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은 어떻게 박근혜에게 접근했을까
心平 (sori37) | 10.2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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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은 어떻게 박근혜에게 접근했을까
안수도 받지 않은 사이비 목사인 최씨(당시 62세)는 지난 74년 육영수여사 사망 직후 자신을 목사로 소개하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녀 근혜씨(당시 23세)에게 접근했다 최씨는 "꿈에 육여사가 나타나 근혜씨를 도와주라 는 얘기를 들었다"며 근혜씨에게 접근한 후 어머니를 잃은 근혜씨를 위로하며 신임을 얻었다.
최태민과 박근헤가 국정을 농당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최태민 목사가 1978년 박 전 대표를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로 추대한 뒤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 전 대표를 배경으로 공직 인선에 개입하는 등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김재규는 그의 공판기록에서 최태민은 박근혜를 등에 업고 기업에 돈을 요구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국정논단 수준이 도를 넘자 이를 박 대통령에게 직언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만약 박근혜와 최태민의 국정농단을 방치하면 민심을 잃고 있는 유신정권에 큰 치명타가 될 것이기에 박 대통령에게 중앙정보부가 수집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최태민은 박정희 서거후 1980년 보안사에 의해 강원도로 쫓겨갔지만 박근혜가 전두환에게 간정해 다시 그녀 주변으로 복귀했다 합니다. 월간조선 7월호는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영남대학 등 박근혜 후보가 비리의혹을 받고 있는 모든 일에 최태민이가 관계하고 있다고 보도 했다. 박근혜는 자신은 최목사와 무관한 관계임을 주장하지만 지금도 최목사의 사위가 지근거리에서 박근혜를 보좌하고 그의 딸이 재산을 관리한다는 보도가 있는 등 그와의 정신적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박 전 대표는 지금도 최태민 인척을 총애한다”며 “이는 대권주자로서 문제 있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최태민은 박근헤를 업고 자신이 관리하던 육영재단을 전횡햇다. 이로 인해 90년 육영재단 운영을 둘러싼 분규가 확대되고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동생과 법정다툼까지 간 결과 근영씨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은퇴했다. 최씨도 이때 함께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가 최태민과 박근헤를 동시에 친국, " 그년(박근혜)
이 흐놈(최태민)한테 홀려-박근혜. 최태민-박정희 시해 원인제공
박근혜 1998.11.01 월간중앙 권말부록1 김계원의 최초 인터뷰 “나보고 갑자기 최태민이를 아는가”하고 물으셨다. 김재규한테 들었다는 소리는 안 하고 ‘예, 압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놈이 말이야, 근혜를 홀려 가지고 내가 혼을 좀 내줬지.’하셨다. 경상도 사투리로 도깨비한테 홀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나.
대통령은 ‘그년(근혜)이 그놈한테 홀려 도무지 시집 가려고 해야 말이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재혼할 수 있겠나’하셨다.”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대통령의 딸이 관계된 스캔들이라 쉬쉬하며 공개하지 않아 베일에 가려진 사건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총재로 있는 새마음봉사단과 관계된 비리가 적지 않아 치안본부와 민정수석실과 중앙정보부 등이 직접 조사에 나서 비리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했다.
박대통령은 유부남인 최목사와 20대 중반이던 박을 나란히 세우고 직접 최목사 비리에 대해 증거자료들까지 내밀면서 친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극구 최태민을 변호하고 나서자 박대통령이 관계당사자들을 모두 불러 몸소 친국을 하는 헤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김재규는 큰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 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라며 김재규 전 정보부장은 구국여성봉사단의 비리 외에도 박근혜에게 불만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와 함께 “박근혜가 지방 행사에 참석하면 할머니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절을 했어요. 김재규는 ‘아무리 대통령 딸이라도 그렇지, 국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국민이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제게 되묻기도 했어요. 촌로들이 그렇게 절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걸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부추겼다는 겁니다.
김재규가 특히 이런 사건들 때문에 박근혜의 미움을 받았다. 박근혜씨가 당시 김재규의 경질을 바라고 박대통령에게 이를 조르고 있었다. 김재규는 항소심 공판에서 최태민 사건이 박정희 시해의 동기를 제공했다고 진술했다.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된 최태민을 박근혜가 간청해서 석방
전두환본부장의 지시로 최태민을 긴급체포하여 조사를 벌이던 중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학봉 중령은 박근혜씨가 최목사 구속 이후 전본부장에게 찾아와서 석방해 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서울을 떠난 조건으로 풀려났다고 증언 한바가 있다. 따라서 당시 권력핵심을 중심으로는 최태민 목사와 박근혜씨의 새마음 봉사단이 상당한 골치거리로 남아 있었고 문제시 되었다.
박근헤는 최태민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나
1993년 말부터 1994년 3월까지 지병인 만성신부전증으로 서울영동세브란스병원에 3차례 입원, 치료를 받다가 1994년 5월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향년 82세. 가족은 최씨의 장례를 극비리에 치르고 주소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박근혜 후보는 1997년 12월 한나라당에 고문으로 입당한다. 문제는 그녀가 아버지 죽음 이후 최태민 생존 때 까지 줄곧 그와 함께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영남대학 등을 관리하며 비리의혹을 받은 것 외에는 베일에 가려진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즉 최태민이 죽은 몇 년 후 왜 갑자기 정치에 뛰어들고자 한 것도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월간조선이 추적․취재한 최태민 목사 관련 내용을 보면 박근혜 후보는 아직도 정신적으로 그와 절연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태민 망령이 박근혜 후보를 감싸고 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최태민의 사위가 박근혜의 보좌관 역할을 하였고, 방북도 함께 했으며 아직도 지근거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뉴스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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