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물

[스크랩] 독립운동가 윤봉길

참도 2013. 11. 5. 14:16

 

 

독립운동가 윤봉길( 1908 -  1932 ) 

 

 

 


  

독립운동가. 본명은 우의(禹儀).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 2년을 다니다 중퇴한 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21년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중국 고전을 배웠으며, 26년 농촌부흥을 위한 농민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이듬해는 빈곤해서 취학하기 어려운 아동을 모집하여 야학을 열고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했다. 또한 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등 농촌부흥운동에 앞장섰다.

 30년 가족에게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고 쓴 편지를 남겨 놓고 망명, 중국 칭다오(靑島)에 들어가 모직공장 직공, 세탁소 직원으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찾았다. 3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활동무대를 옮겨 프랑스조계(租界)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에 있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했다. 생계를 위하여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했으며, 상하이영어학교를 다녔다.

 그해 겨울 임시정부의 국무령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히고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본왕을 죽이려다 실패하자, 상하이 일대는 한층 복잡한 정세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군벌은 상하이를 침공했는데 처음에 참패한 분풀이로 주택지에 무차별폭격을 가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실패를 은폐하고 크게 승리한 것처럼 세계에 선전할 목적으로 일본왕의 생일인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전승기념식을 열기로 했다. 이에 김구ㆍ이동녕(李東寧)ㆍ이시영(李始榮)ㆍ조소앙(趙素昻) 등이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했다.

 4월 29일 식장에 참석하여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상하이파견군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상하이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瑞貞次) 등이 즉사했고, 제 3 함대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郎), 제 9 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로루(重光葵) 등은 중상을 입었다. 그 밖에 식에 참석했던 군관민 다수가 부상했다. 윤봉길은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오사카(大阪)로 호송되어 12월 19일 총살형을 당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연보】

▶1908 :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柿梁里)에서 출생.

▶1919 : 3ㆍ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시위에 가담하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했으며,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움

▶1921 :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 문하에서 경서와 시문을 배우고 신문학을 탐독함.

▶1922 : 춘추시(春秋詩)에서 장원을 차지했으며, <명추(鳴椎)>, <옥타(玉唾)> 등 시집을 펴냄.

▶1926 : 야학인 ‘각곡독서(角谷讀書)’를 조직, 청소년을 지도하며 문맹 퇴치와 농촌부흥운동.

▶1927 :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 3권을 저술, 국어, 산수, 역사, 지리에 이르기까지 청소년 교육에 힘씀

▶1928 : [부흥원(復興院)]을 창건하고 학예회와 월례 강연회를 열어 일제의 침략주의를 풍자함.

▶1929 : [월진회(月進會)]와 [목계구매조합(沐溪購買組合)], [수암체회(修岩體會)]를 조직, 농촌부흥운동을 펴고, 축산, 저축, 식목, 체육 운동에 앞장섬.

▶1930 : [월진회]사업 등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 중국으로 망명, 선천(宣川)에서 검거돼 한달여의 옥고를 치르고 만주를 거쳐 청도(靑島)에 이름.

▶1931 : 상해로 옮겨 [공우회(工友會)]를 조직, 노동운동을 했고, 이때 김구 선생을 만남.

▶1932 :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왜황(倭皇) 생일 경축식전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사령관 백천의측(白川義則), 상해 거류민단장 하단정차(河端貞次)를 즉사케 하는 등, 10여 명을 사상시키고 현장에서 체포됨.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돼 대판 위수 형무소에 수감. 12월 18일 김택(金澤) 육군 형무소로 이감돼 다음 날인 12월 19일 김택 교외 삼소공병(三小工兵)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1946 : 5월 유해 일본에서 봉환,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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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의 생애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큰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1세 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3·1운동 후  일본식 교육을  받기 싫어 중퇴하였다.  19세 때  길에서 글을 몰라 아버지의 무덤을 못 찾는 무식한 청년을 보고, 자기 집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어  농민들을  가르쳤다.  22세 때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고 근면과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백범 김구와의 만남


  그 뒤 김구의 특명을 받아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하여  상하이 일본 거류민 단장 등을 죽이고 무라 등 많은 일본군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  제스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오사카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체포되던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거듭 외치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식이 열리던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식장 주변에는 전차를 비롯한 수많은 보병대와 기병대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삼엄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  중국인은 물론이고 외국 사람도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 경계망을 뚫고 윤봉길은 들어갔다.  어깨에는 물통을 메고, 양손에는  일장기와  폭탄이 든  도시락을  들고  당당하게 들어간 것이다. 축하식이 시작되자 신사복 차림의 청중들 틈에  서 있던 윤봉길은  앞쪽 중앙  사열대를 향하여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자결하려는 순간  체포되다


 식이 끝나고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는 찰나  윤봉길은  중앙 사열대를  향하여 폭탄을 던졌다.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식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윤봉길은  아주 침착하게  다른 폭탄을 껴안고  자결하려는 순간  체포되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으려던  당초의 계획이 어긋나자 그는  그 자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거듭 외치면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갔다.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 사라쓰구가 즉사하고,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중상으로  입원했다가 죽었으며,  일본 공사  시게미쓰는  한 쪽 다리를 잃었다.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호는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으며,  제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을  비롯한 5명은  크게 다쳤다. 

 

 

 

 

  윤봉길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재판소로 넘겨졌다.  재판에서  윤봉길은  살인·상해·폭발물 취급 위반 등 여러 가지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 꽃다운 청춘으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윤봉길은  조국 광복을 위해  겨레의 가슴에  구국의 횃불을  밝혀주고  세상을 떠났다.
 

 

출처 : B l u e & B l u e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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