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상의 역사산책 72]마지막 선비 김창숙, 일제와 이승만에 맞서 싸우다
◈ 아주 특별한 손님,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병실을 방문하다
여기에 아주 특이한 사진이 남아 있다.
1962년 5월 초 서울의 중앙의료원.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사경을 헤매는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 선생을 병문안했다.
두 달 전 3.1절에 군사정권은 심산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수여했다.
해방 후 생존한 독립운동가가 받은 유일한 건국훈장이었다.
온통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된 쿠데타 세력이 평생을 항일투쟁으로 일관한 김창숙에게 건국훈장을 준 것은 한 편의 희극이다.
심산이 심신이 건강했다면 단호히 거부했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일왕에게 충성맹세를 한 뒤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사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와 독립군과 팔로군에게 총질을 했던 박정희가 문병까지 온 것이다.
당시 김창숙이 의식이 혼미한 상태여서 찾아온 사람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 박정희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정신이 온전했다면 문병을 거절했을테고 굳이 찾아왔다면 호통소리만 듣고 쫒겨났을 것이다.
기다렸다는듯이 박정희 의장이 조문을 왔다.
북한의 김일성과는 달리 일제 치하에서 거친 부끄러운 경력을 씻으려는듯이 열심히 김창숙을 챙겼다.
심산은 의식이 남던 마지막까지 "통일이 안 돼서…", "유림들이 잘해 나가야…"라는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군사정권의 실권자가 저렇게 뒤를 쫓을까?
◈ 일본 경찰, 가혹한 고문 끝에 김창숙을 앉은뱅이로 만들다
일본 경찰이 추궁하려는 것은 조선에 잠입해 600여 명의 유림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일과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의 배후를 캐는 일이었다.
이들은 각종 형구를 벌려놓고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말로 다하기 어려운 고문을 받은 결과, 점차 두 다리가 마비돼 하반신이 불구가 되었다.
앉은뱅이가 된 것이다.
대구형무소로 넘어간 뒤 재판을 앞두고 변호사 김용무와 손치은이 찾아와 변론을 하겠다고 나섰다.
김창숙은 단호히 변론을 사절했다.
"나는 대한사람으로 일본 변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정말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해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
김창숙은 재판장의 "본적은?"이라는 심문에 대해 "없다"고 답했다.
"없다니?"라는 반문에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재판에 임했다.
재판장이 "그대의 꺾일 줄 모르는 투지가 장하기는 하나 조선이 무슨 힘으로 독립을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힐문하자, 심산은 "내가 보기에는 일본인의 안목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것 같소. 그렇게 천하대세를 모르고 망동하는 것을 보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오"라고 답했다.
김창숙이 정확하게 예언한 셈이다.
공판에서 검사의 무기형 구형에 판사는 14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나석주 의사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의 주동자로 인정하여 살인미수,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 취급령 위반이란 죄목이다.
◈ 7년만에 석방되어 시를 쓰며 울분을 달래다
투옥 7년째가 되는 1934년 9월 들어 건강이 악화되었다.
일제는 옥사하지 않을까 겁을 먹고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김창숙은 울산 백양사로 들어가 요양생활을 시작했다.
이 곳에서 시를 쓰며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형사들이 찾아와 이름을 일본식으로 창씨하라는 명령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 사이에 큰 아들 환기는 일경의 고문을 받고 출옥한 지 얼마 안되어 사망한 데 이어 둘째 아들 승로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중경 임시정부로 가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김창숙은 수많은 시를 쓰면서 모든 슬픔을 삭였다.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7일 예비 검속에 걸려 왜관경찰서에 끌려 갔다가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 해방을 맞아 외세에 맞서 민족분단의 저지에 나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일가친척 등 천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다들 집에 모여 술잔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나눴다.
김창숙이 세상에 나와 67년만에 처음 맞는 거룩한 날이었다.
동지들의 요청에 따라 상경한 그는 해방이 되고도 석 달이 지나서야 귀국한 임시정부 일행을 만났다.
이때부터 백범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의 선두에 섰다.
한편으로는 유림을 결속시킨 뒤 친일파와 썩은 유생들을 쫒아내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했다.
김창숙은 성규관대학교 총장에 취임하면서 "성균관은 우리나라의 유학을 높이 장려하던 곳이다. 유교가 쇠퇴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국학도 역시 폐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창숙과 김구의 뜻과 달리 한반도는 분단과 단정체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창숙이 쓴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외국의 군대가 철수하지 않으면 우리 조선에는 평화 없으리라. 아아~ 슬프다. 김일성과 이승만. 같은 겨레요 형제간이로다. 형과 아우가 본시 원수가 아닌데 어이해 콩깍지로 콩을 삶은다더냐. 아아~ 슬프다. 미국과 소련. 너희 군대는 본래 이름이 없었다. 너희들이 만약 일찍 철거한다면 우리 천하에는 환호성 진동하리"
1948년 3월 12일 김창숙은 김구와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등과 함께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착시키고 두 국가가 형성되면 남북 형제가 미.소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대하게 돼 민족의 참화가 예상된다고, 한국전쟁 발발을 예언했다.
시국은 이들의 우려대로 진행됐다.
남북한 정부 수립~김구 암살~반민특위 무산~6.25전쟁 발발…
◈ 반독재 기치 아래 이승만과 정면승부에 나서다
이승만의 실정과 독재를 신랄하게 꾸짖는 내용이었다.
1957년 대표적인 친일파 최남선이 사망하자 이승만이 조사를 지어 그를 칭찬하자, 김창숙은 <경무대에 보낸다>는 격문을 신문에 발표했다.
"진실로 올바른 세상 만들려거든 우선 역적들을 주살하라. 생각하면 일찍이 삼일독립선언 때 남선 이름 떠들썩 많은 사람 기렸지. 이윽고 반역아. 큰소리로 외쳐 일선융화 옳다고. 슬프다, 그의 대역. 하늘까지 닿은 죄 천하와 나라 사람 다 함께 아는 바라"
이승만이 3선 연임까지 강행하자 심산이 나섰다.
그는 공개적으로 각료 중 간신배에 해당하는 몇몇을 해임시키고, 민의 조작의 주동 집단인 자유당을 해체하며, 부정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김창숙 아니면 감히 하기 어려운 제언이었다.
그 대답은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과 유도회에서 쫒아내는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갖가지 공작을 벌여 일제 때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낸 친일파 윤우경이 중심이 된 자유당 정치 브로커들이 유도회를 장악하도록 했다.
성균관대 총장 자리는 김창숙을 몰아내고 역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이선근을 앉혔다.
모든 공직에서 밀려난 김창숙은 서울에서 영업용 택시를 모는 아들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집 한 칸 없어서 여관을 전전하고 병원비를 구하지 못해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권력자들의 도움을 거절했다.
드디어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됐다.
◈ 이승만 망명…병상에서 일어나 백범 김구의 한풀이에 나서다
힘을 얻고 일어선 그가 할 일은 많았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생기면서 회장에 선출된 것을 비롯해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회장,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직도 맡았다.
김구 선생 암살에 대한 폭로가 잇따르자,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위원장에 추대됐다.
그러나 83살의 나이로 마지막 병원 신세를 지던 시절 5.16 군사 쿠데타 소식이 날아왔다.
이미 그때는 김창숙 선생은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진 시기였다.
김창숙 선생이 서거하자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심산상을 제정했다.
2000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다.
김 추기경은 행사 직후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심산 선생은 모두가 존경하는 분이고, 이 분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큰 절을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세월이 지난 후 심산사상연구회가 재정난에 허덕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그마한 상자를 보냈다.
그 안에는 본인이 받은 상금 700만 원에다 300만 원을 더 보탠 1,000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유교나 천주교의 장벽을 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나 김수환 추기경이야말로 후손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보여주는 등불이 아닐까?
최근 <심산 김창숙 평전>을 펴낸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은 이렇게 심산의 일생을 평가했다.
"참선비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 심산은 참선비가 되었다. 유학 경서나 읽고 거들먹대는 선비가 아니라 시대악과 처절하게 맞서 싸운 선비였다. 그가 타도하고자 한 '시대악'의 원흉은 일본 침략주의 세력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분단과 이승만 독재 세력이었다"
여기에 아주 특이한 사진이 남아 있다.
1962년 5월 초 서울의 중앙의료원.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사경을 헤매는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 선생을 병문안했다.
두 달 전 3.1절에 군사정권은 심산에게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수여했다.
해방 후 생존한 독립운동가가 받은 유일한 건국훈장이었다.
온통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된 쿠데타 세력이 평생을 항일투쟁으로 일관한 김창숙에게 건국훈장을 준 것은 한 편의 희극이다.
심산이 심신이 건강했다면 단호히 거부했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일왕에게 충성맹세를 한 뒤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사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와 독립군과 팔로군에게 총질을 했던 박정희가 문병까지 온 것이다.
당시 김창숙이 의식이 혼미한 상태여서 찾아온 사람을 잘 알지 못했던 것이 박정희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정신이 온전했다면 문병을 거절했을테고 굳이 찾아왔다면 호통소리만 듣고 쫒겨났을 것이다.
고 심산 김창숙 선생의 빈소를 방문해 분향하고 있는 박정희 의장.
박정희가 병실을 다녀가고 며칠 후인 5월 10일 김창숙 선생은 향년 84살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기다렸다는듯이 박정희 의장이 조문을 왔다.
북한의 김일성과는 달리 일제 치하에서 거친 부끄러운 경력을 씻으려는듯이 열심히 김창숙을 챙겼다.
심산은 의식이 남던 마지막까지 "통일이 안 돼서…", "유림들이 잘해 나가야…"라는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군사정권의 실권자가 저렇게 뒤를 쫓을까?
◈ 일본 경찰, 가혹한 고문 끝에 김창숙을 앉은뱅이로 만들다
자신의 84년 인생과 자식들까지 조국에 바친 심산 김창숙.
1927년 6월 10일, 김창숙은 상해에서 체포돼 대구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일본 경찰이 추궁하려는 것은 조선에 잠입해 600여 명의 유림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한 일과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의 배후를 캐는 일이었다.
이들은 각종 형구를 벌려놓고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말로 다하기 어려운 고문을 받은 결과, 점차 두 다리가 마비돼 하반신이 불구가 되었다.
앉은뱅이가 된 것이다.
대구형무소로 넘어간 뒤 재판을 앞두고 변호사 김용무와 손치은이 찾아와 변론을 하겠다고 나섰다.
김창숙은 단호히 변론을 사절했다.
"나는 대한사람으로 일본 변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정말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해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
공판장으로 가는 김창숙 (사진=시대의 창 제공)
재판은 1928년 10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제2호 형사법정에서 변호인도 없이 개정되었다. 김창숙은 재판장의 "본적은?"이라는 심문에 대해 "없다"고 답했다.
"없다니?"라는 반문에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재판에 임했다.
재판장이 "그대의 꺾일 줄 모르는 투지가 장하기는 하나 조선이 무슨 힘으로 독립을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힐문하자, 심산은 "내가 보기에는 일본인의 안목이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것 같소. 그렇게 천하대세를 모르고 망동하는 것을 보면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오"라고 답했다.
김창숙이 정확하게 예언한 셈이다.
공판에서 검사의 무기형 구형에 판사는 14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나석주 의사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의 주동자로 인정하여 살인미수,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 취급령 위반이란 죄목이다.
김창숙 사건의 재판을 보도한 기사. (사진=시대의 창 제공)
김창숙은 항소를 포기하고, 대전교도소로 이감해 길고 긴 감옥살이에 들어갔다. ◈ 7년만에 석방되어 시를 쓰며 울분을 달래다
투옥 7년째가 되는 1934년 9월 들어 건강이 악화되었다.
일제는 옥사하지 않을까 겁을 먹고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김창숙은 울산 백양사로 들어가 요양생활을 시작했다.
이 곳에서 시를 쓰며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형사들이 찾아와 이름을 일본식으로 창씨하라는 명령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 사이에 큰 아들 환기는 일경의 고문을 받고 출옥한 지 얼마 안되어 사망한 데 이어 둘째 아들 승로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중경 임시정부로 가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김창숙은 수많은 시를 쓰면서 모든 슬픔을 삭였다.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7일 예비 검속에 걸려 왜관경찰서에 끌려 갔다가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 해방을 맞아 외세에 맞서 민족분단의 저지에 나서다
김창숙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성규관대학에서 유림들과 함께 선 심산 (맨 앞에 앉아 계신 분). 그 뒤가 아놀드 미 군정장관.
일본이 항복한 그 다음날 김창숙은 청년들의 부축을 받으며 옥문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일가친척 등 천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다들 집에 모여 술잔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나눴다.
김창숙이 세상에 나와 67년만에 처음 맞는 거룩한 날이었다.
동지들의 요청에 따라 상경한 그는 해방이 되고도 석 달이 지나서야 귀국한 임시정부 일행을 만났다.
이때부터 백범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의 선두에 섰다.
한편으로는 유림을 결속시킨 뒤 친일파와 썩은 유생들을 쫒아내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했다.
김창숙은 성규관대학교 총장에 취임하면서 "성균관은 우리나라의 유학을 높이 장려하던 곳이다. 유교가 쇠퇴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국학도 역시 폐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창숙과 김구의 뜻과 달리 한반도는 분단과 단정체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창숙이 쓴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외국의 군대가 철수하지 않으면 우리 조선에는 평화 없으리라. 아아~ 슬프다. 김일성과 이승만. 같은 겨레요 형제간이로다. 형과 아우가 본시 원수가 아닌데 어이해 콩깍지로 콩을 삶은다더냐. 아아~ 슬프다. 미국과 소련. 너희 군대는 본래 이름이 없었다. 너희들이 만약 일찍 철거한다면 우리 천하에는 환호성 진동하리"
1948년 3월 12일 김창숙은 김구와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등과 함께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착시키고 두 국가가 형성되면 남북 형제가 미.소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대하게 돼 민족의 참화가 예상된다고, 한국전쟁 발발을 예언했다.
시국은 이들의 우려대로 진행됐다.
남북한 정부 수립~김구 암살~반민특위 무산~6.25전쟁 발발…
◈ 반독재 기치 아래 이승만과 정면승부에 나서다
백범암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된 김창숙 선생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시대의 창 제공)
이승만의 안하무인 격 실정을 보다 못한 김창숙은 1951년 봄 <이승만 하야 경고문>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실정과 독재를 신랄하게 꾸짖는 내용이었다.
1957년 대표적인 친일파 최남선이 사망하자 이승만이 조사를 지어 그를 칭찬하자, 김창숙은 <경무대에 보낸다>는 격문을 신문에 발표했다.
"진실로 올바른 세상 만들려거든 우선 역적들을 주살하라. 생각하면 일찍이 삼일독립선언 때 남선 이름 떠들썩 많은 사람 기렸지. 이윽고 반역아. 큰소리로 외쳐 일선융화 옳다고. 슬프다, 그의 대역. 하늘까지 닿은 죄 천하와 나라 사람 다 함께 아는 바라"
이승만이 3선 연임까지 강행하자 심산이 나섰다.
그는 공개적으로 각료 중 간신배에 해당하는 몇몇을 해임시키고, 민의 조작의 주동 집단인 자유당을 해체하며, 부정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김창숙 아니면 감히 하기 어려운 제언이었다.
그 대답은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과 유도회에서 쫒아내는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갖가지 공작을 벌여 일제 때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낸 친일파 윤우경이 중심이 된 자유당 정치 브로커들이 유도회를 장악하도록 했다.
성균관대 총장 자리는 김창숙을 몰아내고 역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이선근을 앉혔다.
모든 공직에서 밀려난 김창숙은 서울에서 영업용 택시를 모는 아들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집 한 칸 없어서 여관을 전전하고 병원비를 구하지 못해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권력자들의 도움을 거절했다.
드디어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됐다.
◈ 이승만 망명…병상에서 일어나 백범 김구의 한풀이에 나서다
성균관대학교 교정에 서있는 김창숙 선생의 동상. (사진=시대의 창 제공)
김창숙은 이승만의 하야와 망명 소식을 서울 중앙의료원 병실에서 들었다. 힘을 얻고 일어선 그가 할 일은 많았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생기면서 회장에 선출된 것을 비롯해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회장,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직도 맡았다.
김구 선생 암살에 대한 폭로가 잇따르자,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위원장에 추대됐다.
그러나 83살의 나이로 마지막 병원 신세를 지던 시절 5.16 군사 쿠데타 소식이 날아왔다.
이미 그때는 김창숙 선생은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미해진 시기였다.
김창숙 선생이 서거하자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심산상을 제정했다.
2000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여섯 차례 큰 절을 올렸다. (사진=심산사상연구회 제공)
심산상 수상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의 기일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였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다.
김 추기경은 행사 직후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심산 선생은 모두가 존경하는 분이고, 이 분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큰 절을 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세월이 지난 후 심산사상연구회가 재정난에 허덕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그마한 상자를 보냈다.
그 안에는 본인이 받은 상금 700만 원에다 300만 원을 더 보탠 1,000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유교나 천주교의 장벽을 넘어 심산 김창숙 선생이나 김수환 추기경이야말로 후손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보여주는 등불이 아닐까?
최근 <심산 김창숙 평전>을 펴낸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은 이렇게 심산의 일생을 평가했다.
"참선비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 심산은 참선비가 되었다. 유학 경서나 읽고 거들먹대는 선비가 아니라 시대악과 처절하게 맞서 싸운 선비였다. 그가 타도하고자 한 '시대악'의 원흉은 일본 침략주의 세력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분단과 이승만 독재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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