을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으며 두 사람은 교유하며 마음을 나눴다. 훗날 추사는 황상의 시와 글을 모은 <치원유고(巵園遺稿)>에 서문을 써주면서 “지금 이 세상에 이 같은 작품은 없다”고 평했다.
추사와 마찬가지로 시문과 글씨에 능했던 추사의 동생 김명희(金命喜)는 1856년에 쓴 글에서 황상이 젊어서부터 수십 년 동안
다산을 충실히 따른 점을 들어 그를 ‘뒤따르며 본 받는 사람’이라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그의 시가 다산 집안의 법도와 다르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50년간 네 분(다산이 황상에게 집중해서 공부하라고 추천한 네 명의 시인 두보, 한유, 소동파,
육유를 말한다)에게 마음을 쏟은 것은 멀리는 두보나 한유, 소동파와 육유와 비슷해지기를 구하고
, 가까이는 다산과 비슷해지기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누구와도 비슷해지지 않고 치원의 시를 이루었으니,
시가 살아 있는 사물임을 알 수 있겠다. (…) 절로 능히 네 분과 정신으로 만나고 마음으로 깨달아,
본인도자신의 시가 앞서 능한 이들의 성취보다 내달려 높이 솟고 더 깊이 들어간 줄을 알지 못했다.
이는 두보나 한유에게 압도되지 않고, 아울러 다산의 시도 아닌 것이니,
네 분을 잘 배우고, 또한 다산을 훌륭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김명희는 황상의 시에 대해 그가 한 스승에게 깊이 배우고, 스승이 추천한 네 명의 시인들을 50년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마침내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참신한 시를 쓰고 있다고 상찬했다. 요컨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뜻이다.
18년만의 재회
1836년 2월 중순, 남루한 차림의 한 나그네가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의 집 앞에 섰다. 그는 며칠 후 열리는 다산의 회혼연(回婚宴)에 참석하기 위해 강진에서 열흘 넘게 걸어 막 도착한 터였다. 이 나그네는 누굴까?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할 때 처음 만나 사제의 연을 맺은 제자, 바로 황상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으니 벌써 34년 전의 일이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 고향 집으로 올라 온 후 사제 간에 연락이 끊겼다. 다산의 집과 강진은 자주 왕래하기에는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두 사람 다 이런저런 곡절이 많아서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해 실천해 왔다. 그런 두 사람이 드디어 다시 만났다. 우여곡절 끝에 18년만의 재회이니 둘 다 남다른 감회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제자의 나이 마흔아홉, 스승은 일흔다섯의 노인이 되었다.
당시 다산은 건강이 몹시 안 좋았다. 앉아 있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고, 2월 22일에 열릴 예정이던 회혼연을 취소해야 할 정도로 병이 깊었다. 황상은 오랜 만에 만난 아픈 스승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다산 역시 정신이 들 때마다 제자가 곁에 있는지 찾았다. 하지만 우환이 있는 집에 객으로 오래 머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2월 19일 새벽, 황상은 스승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자의 마음을 짓눌렀다. 스승은 꾸러미 하나와 종이 한 장을 그에게 건넸다. 꾸러미에는 몇 가지 선물이 들어 있었고, 종이에는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제자를 위해 스승이 직접 쓴 선물 목록이 적혀 있었다.
황자중에게 준다. (送黃子中)
‘규장전운’ 한건 (奎章全韻一件)
중국 붓 한 자루 (唐筆一枝)
중국 먹 한 개 (唐墨一碇)
부채 한 자루 (扇子一把)
연배 한 개 (烟杯一具)
여비 돈 두 냥 (路費 錢二兩)
이글의 원본이 남아 있다. 원본의 글씨체를 보면 다산이 얼마나 힘겹게 글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스승의 글을 보고 황상은 감사함과 죄송함에 울음을 삼켰다. 다산이 회혼날인 2월 22일 아침 숨을 거뒀으니 이 글은 그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에 쓴 절필(絶筆)이다.
‘책, 붓, 먹, 부채, 연배’, 이 선물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위중한 몸으로 물건을 챙기고 의식이 혼미한 중에도 친필로 적어서 전할 정도면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약용과 황상의 관계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쓴 <삶을 바꾼 만남>에서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이렇게 말한다.
“‘규장전운’을 왜 넣었는지 알겠는가? 먹과 붓도. 이제라도 그간 접어두었던 시 공부를 다시 시작하란 뜻이시네. 더우면 부채를 부치고, 힘들면 담배도 한 대 피우게. 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란 뜻이시네.”
사람은 사람에 의해 성장한다
정약용과 황상의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놀라운 사제관계(師弟關係)이다. 나는 힘든 시절에 만난 제자에게 진심으로 가르침을 전한 스승의 마음에 감동한다.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꿨다. 또한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는 각오로 실천했다는 제자의 ‘명심누골(銘心鏤骨)’의 삶에 감탄한다. 정민 교수는 <삶을 바꾼 만남>에서 황상에 대해 “열다섯에 스승과 처음 만난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스승을 모셨다. 잠시의 흔들림도 없었다. 평생을 지켰다. 바꾸지 않았다”고 말한다.
황상은 다산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섬겼고, 다산은 황상이라는 훌륭한 제자를 키웠다. 황상이 훌륭한 제자인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하나 더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다산의 절필’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라면 이번 이야기는 우직한 성실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황상이 소중히 간직해 온 ‘삼근계’를 적은 종이가 50년쯤 지나자 너덜너덜해졌다. 이를 본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丁學淵)이 1854년에 그 글을 똑같이 다시 써주었다. 열다섯 살에 스승이 써준 글을 52년 후에 스승의 아들이 다시 써준 것이다. 그리고 7년 뒤에 황상은 ‘임술기(壬戌記)’란 글을 썼다. 1802년 임술년에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받고 60년이 지나 다시 임술년을 맞는 감회를 적은 글이다. 이 글에서 황상은 열다섯에 받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그만두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마음에 늘 품고 있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지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한묵(翰墨) 속에서 노닐고 있다. 비록 이룬 것은 없다 하나, 구멍을 뚫고 어근버근함을 틔우는 것을 삼가 지켰다고 할 만하다. 또한 능히 마음을 확고히 다잡으라는 세 글자를 받들어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나이가 일흔다섯이 넘어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어찌 제멋대로 내달려 도를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지금 이후로도 스승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잃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얘야! 어겨서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을 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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